쓰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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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사천성)

소개[편집 | 원본 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 중국 서남부에 위치한 성으로 예로부터 인구와 물산이 풍부하였으며 현대에도 중국공업의 중심지 중 하나이다. 한국어로는 한국음을 그대로 따온 '사천성'이라는 명칭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양쯔강의 지류인 창 강을 비롯한 4개의 강이 사천을 흐르고 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뭐니뭐니해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천 관련 내용들은 맵기로 유명한 사천요리와 촉한으로 대표되는 삼국지 관광유적들일 것이다.

고대부터 험난한 지형에 위치해 외부의 침입이 쉽지 않고, 많은 인구와 풍족한 생산력을 자랑하는 사천성의 이러한 특성덕에 삼성퇴 유적으로 대표되는 선사시대부터 오대십국시대까지 많은 독립왕조가 흥망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사천성에 근거한 세력은 사천성이 워낙 꿀스타2로 따지면 풍부한 광물지대땅이라 거기서 만족하는 경향성을 보였으며 유비촉한처럼 무슨 특별한 대의명분이 없는한 험악한 주변지형으로 인한 교통 인프라 부족으로 거의 사천땅 내부에서 망해버리는 일이 빈번하였다. 유일한 예외가 초-한 쟁패에서 승리한 유방나라(전한) 정도.

주요도시로는 한국에선 성도로 잘 알려진 청두가 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고대~ 진한시대[편집 | 원본 편집]

고대에는 삼성퇴 유적으로 대표되는 독립적인 문화가 있었으나 이후 진(秦)이 이 지역에 위치였단 파, 촉을 정벌함으로서 진의 영역이 되었다. 당시 진은 촉군과 한중군(현재의 섬서성 한중시)으로 사천땅을 다스렸는데 이 시기의 사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이 세워지게되니 바로 촉군태수 이빙과 그의 아들 이랑이 촉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세운 수리시설 두장옌(都江堰, 도강언)이다. 이빙은 진 소양왕으로부터 10만 냥의 자금을 받아 아들인 이랑(李郞)을 포함한 1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 수로를 건설하였다. 당시 기술력의 문제로 공사 기간은 8년이 넘게 걸렸으나 수로가 완성된 뒤에는 홍수 피해가 눈에 띄게 줄었고, 수량 공급이 안정화되어 밀림만 존재했던 파촉 지역의 개발이 가속화되었으며 이로서 진의 중국 통일에 후방기지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한나라 이후에도 계속적인 보수와 개량이 이루어졌고, 이를 건설한 이빙 부자는 물의 신이 되어 사당이 세워졌으며 지금도 현존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후 진이 내부의 부패와 6국의 후예들의 반발로 항우와 유방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이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으로 유방이 한중과 촉을 다스리는 왕인 한왕이 되었는데 한왕 유방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힘을 키워 재빨리 관중지역을 장악하여 항우와 맞싸웠고 결국 최후의 승리자로서 통일 왕조인 한을 세웠다. 한이 세워진 이후에도 이 지역은 수도인 관중을 부양하는 배후지로서 기능하였으며 그 경제력 역시 관중 지역을 넘어서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불리게 되었고 문화와 학술이 발전하여 제와 노 지역과 대등하다고 평가 받을 정도가 된다. 후한 말엽의 기록으로는 이 지역 인구는 720만명으로 후한 13주 가운데 제일의 인구수를 자랑하게 된다.

삼국시대[편집 | 원본 편집]

후한 말엽에는 군벌 유언, 유장 부자가 다스렸으나 정치적으로는 혼란한 상황에서 촉의 유언부자와 한중의 장로간의 갈등으로 인해 형주의 유비가 이 지역에 개입하게 되었고 결국 214년에 유비가 사천지역을, 219년에 한중을 평정하면서 촉한(221~263)왕조가 성립하게 된다. 이후 이릉대전을 통해 군사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당시의 재상 제갈량이 도강언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법령을 정비하고 남벌을 감행하므로서 촉한, 사천지역의 경제와 사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후 촉한은 한나라 재건을 목표로 제갈량과 강유 시대에 수많은 북벌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유비의 뒤를 이은 후주 유선이 간신 황호를 총애하여 정치가 피폐해지면서 위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이 시대의 기록은 후일 삼국지 등으로 유명해지면서 사천의 문화유산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5호 16국~5대 10국 시대때까지[편집 | 원본 편집]

이후 서진의 영토가 되었다가 서진이 8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붕괴하던 와중 저족 출신 이웅이 세운 성한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성한 왕조가 붕괴한 이후 초기에는 동진, 전진, 초종, 송, 제, 양,의 지배를 받았고 이 시기가 지나면 북조의 서위, 북주의 지배를 받았다. 대체적으로 정치가 불안했기 때문에 전란이 빈번했고 사회 경제가 정체되어 있었다.

