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일손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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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百祖一孫之墓
이곳은 1950년대 모슬포 경찰서 관내(현재 한림읍, 대정읍, 한경면, 안덕면에 거주하던 순박한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청년 단체장, 학생 등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 경의 자의적 판단에 근거하여 구금되었던 양민이 사법적 절차 없이 정부군에 의하여 무참히 학살당한 일백서른두위의 원혼이 영면 하신 곳입니다
— 백조일손지묘의 안내판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586-1번지에 자리한 공동묘지로 1950년 6월 25일 예비검속으로 검거되어 대정과 한림 일대에서 끌려온 민간인들이 섯알오름 남쪽 기슭에서 무고하게 학살당한 뒤 묻힌 장소이다. 본래의 명칭은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였으나 후대에 다시 세운 위령비에 백조일손지묘로 기록되면서 이 표기대료 표기하였다.

이 묘지는 1948년에 있었던 제주 4.3 사건의 상처가 채 가지기도 전에 제주도에 불어닥친 또 하나의 비극의 흔적이라 할 수 있으며, 정확히는 4.3 당시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로 낙인찍었던 정부와 국군이 저지른 4.3 사건의 연장선에 놓여있는 전쟁범죄라 할 수 있다.

비극의 전말[편집 | 원본 편집]

다음의 내용은 백조일손지묘 현장 안내판의 내용을 기초로 한다.

예비검속[편집 | 원본 편집]

1950년 6월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하자 내무부 치안국에서는 당일 14:00시 요시찰인 전원을 구금할 것을 전국 경찰서에 지시함에 따라 제주도 전역에서는 1,200여명을 예비검속 하였는데 그 중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는 347명을 검속, 모슬포 절간 고구마 창고와 한림 어협창고, 각 지서 등에 분산 구금하였음.

반인륜적 양민학살[편집 | 원본 편집]

남침한 북한 공산군이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수도를 대전을 거쳐 대구로 그리고, 8월18일에는 부산으로 퇴각하는 와중에 육군본부 정보국 제4과(CIC) 김창룡(당시 대령)과장의 지시에 의하여 경찰이 분류한 C,D급 예비검속자를 처형하기 시작하였는데 모슬포 경찰서 관내 347명중 60명은 1950년 7월 16일 군에 인계되어 집단 학살 되었으며(장소미상) 동년 8월20일(음력 7월7일) 새벽 2시에 63명(한림 어협창고 및 각지서 구금자) 새벽 5시경 132명(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 구금자)을 계엄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모슬포 주둔 해병대 제3대대(대대장 김윤근 소령) 장병에 의해 송악산 인근 섯알오름에 자리한 파괴된 일본군 탄약고에서 집단학살함. 한편, 제주경찰서 관내와 서귀포경찰서 관내에 구금된 민간인들은 처형된 일시와 장소도 정확히 모른체 불귀의 원혼이 되었다.[1]

천인공노할 시체의 암매장[편집 | 원본 편집]

계엄당국은 반인륜적 학살행위를 은폐하기 위하여 유족의 시체인도를 무자비하게 거부하여 비명과 절규의 외마디가 가시지 않은 선혈이 낭자한 시체위에 미리 준비된 돌덩이로 짓눌러 암매장하고 그 일대를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으로 설정, 무장군인에 의하여 경비를 강화 하였음.

시신수습과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안장[편집 | 원본 편집]

유족들의 시신 인도를 완강히 거부하던 군 당국은 부대확장 공사도중 유해가 표출되자 유족들의 요청에 의하여 시신수습이 허용되자 유족들은 1956년 5월 18일(음력4월9일) 6년 가까이 흙탕물속에 묻혀 억눌리고 뒤엉킨 시신의 인양을 위하여 좌용진씨가 제공한 양수기로 물을 뽑아내고 유골을 발굴하였으나 자타의 구분은 커녕 작은 뼈는 거의 흔적이 없었으므로 132개의 칠성판위에 머리하나에 등뼈, 팔, 다리뼈들을 적당히 맞추어 132구로 구성하고 유족의 지성으로 마련한 현 묘역(483평)에 안장하여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 之地)라 명명하였다. 이 뜻은 조상이 다른 일백서른두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한 자손이라는 뜻으로 제안은 현재는 고인이 되신 이치훈, 이성철씨가 한 것이다.

