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지리학

정치지리학(政治地理學, Political Geography)은 인문지리학의 하위분야로, 각 지역에서 고유한 정치 집단이 조직되는 과정 및 그 정치 집단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정치지리학은 공간(space)이 어떻게 영역(territory)으로 변화되는지를 연구한다. 즉, 정치공동체들이 서로간의 경계선을 어떻게 획정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불균등하게 나타나는 정치 과정의 결과와, 정치 과정 그 자체가 공간적 구조에 받는 영향이 정치지리학의 관심사이다. 전통적으로 정치지리학은 분석수준을 세 단계로 구분하는데, 그 중간은 국가(state) 수준의 분석이며, 그 상위 단계는 국제관계학 (혹은 지정학), 그리고 하위 단계가 지역성[1] 분석이다. 이 분야의 일차적 관심사는 사람들(people), 국가, 영토 사이의 상호 관계로 요약할 수 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정치지리학은 인문지리학 자체의 시작과 함께 탄생했다. 초기의 정치지리학자들은 자연지리, 영토, 주권 사이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군사적, 정치적 결과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지역지리학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는데, 이는 각 지역의 고유한 특질에 초점을 맞추면서 물리적 환경이 인간 활동에 끼치는 영향을 강조하는 환경결정론적 성향의 유사성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는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의 책, 『정치지리학』(Politische Geographie)에서 드러난다. 1897년 출판된 이 책에서 생활권(Lebensraum)[2]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는데, 이는 민족(nation)[3]의 문화적 성장과 영토 확장을 연결짓는 논리이다. 참고로 이 생활권 개념은 1930년대 나치 독일이 제국주의적 확장을 학문적으로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활용되었다.

영국의 지리학자 핼퍼드 매킨더 또한 환경결정론에 강하게 영향받았다. 1904년 그가 처음 제기한 '역사의 지정학적 중심축(geopolitical pivot of history)' 내지는 심장부(heartland)라는 개념을 발전시켜나가면서 그는 해양 세력(sea power)의 시대는 끝나고 대륙 세력(land based powers)가 떠오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유로-아시아(Euro-Asia)의 심장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세계 분쟁에서 해양세력의 중요성을 역설한 알프레드 머핸(Alfred Thayer Mahan)의 이론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심장부 이론은 군수산업단지의 유지에 바다를 통한 물자 수송을 필요로 하지 않는 거대 제국을 가정했는데, 이 제국은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도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관점은 냉전기 중부 유럽에 동구와 서구 사이의 완충국(buffer state)을 수립하자는 군사 사상을 뒷받침하며 그 영향력을 증명했다.

심장부 이론은 세계를 심장부(Heartland, 동유럽+서부 러시아)와 세계섬(World Island, 유라시아아프리카), 주변 도서(Peripheral Islands, 영국, 일본,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신세계(New World, 남북아메리카)로 구분했다. 매킨더는 심장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예컨대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될 당시에 소련독일 사이에 완충국을 수립해 어느 측도 심장부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한편 당시 라첼은 생활권과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이론을 창안하고 있었다. 라첼은 국가를 일종의 '유기체'라고 간주하며,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는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두 이론가 모두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정치적, 지리적 과학의 개념, 곧 정치지리학을 창안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정치지리학은 이러한 패권 경쟁이나 정부 정책에 주안점이 있었다. 상술한 이론들은 칼 하우스호퍼와 같은 독일의 지정학자들에게 수용되었는데, 이들은 (아마도 의도치 않게) 나치의 정치 이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중립적'인 국가 팽창 요구와 같은 '과학적' 이론에 의해 정당화되는 정책은 당시 매우 영향력이 컸다.

정치지리학과 환경결정론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과, 냉전 시기 정치적 경계의 동결은 이후 정치지리학의 중요성이 낮아지는 요인이 되었다. 이에 브라이언 베리(Brian Berry)는 1968년 정치지리학을 '빈사 상태의 낙후지(a moribund backwater)'라고 표현했다. 인문지리학의 다른 분야에서는 양적 공간 연구(quantitative spatial science), 행동주의 연구, 구조주의적 마르크시즘 등을 비롯한 새로운 접근법이 다양하게 시도되면서 학문적 활기가 뜨거웠지만, 정치지리학계는 이러한 흐름을 무시하고 지역적 접근에 전념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 정치지리학의 연구성과는 대개가 기술적( technological descriptive, 記述)인 것들이었고, 데이터 수집을 통해 일반화 가능한 결론을 도출하고자 시도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1976년에 들어서야 리처드 뮤어(Richard Muir)가 '정치지리학은 죽은 학문이 아니라 죽지 않는 학문'[4]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연구분야[편집 | 원본 편집]

1970년대 후반부터 정치지리학은 일종의 르네상스를 맞이했고, 오늘날에는 가장 역동적인 분과학문 중 하나로 평가된다. 정치지리학의 재부흥은 저널 《Political Geography Quarterly》의 창간(그리고 격월지 《Political Geography》로의 증간) 덕분이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성장은 정치지리학자들이 인문지리학의 타 분야에서 시도되었던 새 접근법을 차용한 덕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1979년에 발표된 론 존스톤(Ron J. Johnston)의 선거 지형 연구는 양적 공간 연구 방법론에 기반하였으며, 1986년 발표된 로버트 삭(Rovert Sack)의 영토성(territoriality) 연구는 행동주의적 접근법에, 피터 테일러(Peter Taylor)의 세계체제 이론(World System Theory)은 구조주의마르크시즘에 기댄 바가 크다.

