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 추격전

비스마르크 추격전(Bismarck Chase) 또는 전함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전투(The last battle of the German battleship Bismarck)는 1941년 5월 26일~27일에 대서양에서 벌어진, 비스마르크라는 군함 한 척을 잡기 위해 영국의 모든 군함들이 참가한 해전이다.

이 치열한 추격전은 영국 해군이 극적으로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키며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다만 승리한 영국은 비스마르크의 위력을 실감했으며, 이로 인해 아직 살아남아 북대서양에서 영국 해군을 위협하는 비스마르크급 전함 2번함 티르피츠 때문에 활동이 위축된다. 이 한편의 극 같은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유명한 전함간 포격전으로 남았다.

Bismarck66s.jpg

배경[편집 | 원본 편집]

항구의 비스마르크

이제 어느 정도 해군의 구색을 갖춘 크릭스마리네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의 뒤를 이어 전함 두척을 진수시키며, 이들이 그 유명한 비스마르크티르피츠다.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미국의 아이오와급 전함과 일본의 야마토급이 취역하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전함이였고 주변 국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들이 상대해야 할 주적인 영국 해군에 비하면 여전히 초라한 수준의 해군이였고 전면에서 영국 해군을 상대하는 것은 독일 해군으로선 무모한 행동이라는 건 독일군 수뇌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 해군은 비대칭전력인 잠수함 유보트와 순양함 이상 함급의 전함들로 영국을 향하는 상선들을 격침시키는 통상 파괴작전을 펼치게 되며 지속적으로 전과를 올리고 영국 해군에 큰 위협이 되었다.

반면에 독일은 지속적인 통상 파괴작전의 성공과 샤른호르스트를 비롯한 전함,순양함들의 전과로 고무된 독일 해군은 라인 훈련이라는 작전을 계획하고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과 전함 비스마르크를 북대서양으로 보내 통상 파괴작전을 크게 한판 치르기 위한 작전을 개시한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사건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1941년, 독일 제 3제국이 유럽을 석권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유일한 유럽 국가는 사실상 영국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1941년에 접어들면서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의 유럽 국가들은 히틀러의 망상을 위한 제물이 되었고 오직 섬나라이자 세게 최강의 해군강국이였던 영국만 유럽에 홀로 남아 독일에 맞서고 있었다. 독일은 영국까지 점령한 뒤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영국을 공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시기였다. 이미 1940년, 영국을 무력화 시키기 위해 대규모 폭격작전을 실시한 독일 공군 루프트 바페와 그를 막기 위한 영국 공군간의 대규모 항공전인 영국 본토 항공전이 발발했었고 독일의 항공 공격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영국의 지형적 특징(섬나라)을 이용해 해상에서 영국을 고립시키는 통상파괴전은 계속되었고 상당한 전과를 올리며 큰 위협으로 부각된다. 즉 통상파괴전이란 영국을 향하는 비무장 상선들을 압도적인 화력을 지닌 군함들이 공격하여 영국의 해상 교통로를 차단하는 것을 말하며 1차대전 당시 유보트의 파괴작전은 2차대전 까지도 이어져 울프팩(늑대 무리) 같은 잠수함들을 통한 해상봉쇄 시도가 이루어졌고 영국은 이들로부터 지속적인 피해를 입을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중에만 적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였으니 그것이 경,중순양함을 비롯해 전함들 같은 소수의 수상함정들 까지 대 상선 파괴 임무에 투입하는 수상 파괴전도 같이 진행되었다. 당대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던 영국은, 1차대전 이후 해체되었다가 재건이 진행중이였던 독일 해군 크릭스 마리네보다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독일도 영국 해군과 정면충돌을 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영국은 다수의 해외 식민지에 자국 해군을 파견해 놓아 전력이 분산되어 있었고 브리튼 섬을 지키는 본토 함대만을 상대하며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렇기에 크릭스 마리네는 직접적으로 영국 해군을 상대하기보다 상선을 파괴해 해상 물류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임무에 투입되었고 그 중 당대 세계 최대의 군함인 비스마르크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수상함정을 이용하여진행된 통상파괴전은 1941년 부터 본격적이게 되었다. 처음은 독일의 전함과 순양함인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우의 성공적인 통상 파괴전이 진행되었다. 이후 이에 고무된 독일 해군은 어드미럴 히퍼급 중순양함도 통상 파괴전에 투입시키며 효과를 보았고 통상파괴전을 위해 독일의 최정예 군함들이였던 샤른호르스트와 어드미럴 히퍼급 중순양함, 그리고 당시 세계 최대의 군함 비스마르크[1]를 모아 통상파괴전을 수행하는 하나의 함대를 구축하려 하였다. 기존의 통상파괴작전은 한두척의 군함이 짝을 이뤄 수행하는 전대급 규모라 다수의 군함의 호위를 받는 대형 수송함대를 피해없이 공격하기가 불가능했다. 실제로 샤른호르스트도 전함을 비롯한 호위함대 때문에 공격을 포기하기도 했으니 이같은 운용방식의 문제점을 독일 해군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독일 해군의 함정 보유 수량이 부족하다는 점으로 독일 해군이 보유한 통상파괴전 수행 가능 수상함은 넓게 잡아 봐야 비스마르크,샤른호르스트급,히퍼급,도이칠란트급같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이들 각각의 함급도 많아봐야 너뎃척 안팎 뿐이였으니 한척이 수리받는 동안 작전을 하는 등의 작전 개념은 전시로 들어서며 어려워졌고 설성가상으로 작전에 나가 손상을 입거나 폭격으로 작전 수행이 불가능한 함정들도 추가로 발생하자 지속적인 통상파괴전이 힘들어 졌다. 특히 전함 그나이제우의 폭격 피해는 독일 해군의 큰 전력손실을 불러왔고 더 이상 고가치 함정이란 이유로 영국 해군과의 일전을 위해 아껴 놓았던 비스마르크를 작전에 투입시키기로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4월, 비스마르크함은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호위구축함 6척을 거느리고 해군기지를 떠나 발트해의 차가운 바닷물을 가르며 출항한다. 라인 훈련이라 명명된 이 막중한 1급 기밀 임무는 비스마르크의 첫 처녀항해였다.

라인 훈련[편집 | 원본 편집]

본래의 라인 훈련 작전은 전함 비스마르크를 포함하여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순양전함 샤른호스트, 그나이제우를 포함한 강력한 구성의 함대였다. 영국 뇌격기에 얻어맞아 수리상태에 들어간 그나이제우와 기관 고장으로 사른호스트가 이탈하면서 4척의 함대를 구성하려던 계획이 2척의 전대로 쪼그라들게 되었다.

영국의 대응[편집 | 원본 편집]

후드 격침[편집 | 원본 편집]

순양전함 후드

각주

  1. 선체 길이는 후드가 조금 더 길었지만 배수량은 비스마르크가 더 많이 나갔다. 비스마르크는 전함이고 후드는 순양전함이니 장갑재 같은 곳에서 배수량 차이가 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