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역사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베트남의 역사는 고대부터 현재 베트남 북부지역[1]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남쪽에는 임읍과 점성이라는 별개의 국가가 존재했다. 베트남 역사의 중심이 되는 북부지역은 다이비엣(대월)이라 불리웠으며[2] 남쪽은 임읍과 프놈, 점성이라는 별개의 국가가 존재했다. 특히 점성은 18세기 들어서야 대월의 영향권에 들어간 걸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베트남이 완성된 건 정말 늦은 시기에 이르러서이다. 더구나 베트남은 15세기 들어 남북조로 나뉘어 오랜 기간 전쟁을 치뤘고 19세기에 들어서야 통일된 왕조가 세워졌는데, 이 남북조 대립기간 동안 안남산맥을 중심으로 이북, 이남 지방은 다른 문화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고 다문화, 다인종 문제가 시작되었다.

고대[편집 | 원본 편집]

  • 구석기 시대
    • 도산/썬비 문화
  • 신석기시대
    • 화빙/박썬문화
  • 청동기시대
    • 풍응우옌/동더우/고문
  • 초기 철기시대
    • 동산 문화. 이 동산문화의 특징인 동고라는 항아리가 동남아시아 대부분과 중국 남방에서 발견됨에 따라 당시에 해상무역이 활발히 이뤄졌다고 학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1960년대 발견된 사람의 치아가 북경원인과 비슷한 걸로 보아 둘은 같은 문화권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문랑[편집 | 원본 편집]

초기철기시대인 동산 문화를 기반으로 건국된 국가. 기원전 7세기(혹은 기원전 2852년)에서 기원전 258년까지 존재했다. 기록에 남은 베트남 지역 최초의 국가이다. 현재 하노이 북부에 존재했던 백월족의 연맹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양자강 이남과 인도의 문화가 융합된 형태를 띠었다. 기원전 7세기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된다.[3] 월사략에 의하면 초대국왕의 이름은 낙룡군이며 그는 마술을 사용하여 주변 부족들을 통합했다고 한다. 유물인 동고에 그려진 전쟁그림을 보면 반랑의 지역이 타민족과의 각축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사회[편집 | 원본 편집]

문랑의 왕은 웅왕이라 불리웠으며 그 밑에는 15개 부락[4]의 족장들이 있었다고 한다. 수도는 봉주라는 현에 세웠다. 왕 아래로는 낙후(문관)와 낙장(무관)이 있었고 왕자와 공주는 관랑이라 불리웠다. 하급관리는 포정이라 불렀다. 관직은 포도라는 형태로 자식에게 승계되었다[5]. 왕위의 장자승계제도는 없었으나 초대 왕이었던 낙룡군이 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줬다는 <대월사기전서>의 기록을 토대로 일부 학자들은 음서제도와 장자승계제도는 베트남 민족 고유의 문화라고 주장한다.

문랑은 고대국가인 만큼 제정일치사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왕은 정치적, 주술적 최고위자였다. 사회형태는 상하구분을 두는 계급사회[6]였고 왕-관랑-낙후/낙장/포정 그리고 평민계급민 낙민이 존재했다. 그 외에 전쟁포로나 죄수들로 생겨난 노비계급도 있었다. 부계사회였으나 동아시아와 같은 남존여비는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평민인 낙민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단발을 했으며 교룡(악어)를 피하기 위한 주술적 의미로 몸에 문신을 새겼다. 남성 낙민은 코(kho)라는 옷[7]을 입었고 여성들은 치마를 입었으며, 의복은 뽕/삼나무의 추출물로 만들었다. 풍습중에는 빈랑 열매 및 구장 잎을 씹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는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이 해상을 통한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농사가 발달했다. 청동기가 매우 발달하여 제련술 및 광산 개발기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방직, 제련 이외에 목공과 도공[8]기술이 발달하였다.