이 외에도 정치지리학의 재부흥에는 냉전 종식에 따른 세계 정세의 변화 또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아직 제대로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신세계 질서나, 영토 기반 민족주의 연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회 운동과 정치 분쟁과 같은 새로운 연구 어젠다의 발전 등이 있다. 또한 현재 및 미래의 환경문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최근에는 녹색 정치의 지리학에 대한 관심[5]도 높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환경보호의 지정학, 현존 국가기구 및 정치제도 일반의 능력에 대한 연구가 있다.

권력의 작동이 국가와 관료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정치지리학은 기존 정치학 적근법의 적용 범위를 넓혔다. 이는 정치지리학자들의 관심이 경제지리학이나, 특히 장소의 정치학[6]에 있어서 사회지리학, 문화지리학을 비롯한 기타 인문지리학 분과와도 겹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현대의 정치지리학이 여전히 과거의 연구주제(후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처럼 관련 분야로 학제적 확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던 학문 분야간의 구분이 흐려지고, 학문 자체는 보다 발전해가는 인문지리학 자체의 변화 과정에 속한다.

구체적으로 현대의 정치지리학은 다음과 같은 주제를 주 연구 관심사로 둔다.

  • 국가들이 공식적으로(EU), 또 비공식적으로(제3제계)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는 이유와 과정
  • 과거 열강과 식민지 사이의 관계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런 관계가 어떻게 선전(propagate)되는지. 예를 들어 신식민주의가 있다.
  • 정부와 국민의 관계.
  • 국제 무역과 조약을 포함한, 국가간의 관계.
  • 국경(경계)의 기능, 획정, 감시.
  • 상상된 지리학(imagined geographies)이 갖는 정치적 함의.
  • 지리적 공간에 대한 정치권력의 영향.
  • 커뮤니케이션(전화, 라디오, TV, ICT, 인터넷, SNS 등)의 정치적 함의.[7]
  • 선거 결과, 선거 지형 연구.
  • 헤게모니, 세계체계론(world-systems theory)[8]

비판적 정치지리학[편집 | 원본 편집]

비판적 정치지리학의 주 관심사는 최근 경향에 대한 전통적인 정치지리학 비판[9]이다. 많은 '비판적 지리학' 운동과 같이, 이 관점은 포스트모더니즘, 탈구조주의, 탈식민지주의에서 비롯된 점이 많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페미니즘 지리학: 권력 관계를 가부장제로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체성과 정체성 정치의 대안 개념을 이론화하고자 시도한다. 퀴어 이론, 청소년(youth) 연구와도 관련있다.
  • 탈식민지 지리학: 정치지리학의 제국주의적, 보편주의적 성격을 지적한다. 특히 개발지리학(development geography)에 주목한다.

주요 정치지리학자[편집 | 원본 편집]

참고문헌[편집 | 원본 편집]

  • Claval P (1978) Espace et pouvoir,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 Harvey D (1996) Justice, nature and the geography of difference Oxford: Blackwell ISBN 1-55786-680-5
  • Gottmann J (1952) La politique des États et leur géographie
  • Johnston RJ (1979) Political, electoral and spatial systems Oxford: Clarendon Press ISBN 0-19-874072-7
  • Painter J (1995) Politics, geography and 'political geography': a critical perspective London: Arnold ISBN 0-340-56735-X
  • Pepper D (1996) Modern environmentalism London: Routledge ISBN 0-415-05744-2
  • Ratzel F (1897) Politische Geographie, Munich, Oldenbourg
  • Sack RD (1986) Human territoriality: its theory and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0-521-26614-9
  • Sanguin A-L & Prevelakis G (1996), 'Jean Gottmann (1915-1994), un pionnier de la géographie politique', Annales de Géographie, 105, 587. pp73–78
  • Taylor PJ & Flint C (2007) Political geography: world-economy, nation-state and locality Harlow: Pearson Education Lim. ISBN 0-13-196012-1

더 읽어보기[편집 | 원본 편집]

  • Agnew J (1997) Political geography: a reader London: Arnold ISBN 0-470-23655-8
  • Bakis H (1987) Géopolitique de l'information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 Bakis H (1995) ‘Communication and Political Geography in a Changing World’ Revue Internationale de Science Politique 16 (3) pp219–311 - http://ips.sagepub.com/content/16/3.toc
  • Buleon P (1992) 'The state of political geography in France in the 1970s and 1980s' Progress in Human Geography 16 (1) pp24–40
  • Cox KR, Low M & Robinson J (2008) Handbook of Political Geography London: Sage
  • Short JR (1993) An introduction to political geography - 2nd edn. London: Routledge ISBN 0-415-08226-9
  • Spykman NJ (1944) The Geography of the Peace New York: Harcourt, Brace and Co.
  • Sutton I (1991) 'The Political Geography of Indian Country' American Indian Culture and Research Journal 15(2) pp1–169.

각주

  1. locality, 로컬리티라고 음차하기도 한다
  2. 그냥 음차해서 '레벤스라움'이라고 쓰는 경우도 많다.
  3. 혹은 국가. 영어 'nation'은 보통 '민족'이라고 번역되지만, 실제 한국에서 통용되는 민족의 의미는 nation과는 조금 다르다. 민족주의 참고.
  4. 의역이다. 원문:"political geography might not be a dead duck but could in fact be a phoenix" 직역하면 "정치지리학은 죽은 오리가 아니라 사실 불사조일지도 모른다"
  5. 예를 들면 데이비드 페퍼(David Pepper, 1996)의 연구가 있다.
  6. 이러한 연구의 예로는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1996)이나 조 페인터(Joe Painter, 1995)의 책이 있다.
  7. Henry Bakis (1987), (Editor, 1995)
  8. 세계를 하나의 사회체제로 파악하여 중심부와 주변부의 비대칭적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
  9. 원문: "the criticism of traditional political geographies vis-a-vis modern tr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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