묘비건립과 탄원서 제출[편집 | 원본 편집]

유족들의 정성을 모아 1959년 5월 8일(음력 4월1일) 백조일손 묘역에 묘비를 건립하였으며 1960년 4.19 혁명 직후 허정 과도정부와 제35회 임시국회에서 "양민학살 진상조사에 관한 결의안"이 가결된 후 민, 참의원 의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장면 민주정부에서 양민학살조사가 진행되던 도중 1961년 5.16 쿠데타의 발발로 진상조사가 중단되고 유족들안 긴 세월 동안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군사정권에 의한 묘비의 파괴와 강제이장[편집 | 원본 편집]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6.25 당시 군경이 자행한 반인륜적 만행의 흔적을 없애도록 경찰에 지시 하였으며 이에 따라 1961년 6월15일 서귀포 경찰서장의 지휘로 모슬포 지서 급사로 하여금 묘비를 파괴하는 한편 집단 조성된 백조일손묘역을 해체하도록 유족들을 강압하였다. 이에 선량한 유족들은 제2의 잔인한 피해를 의식하여 23위는 야밤을 이용하여 타지로 이장하였다가 전 유족의 안위와 자손만대의 화합을 추구하며 2002년 4월5일 41년만에 7위를 본 묘역으로 재이장하게 되었다.

위령비 건립과 민관합동위령제 봉행[편집 | 원본 편집]

"맺힌 한은 풀어야 한다"는 문민정부의 뜻에 따라 제주 4.3 사건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에서는 박정희 군사정권 당시 파괴된 묘비의 재건립을 비롯한 위령사업의 필요성을 공론화 하였으며, 이에 제주도청과 제주도의회는 모험적인 의지로 이념적 갈등을 극복하여 의기투합함으로써 공감대가 형성, 유족회가 주관하고 제주도의 후원으로 1993년 8월 24일 위령비가 다시 세워지게 되었고 민관 합동으로 제1회 백조일손 영령 위령제가 엄수됨으로 역사의 비극의 골을 넘어서는 단초가 되었다.

이후 2000년 9월 21일부터 2001년 2월 20일까지 희생자 유해를 추가로 발굴하여 부분잔해 34점과 치아 3개를 수습하여 이 곳에 봉안하였으며 2002년 7월 7일 민예총 제주지회와 충북지회 회원 80여명이 진혼굿을 베풀고 49제의 뜻을 담아 토우 49개를 묻었다.

관련 연표[편집 | 원본 편집]

1949년[편집 | 원본 편집]

  • 1월 19일 : 제주도 선무공작대 활동 개시 (제 2연대장 행정고문 이기영을 대장으로 120명 정도로 구성)
  • 3월 2일 : 총사령부에서 제주도 전투지구사령부 설치(사령관 유재홍 대령, 참모장 제 2연대장 함병선 중령)
  • 5월 10일 : 재선거 실시(제주도 북군 갑구 홍순령, 을구 양병직 당선)
  • 5월 15일 : 전투지구 사령부 해산
  • 6월 5일 : 국민보도연맹 결성. 좌익계 각 정당 사회단체에서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 가입은 반 강제적이었던 것 같이 보이며 1950년 초에는 가입 맹원수가 30만 명에 이르렀다 함
  • 6월 29일 김구 피살
  • 7월 5일 : 지방자치법 공포
  • 8월 13일 : 제 2연대 독립 1대대(대대장 김용주 소령)에 제주도 경비를 인계하고 인천으로 이동
  • 9월 : 제주도 방위군,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여 군사훈련 실시
  • 10월 12일 : 계엄령 해제

1950년[편집 | 원본 편집]