구락[편집 | 원본 편집]

반랑을 멸하고 베트남 북부를 장악한 국가. 기원전 257년~기원전 179년까지 존속했다. 이들에 대한 사료가 별로 남아있지않아 설립과정은 알려져있지 않지만, 민간전승에 의하면 문랑 인근의 구월 부족의 족장 촉반이 구랑을 멸망시키고 세운 국가라고 전해진다. 국호인 구락은 툭판의 구월족과 반랑의 낙월족의 융합을 나타내기 위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수도는 오늘날 하노이 북부 평야지대인 고라로 정했고 국가가 설립된지 2년 후 고라성을 완공했다. 고라성 출토 현장에서 발견된 동과 철로 된 화살촉은 반랑과 마찬가지로 어우 락 역시 타민족의 침입이 잦았다는 것을 뜻한다[9].

평민인 구민들은 사탕수수를 재배해 설탕을 생산했고 논밭에서는 벼, 감자, 고구마, 콩을 생산했다.

1차 중국 북속기[편집 | 원본 편집]

이 1차 중국 북속기의 시작을 언제로 보느냐에 학계의 의견이 갈린다. 한 쪽은 한나라가 남월을 멸망시킨 기원전 111년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쪽은 남월이 구락을 완전히 멸망시킨 기원전 179년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말로는 북속시대라고도 부른다. 전한에게 점령된 이후 5대 10국시대까지 이어진 중국의 지배 하에 이곳의 행정명칭은 교주였다. 이 교주지역은 본토의 혼란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되려 본토의 혼란을 이용해 독립하려는 욕구를 지속적으로 표출했다. 한 마디로 한, 진, 수, 당의 존재시기를 빼면 이곳은 독립된 정치세력으로 볼 수도 있다.

진의 남진[편집 | 원본 편집]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이자 제국이었던 진의 장군 도수가 서기 214년, 백월의 영토[10]를 정복하고 오늘날 귀주의 남쪽까지 나아갔으나 토착 월족의 저항에 진군을 포기했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도수는 철수 전 오늘날의 광동/광서성, 귀주성 남쪽에 계림/남해/상 3군을 설치하였다. 이 중 남해군이 아래에 서술된 남월의 시초라 볼 수 있다.

남월[편집 | 원본 편집]

진시황 사후, 진은 점령지인들의 불만과 토목사업에 대한 민중의 불만, 중앙의 권력다툼[11]으로 인해 혼란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진의 남서쪽 3군 중 남해군 도위였던 조타는 진의 멸망 이후 유방과 항우간의 전쟁을 틈타 3군을 통합하여 남월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칭왕(왕을 사칭함.)을 했다.

남월 건국 1년 후 유방이 전한을 세웠고 유방은 조타가 독립왕조를 열 것이라 예측하여[12] 조타를 남월왕에 봉했다. 유방 사후, 전한이 여씨 가문의 손에 들어간 후, 가문 출신이자 실권자인 여태후가 남월에 대한 농기구, 철제의 수출을 중단시켰고 이에 조타는 기원전 183년 칭제를 하고 전한의 장사군[13]을 공격했다. 공격이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사서에는 단순히 침입으로만 적고있다. 이에 여태후는 남월을 침공했으나 중국 남부의 풍토병에 병사들이 맥을 못쓰고 병사자가 속출하자 철수했다. 여태후가 사망한 기원진 180년, 전한 3대 황제 문제가 육가를 남월로 보내 조타로 하여금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명했고 조타는 이를 받아들여 대외적으로 황제의 칭호를 버렸다. 허나 조타는 국내에서는 계속 황제로 군림했고 전한의 침공이 그치자 오늘날 푸젠 성의 민월족과 홍강 유역의 구락을 복속시켰다(기원전 179년). 한나라는 남월과의 외교관계 개선 및 흉노와의 갈등때문에 남월의 영토확장을 신경쓰지 못했다. 남월의 3대 황제 영제 때부터 내부로도 칭제하지 않았고 5대 왕인 양왕 즉위시기(기원전 111년) 한무제의 군대에 의해 멸망당했다.

