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공국

(부르고뉴 공국에서 넘어옴)

영어: Duchy of Burgundy
프랑스어: Duché de Bourgogne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중세, 근세 시대에 프랑스 동부 지역에 위치했던 공국. 카페 왕조 초기부터 왕자령(appanage)으로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중세 프랑스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발루아 왕조 성립 [1] 이후에는 당시 유럽의 경제 중심지였던 플랑드르 일대를 상속받기도 했으며, 백년전쟁 도중 자치권을 확보한 뒤부터는 자국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으나 용담공 샤를(Charles the bold)의 전사를 끝으로 가문이 단절되면서 그 영토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게 합병된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기원[편집 | 원본 편집]

부르고뉴(Burgundy,burourgogne)라는 이름은 동게르만 일파의 부르군트족(Burgundian)과 그들이 세운 부르군트 왕국(kingdom of burgundy)에서 기원한다. 이들 부르군트족은 다른 여타 게르만족들과 같이 이주를 거듭하다 쇠락하가던 로마 제국을 맞딱드렸고, 5세기 쯤에는 라인 강 중하류 지역에 정착해 왕국을 세운다. 부르군트 왕국은 한때 로마를 따라 훈족에 맞서싸우다(카탈라우눔 전투) 왕이 전사하고 왕국이 멸망하는 해프닝을 겪긴 했으나, 전반적으로 다른 게르만 왕국들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로마와 형식적인 동맹-신종 관계를 맺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 문물을 수용[2]하는 단계를 착실히 밟았다. 그러나 6세기 로마 총독 시아그리우스,서고트 왕국, 인근의 프랑크 부족을 모두 격파하고 서유럽의 패권국으로 떠오른 프랑크 왕국 앞에 부르군트 왕국은 레벨1 잡몹에 불과했고 결국 534년 고도마르 왕 시기 프랑크 왕국을 나눠 다스리던 클로비스의 아들들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다.

이렇게 부르군트 왕국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멸망했지만 그 이름만큼은 프랑크 왕국 시기에도 이어진다. 그러나 카롤링거 왕조 시기 샤를마뉴의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손 강 이서 지역이 다른 지역과는 달리 서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부르고뉴 공국의 원류이다. [3] 이 부르고뉴 공국의 공위는 로베르 가문 [4]에게 넘어갔다가 982년 외드 앙리 대공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외드 앙리의 양자였던 오토 빌헬름과 외드 앙리의 조카인 프랑스왕 로베르 2세 사이에서 계승분쟁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승리한 것은 로베르 왕이었고,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령으로 흡수되었다가 로베르의 뒤를 이은 앙리 1세가 자신의 동생 로베르에게 왕자령으로 수여함으로서 약 300년 간 존속하게되는 카페 왕조 부르고뉴 공국이 탄생한다.

이때 왕자령(appanage)는 중세시대 프랑스 왕이 부족한 행정력을 가지고 왕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고 봉건 봉신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왕자들에게 영지를 수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왕자령은 후계가 단절될 때는 다시 영지가 왕령지로 넘어가는 구조를 가졌으며 전반적으로 프랑스 왕의 통치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부르고뉴 공국 역시 카페 왕조 시기 대표적인 왕자령으로서 국왕의 통치에 협력했는데, 이는 부뱅 전투, 콜트레이크 전투 등 카페 왕조 시기 치러진 주요한 전투에 종군해 프랑스군의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확인이 된다.

이처럼 카페 왕조는 국왕에 협력하며 별 탈 없이 300년 넘게 부르고뉴의 공위를 지켰으나, 1361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15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면서 결국 단절된다. 한편 비슷한 시기 프랑스 왕실 본가의 카페 왕조도 필리프 5세의 요절을 끝으로 직계가 단절되면서 발루아 백작 필리프[5]필리프 6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발루아 왕조의 막이 오른다. 신생 발루아 왕조는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고 부르고뉴 공국의 계승분쟁에 개입, 모계 계승과 왕의 권위를 앞세워 상속권을 주장하면서 장 2세의 막내아들인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앉힌다. 바야흐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이 유럽사에 등장한 것이다.