  • 4월 1일 : 청년방위대 발족(단장 강성건)
  • 5월 30일 : 제 2대 민의원 총선거(당선자 북군 갑구 김인선, 을구 강창용, 남군 강경옥)
  • 6월 25일 : 6.25 전쟁 발발, 예비검속 시작
  • 7월 8일 :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 7월 16일 : 제주, 성산, 한림항으로 1만여 피난민 쇄도. 현 제주주정공장 자리에서 육군 제 5훈련소 창설(소장 김병휘 대령)
  • 7월 20일 : 공산군 대전 점령
  • 8월 1일 : 제주도 유지 12명 모함사건 발생
  • 8월 11일 : 비상향토방위령 선포. 동세칙에 의해 남녀노소 할 것없이 전체 도민을 강제동원하고 재산을 군사상 필요에 의해 징발해 감
  • 8월 18일 : 정부 부산으로 이전
  • 8월 20일 : 섯알오름의 대학살(음력 7월 7일) 및 군경의 학살자 암매장
  • 8월 27일 : 제주도내 청년 다수 해병대 3기생으로 지원 출정
  • 9월 15일 : 인천상륙작전 개시
  • 9월 28일 : 서울 수복
  • 10월 10일 : 제주도에 한하여 비상계엄령 해제
  • 10월 27일 : 정부 서울로 환도

1956년[편집 | 원본 편집]

  • 3월 30일 : 섯알오름에서의 1차 시신 수습, 만벵디 공동묘지에 60위 안치
  • 4월 28일 : 백조일손유족의 시신발굴 시도, 군경의 방해로 실패
  • 5월 18일 : 섯알오름에서의 시신 발굴, 여기서 수습된 유해를 상모리에 안장하고 백조일손지지라 이름붙임

1959년[편집 | 원본 편집]

  • 5월 8일 : 백조일손 유족들의 위령비 건설

1960년[편집 | 원본 편집]

  • 4월 19일 : 4.19 혁명
  • 5월 31일 : 국회, 양민학살조사특별위원회 구성

1961년[편집 | 원본 편집]

  • 5월 16일 : 5.16 쿠데타, 이후 양민학살조사위원회의 활동이 중단됨
  • 6월 15일 : 군사정권의 명령을 받은 서귀포경찰서장의 지휘로 유족들이 세운 위령비가 파괴됨

1993년[편집 | 원본 편집]

  • 8월 24일 : 위령비가 다시 세워지고 민관 합동으로 백조일손위령제 엄수

2000년 이후[편집 | 원본 편집]

  • 2000년 9월 21일 : 섯알오름의 학살터에서 유해 재발굴 시작
  • 2001년 2월 20일 : 재발굴 과정에서 수습된 유해 일부를 백조일손지묘에 봉안
  • 2002년 4월 5일 : 군사정권의 압력으로 묘를 이장했던 유족이 백조일손지묘로 재이장
  • 2002년 7월 7일 : 진혼굿 및 토우 49위 봉안

희생자 현황[편집 | 원본 편집]

당시 섯알오름 학살 현장에서 학살당한 희생자의 수는 다음과 같다.

상모리 7명, 하모리 8명, 동일리 2명, 일과리 5명, 영락리 6명, 신평리 1명, 보성리 3명, 인성리 4명, 신도리 3명, 가파리 2명, 화북동 1명, 토평동 1명, 서호동 1명, 호근동 1명, 강정동 1명, 하예동 1명, 한림리 2명, 귀덕리 11명, 협재리 2명, 어음리 2명, 금등리 2명, 판포리 1명, 용당리 3명, 조수리 2명, 낙천리 6명, 저지리 5명, 청수리 8명, 고산리 12명, 용수리 12명, 신창리 1명, 산양리 1명, 사계리 4명, 덕수리 2명, 창천리 3명, 감산리 3명, 서광리 2명, 동광리 1명.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당시 대정지역의 들개들이 섯알오름 일대를 많이 돌아다녔다고 하며 난데없이 미친개가 많아졌덨다고 하는 증언이 있다.
  • 1993년 위령비 건립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옛 비석의 파편을 유리함에 넣고 위령비 옆에 보존하여 탐방객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각주

  1. 제주4.3평화재단측에서 발간한 자료에서는 이쪽 예비검속자들은 제주항 앞바다 해상 및 사라봉 앞바다에서 집단총살 혹은 산채로 수장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