수당 시기, 쓰촨 지역은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는 전성 시기를 맞이하여 '양일익이(揚一益二; 양은 강남을 뜻하고 익은 익주, 즉 사천땅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불리웠다. 중당시기 이후로는 주로 당 황실이 중원의 전란을 피해 도주(?)하는 지역으로 유명한데 "안록산-사사명의 난'이 발발하자 당 현종과 당 숙종이 피난했으며 그 후에도 당 덕종은 주비의 난, 당 희종은 황소의 난으로부터 사천땅으로 피신하였다. 이 시기 각지의 문신들과 문인들 역시 사천으로 피신하였고 덕분에 이 시기에 남겨진 문화유산들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이후 왕건(王建)과 맹지상(盟知祥)이 각각 918년과 931년에 연이어 쓰촨 지역에 전촉과 후촉 정권을 세웠다. 전촉과 후촉 모두 전기에 ‘휴양생식(休養生息)’정책을 채택하여 중원전투에 휘말리지 않았기 때문에 쓰촨 일대는 전국에서 가장 번영한 지역이 되었으며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양잠과 농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하였다. 또 5대 십국 시기 중국의 문화, 예술 중심지가 되었는데 전란을 피해 문인이나 화가가 피난을 많이 왔기 때문이었다, 전촉 당나라 말기 대표적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위장(韋荘), 글과 그림에 두루 뛰어났던 선월대사(禅月大師) 관휴(貫休)가, 후촉때는 화조화(花鳥畵)에 능했던 화가 황전(黃筌), 시인 모문석(毛文錫), 구양형(歐陽炯) 등이다. 당말부터 각지에 읊어지던 시와 사(詞)을 모아 편찬한 시집 <화간집(花間集)>이 발간되었는데, 구양형이 서문을 썼다고 한다. 경제력이 강했다는 이후로 병합 이후 송나라가 전쟁물자를 위해 많은 착취를 했고, 이것이 대대적인 농민봉기인 "사천균산 반란"(993~995)의 원인이 되었다. 후촉의 멸망 이후 사천 지역에 세워진 독립왕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송, 원, 명, 청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송원시기 쓰촨 지역에서는 왕소파(王小波)의 난, 이순(李順)의 난 등 대규모 농민 봉기가 수차례 일어났다. 그러나 전국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여전히 안정되어 있었던 쓰촨 지역은 사회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양송(兩宋)지역은 금과 몽골을 저지하는 후방이 되었다. 원 초기 쓰촨 지역은 반세기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경제가 크게 파괴되었다.

명 홍무(洪武) 4년(1371년), 명 왕조는 군사를 일으켜 쓰촨 지역을 명 왕조의 영토로 유입시켰다. 명 말기 장헌충(張獻忠)의 봉기군이 쓰촨 지역에 들어와 대서 정권(1644년 ~ 1646년)을 세우고 성도를 서경(西京)으로 삼았다. 청 초기 30여 년간 쓰촨은 줄곧 전란에 휩싸여 있었고 강희 20년(1681년)에서야 비로소 안정된 시기에 접어들었다. 가경(嘉慶) 원년(1796년), 쓰촨, 허베이(河北), 산시 지역에서 백련교도의 난이 발발하였고, 봉기는 9년 지나서야 비로소 진압되었다.