남월 하의 구락[편집 | 원본 편집]

구락 지역은 교지군, 구능군 2개 군으로 갈라졌고 그 아래에는 여러 현이 생겼다. 각 현은 낙장, 낙후의 통치를 받게 하였는데 이는 훗날 영국이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을 친영주의 괴뢰정부로 통제했던 것과 유사하다[14].

교주[편집 | 원본 편집]

기원전 111년, 한무제가 남월을 멸망시킨 후 9군을 설치한 데에서 출발한다. 기원전 106년 기존의 9군 중 7군에 속해있던 영지에 교지주를 두고 다른 8군을 총괄하게 했다.

남쪽의 왕조들[편집 | 원본 편집]

임읍[편집 | 원본 편집]

프놈[편집 | 원본 편집]

인도인들이 현지 말레이계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세운 나라. 오늘날 알려진 크마에 제국이다. 서기 1세기에서 7세기 초까지 존재했다. 베트남과 동아시아에 대승불교가 전해진 원인에 이 프놈의 역할이 컸다.

독립전제왕권시대[편집 | 원본 편집]

안남[편집 | 원본 편집]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독립된 전제왕조. 다만 중국 지배시기 정립된 질서를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창립자인 오권의 사망 이후 내란으로 멸망했다.

대구월[편집 | 원본 편집]

대월[편집 | 원본 편집]

대우[편집 | 원본 편집]

베트남판 신나라. 베트남판 왕망인 호계리의 무리한 개혁정책으로 인해 명나라에게 멸망당했다.

4차 중국북속기[편집 | 원본 편집]

두 번째 독립전제왕조시대[편집 | 원본 편집]

대월[편집 | 원본 편집]

월남[편집 | 원본 편집]

프랑스령 베트남[편집 | 원본 편집]

프랑스는 전쟁을 벌여 청나라를 쫓아내버리고는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전체를 식민지로 삼았다. 프랑스는 베트남인들을 심하게 착취했고, 수차례 무장독립 시도가 있었지만 전부 실패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게 됐다. 4년 뒤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프랑스 본토가 해방되자 일본은 인도차이나에서 허수아비로 남아있던 프랑스군들을 쫓아내고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으나 일본이 얼마 안가 항복하면서 베트남 제국도 단명했다. 이후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됐으나, 베트남을 점령했던 중화민국과 영국이 각자 사정으로 철수하자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지배하게 됐고 베트남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현대[편집 | 원본 편집]

베트남 독립 전쟁으로 프랑스로부터 독립되고,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다시 분단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다. 미군 철수로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남베트남이 망하면서 보트피플이 생겼다.


각주

  1. 안남산맥 이북지방.
  2. 막씨왕조가 지배한 잠시 동안은 대우라고 불리웠다.
  3. 다만 다른 베트남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에는 기원전 2852년에 건국되었다고 소개한다.
  4. 이를 낙월 부락이라고 한다.
  5. 일종의 음서체제로 보면 된다
  6. 오늘날 발견되는 당시의 무덤을 출토한 결과 계급에 따라 무덤 부속품들이 차이를 보였다.
  7. 말이 옷이지 오늘날 일본의 훈도시와 같다고 보면 된다.
  8. 위의 동산 문화에 나온 동고가 도공기술의 산물이다.
  9. 그만큼 비옥한 곳에 영토를 잡았다는 이야기이다
  10. 오늘날 양자강 이남의 땅 대부분을 가리킴. 실제로 양자강 이남이 개발되기 시작한 건 후한 말엽의 일이다.
  11. 환관 조고가 2대 황제 호혜를 농락한 건.
  12. 실제로 조타는 유방의 사신 육가를 맞을 때 가부좌를 튼 상태로 앉았고 육가가 이를 지적하자 '자신이 한고조와 다를게 무었이냐'고 물었다.
  13. 오늘날의 창사. 삼국지에 나오는 손견의 근거지가 맞다.
  14. 현지인에 의한 현지인의 통치체제로, 이는 현지인들의 저항의식을 희석시키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