발루아-부르고뉴 왕조의 부흥과 몰락[편집 | 원본 편집]

발루아-부르고뉴 왕조는 개창과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바로 부르고뉴 공 필리프 2세 (용담공 필리프)가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 3세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인데, 이로서 용담공 필리프는 자신의 세력권을 저지대 지역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6] 당시 유럽의 경제, 문화 중심지였던 저지대의 위상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이후 부르고뉴 공국이 부흥하게 되는 가장 큰 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용담공의 치세에 분란의 씨앗도 함께 싹텄는데, 바로 그것은 당시 정신병자였던 프랑스 왕 샤를 6세 대신 프랑스를 통치하는 섭정자리를 둘러싼 다툼이었다.[7] 당시 용담공은 자신을 따르는 부르고뉴파(Burgundian Party)의 지지를 받으며 오를레앙 공 루이와 그를 따르는 아르마냑파(Armaganc Party)와 대립했는데, 이 대립은 용담공의 죽음과 백년전쟁의 재개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 그러던 중 오를레앙 공 루이가 부르고뉴파에게 암살되고, 용맹공은 또 아르마냑파의 지지를 받는 샤를 도팽(후일의 샤를 7세)에게 암살되면서 갈등은 점점 격화, 결국 부르고뉴파는 당시 전쟁중이었던 잉글랜드와 결탁해 프랑스 왕실을 배신하기에 이른다.

부르고뉴의 지지를 얻은 잉글랜드군은 파리까지 함락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샤를 6세로부터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인정하는 트루아 조약[8]까지 조인받는다. 그러나 헨리 5세가 급사하고 그 유명한 잔 다르크가 활약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부르고뉴파는 잔 다르크를 영국에 넘겨 처형시키는 식으로 대응을 했으나 이미 사실상 결정된 전세를 뒤집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막 샤를 7세 역시 왕위에 오른 상태로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고, 이렇게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에 따라, 휴전 회담 도중 교묘하게 잉글랜드 측을 배제시킨 체로 부르고뉴-프랑스 양국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라스 조약에 따라, 부르고뉴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하는 대신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국에 대한 봉건 의무에서 해방되면서 사실상 독립국으로 거듭났고 볼로뉴, 베르망두아 등에서의 지배권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역시 잉글랜드에게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고 마침내 1453년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 세력을 축출함으로서 백년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이후 부르고뉴 공국은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기조로 삼았고, 이는 아라스 조약을 체결한 선량공 필리프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용담공 샤를 시기에도 유지되었다.

용담공은 행정기관과 법원을 개편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용병을 고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총병과 포병을 양성하는 군제개혁까지 이루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 산하의 왕이 되려는 그의 시도는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방해공작과 부르고뉴의 성장을 경계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태도 변환으로 좌절되었고, 저지대와 부르고뉴를 연결하기 위해 시도한 로렌 공략 역시 실패하며 핀치에 몰렸다가 최종적으로 로렌 공작 르네와 맞붙은 낭시 전투에서 전사한다.

용담공은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그의 영지는 용담공의 딸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해 그녀의 상속권을 요구한 막시밀리안 1세와 명목상 주군으로서 종주권을 주장한 프랑스의 루이 11세의 다툼 끝에 쥐느가트 전투에서 막시밀리안 1세가 승리하면서 저지대 지역 일대를 마리 드 부르고뉴에게, 부르고뉴 지방은 프랑스에게 넘어가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부르고뉴 공국의 이름이 완전히 역사에서 지워진 것이다.