송 말기에서 청 초기, 쓰촨 지역은 전대미문의 전란 속에서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가 쇠퇴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은 명초와 청초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이민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호광전사천'(湖廣塡四川)이라 한다. 두 차례의 이민 운동으로 인구가 부족한 쓰촨은 대량의 노동력을 얻을 수 있었고 이로써 사회경제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중화민국~ 현대[편집 | 원본 편집]

청말기에 이르러 시모노세키 조약 당시 충칭이 개항되었으며 이때부터 사천은 근대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군벌 시대가 지나고 항일전쟁기에 사천 지역은 후방 지역으로서 각지의 공업,문화,행정 단체가 들어와 중국의 후방 지역으로 남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전란에서 떨어진 후방지역으로서 근대적인 성장을 거듭한 지역이 되었다. 이후 장제스의 중화민국 소속으로 남았으나 1949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청두에서 타이완으로 도주함으로서 이 지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한때는 사천과 충칭이 합쳐져서 단일 행정구역이 되기도 하였으나 충칭이 1997년 분리되어 충칭직할시가 되면서 오늘날의 행정구역이 완성되었다.

현재의 쓰촨성[편집 | 원본 편집]

쓰촨, 충칭 일대는 중국 유수의 공업지역으로서 다양한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도 청두 1000만 명, 충칭 3000만 명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편이다. 쓰촨은 광물 자원이 풍부해 132가지가 넘는 지하 자원이 매장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그중 바나듐, 티타늄, 리튬을 포함한 11가지는 중국 제1의 매장량을 자랑한다. 쓰촨 지역에서만 중국 전체 철 생산량의 13.3%, 티타늄 생산량의 93%, 바나듐 생산량의 69%, 코발트 생산량의 83%를 차지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농업생산량 역시 여전하여 쓰촨은 현재 중국의 주요 농업 기반 중 하나이다. 1999년에 쌀과 밀을 포함한 곡물의 생산량이 중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상업 작물로는 귤, 사탕수수, 고구마, 복숭아, 포도 등이 있다. 쓰촨은 또한 중국에서 돼지고기 생산량이 가장 많고 누에고치 생산량은 2위를 차지했다.

쓰촨은 여행자원이 풍부하고, 그 자연이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큼 아름다워 갈수록 관광객이 많아지는 추세다. 《삼국지》로 유명한 촉한의 중심지역이었기 때문에 삼국지 관련 역사 관광도 많은편이다. 제갈량의 무덤인 무후사가 있으며, 그 옆에 조그만하게(…) 유비의 무덤도 만들어져 있다. 아무래도 다른 왕조와도 엮이는 다른 지역들과 달리 쓰촨 땅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지도 있는 왕조가 촉한이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동네 여기저기에 삼국지 관련 관광지가 있다. 방통이 죽은 낙봉파 같은 순수하게 소설인 《삼국지연의》와 관련이 있는 유적지도 있는데 당연히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다. 하여간 밑동네 윈난성과 함께 삼국지 관련 개드립(?)을 팔아먹는데 가장 익숙한 동네. 2015년에는 어떤 미친 놈이 문화유산인 제갈량의 출사표 비석에 '×× 왔다 감'이라고 지 이름을 새겨놓는 만행을 저질러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촉빠들 단체로 피꺼솟 솔직히 남의 일도 아닌게 한국인들이 여행가서는 그 지방 문화유산에 지 이름 낙서하는 거랑 다를게 없다

음식으로는 사천요리로 유명하며 궁보계정(쿵파오 치킨), 마파두부 등의 요리가 유명하다. 그러나 막상 한국음식의 매운맛을 기대하고 가면 곤란한게 한식이 달달하면서 칼칼한 매운 맛을 내는데 반해, 사천요리의 매운 맛은 산초를 비롯한 향신료를 사용한 얼얼한 매운 맛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지방의 중국 요리들보다도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대한민국 EBS의 한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요리사를 지망하는 한국 청년이 길거리에서 한국식 매운닭 요리를 선보였는데 그 지방 사람 대부분이 '이건 좀 덜 매운 거 같다, 솔직히 더 매워야 할 것'이라는 식의 반응을 내놓는 장면이 방영되기도 했다.(...)

2008년에 발생한 쓰촨성 대지진으로 피해를 보기도 했으며 당시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지원이 있었다. 이 지진의 원인이 '삽혐댐 건설로 인한 과도한 수량하중이 지각에 영향을 끼쳐 지각활동을 활발하게 만든게 아니냐? 사실상 인재'라는 시선도 있다.

정말로 여담이지만 《기동전사 건담》을 베껴먹은 희대의 라이선스 위반 로봇인 천향 2호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로봇은 일본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