문화[편집 | 원본 편집]

부르고뉴의 통치자들은 당시 유럽 문화,경제의 중심지였던 저지대를 통치하면서 예술에 막대한 후원을 해주었고 부르고뉴의 궁정들은 항상 음악가와 미술가, 조각가,자수가로 붐볐다. 휴고 반 데어 고스(Hugo van der Goes)는 부르고뉴 공작들의 후원을 받으며 활약한 대표적인 화가이고, 이외에도 아낌없는 후원은 후일 렘브란트 같은 거장들이 활약하던 유럽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네덜란드 회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외에도 부르고뉴의 귀족들은 진귀한 서적들을 읽고 모으기를 즐겼다. 망명생활 도중 플랑드르 지역의 귀족 로데베이크 반 그뤼튀서의 장서관을 방문한 에드워드 4세는 큰 감명을 받고, 영국으로 돌아간 뒤 이를 모방해 후일 영국 왕립도서관이 되는 개인 장서관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상황이 이러니, 부르고뉴가 출판업과 인쇄술의 중심지까지 겸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문화와 예술을 가장 많이 후원한 선량공 필리프는 무예가 뛰어난 귀족들 24명을 모아 황금양모 기사단(Golden Fleece Order)라는 기사단을 창시하기도 했다. 이들의 대장은 특히 신분이 높은 귀족이어야만 했으며, 초대 단장은 선량공 본인이었다. 단원들 역시 귀족이어야 했으며, 이들은 모두 범죄나 이단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대에도 그리스 신화에나 나올법한 이교스러운 이름 탓에 빈축을 사기도 했으니, 할 일 없는 높으신 분의 설정놀음이라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러나 의외로 명망이 높았는지 기사단장직의 계승 문제에 교황이 관여한 적도 있고 기사단장직은 역대 부르고뉴 공작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 스페인의 왕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단절되자 자신이 정통 기사단장이라고 부르봉 왕조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Paradox Interactive의 게임 Crusader Kings 2Europa Universalis 4에서 구현되어있다. 크킹에서는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 나오는데, 1066년 시나리오로 시작시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 설정되어있으며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가 왕위를 찬탈하고 내전이 펑펑 터져 게임 진행이 역사와 달라지게 하는 제일 큰 원흉이다. 유로파4에서는 독립 국가로서 실제 역사대로 프랑스와 서로 대립하는데, 후사 없이 통치자가 사망하면 나라가 자동으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황제국에게 상속되는 부르고뉴 상속 이벤트도 구현되어있다.

역대 부르고뉴 공작 목록[편집 | 원본 편집]

작성중

각주

  1. 프랑스, 부르고뉴 둘 모두에게 해당된다.
  2. 서고트 왕국과 같이 법전을 편찬하였다. 법전의 정식 명칭은 심플하게 부르군트법(Lex Burgundionum).
  3. 한편 상부르군트(오늘날의 프랑슈-콩테 지방과 스위스 서부)와 하부르군트(프로방스)로 나뉜 나머지 지역들은 하부르군트을 통치하던 지역 귀족인 보소 가문이 프로방스 왕국을 선언하며 카롤링거 왕조로부터 독립했다가, 나중에 상부르군트까지 장악하고 부르군트 왕국(아를을 수도로 했기 때문에 아를 왕국이라고도 불린다.)을 건국한다. 이후 잦은 왕조 교체를 걷다 최종적으로 11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잘리어 왕조로 왕위가 넘어가게 된다.
  4. 에스베의 로베르를 시조로 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위그 카페 역시 로베르 가문의 일원이며, 편의상 보통 위그 카페 이전 서프랑크 왕으로 즉위한 파리의 오도, 로베르 1세를 로베르 왕조로, 위그 카페 이후를 카페 왕조로 정의하는 편. 딱히 로베르 왕조가 갈라진 건 아니기 때문에, 로베르 왕조를 그냥 카페 왕조로 통칭하는 경우도 있다.
  5. 발루아 백국 역시 왕자령으로, 필리프 6세는 필리프 5세와 사촌지간이다.
  6. 공식적으로 플랑드르,아르투아가 영지가 된 건 필리프와 마르그리트의 아들인 용맹공 장 시기이다.
  7. 최근 연구에서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대립이 섭정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일 뿐만 아니라 도시민,부르주아와 봉건 영주 사이의 대립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8. 이때 샤를 도팽은 샤를 6세의 사생아로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