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백석(白石, 1912년 7월 1일~1996년 1월)은 일제 강점기 대한제국북한시인으로,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다. 본명은 백기행(白蘷行) 또는 기연(基衍)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유년기[편집 | 원본 편집]

백석은 정주군 길산면 익성동 1013번지에서 부친 백시박(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석이 태어난 익성동은 흔히 여우난골이라고 불렀다.[1]

아오야마 학원 유학 시절의 백석

학창 시절[편집 | 원본 편집]

백석은 1918년 평북 정주의 오산소학교에 입학했지만 당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뒤 1924년 고당 조만식이 교장이던 오산고보에 입학하고 1929년 3월 오산고보를 졸업했다. 백석은 당시 집안 형편 때문에 남들 다 가는 유학을 갈 수 없었는데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그가 쓴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어 도쿄로 유학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후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한다.[2] 이후 1934년 교사자격증을 얻고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에 입사한다. 이때가 23세!

시인으로[편집 | 원본 편집]

이후 1935년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소설가에서 시인으로 변화했고, 1936년 1월 26일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하며 큰 인기를 끌게 된다. 4월에 조선일보를 관두고 함흥의 영생고보의 영어교사가 된다.

백석의 연인[편집 | 원본 편집]

그때부턴 잘생긴 외모와 천재적인 문학성 때문인지 몰라도 여자들은 확실히 많이 꼬였는데 대표적으로 란, 자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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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의 본명은 박경련으로 백석과의 첫 만남은 백석의 친구 허준의 결혼축하 자리에서 백석의 친구 신현중의 누나의 제자(...)로 우연히 만난 것을 시작으로 그가 살던 통영에 시를 쓰기 위해 통영에 갔다고 쓰고 박경련 만나러 간다고 읽는다으나 세 번씩이나 박경련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란은 신현중과 결혼을 하게 된다. NTR

자야[편집 | 원본 편집]

자야의 본명은 김영한(1916~1999)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이 사기를 당하고 16살에 기생으로 팔려갔는데 그 당시 기명(妓名)은 진향(眞香)으로 1935년 함흥에서 백석을 만나 교제하기 시작한다. 이후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온 《당시선집》이라는 책에 적힌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따온 자야라는 별명으로 진향을 부르게 된다.

자야와의 동거[편집 | 원본 편집]

이후 백석은 자야에게 같이 만주에 가서 살자고 했으나 자야는 갈등하다가 이를 거절하고 함흥에서 경성으로 내려갔다. 백석은 이후 1938년 영생교보 축구부 학생들을 데리고 '조선축구학생연맹전'에 참가하기 위해 경성으로 내려오는데 이 과정에서 백석은 축구부는 대충 여관에다 내팽겨치고 자야의 집에 동거를 한다, 축구부 학생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학생들은 시내 막 돌아다니다 풍기위원에 붙잡혀서 결국 백석은 학생들 관리 제대로 못했다는 책임으로 영생여고보로 전근시키자 백석은 사표 쓰고 영생고보를 나오고 경성으로 올라가 자야랑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지은 시가 바로 그 유명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그러나 백석 부모님의 반대로 자야와의 혼인은 이뤄질 수 없었고 1939년 홀로 만주로 떠나게 된다.

길상사[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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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땅으로[편집 | 원본 편집]

조선에서 일본 제국내선일체 사상이 강조되고 많은 문학가들이 친일파로 변절하면서 백석은 이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시인으로서 문학적 상상력을 보충하기 위해 만주로 떠난다. 당시 만주에는 일제에 의해 세워진 괴뢰국인 만주국이 있었다. 1940년 2월 초,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으로 간 백석은 3월에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일하게 되지만 만주에서도 창씨개명의 압박이 행해지자 9월까지만 근무하고 때려치우게 된다. 이후에 농사를 지으려 만주국의 신징부근의 땅을 빌려 농사를 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안동세관에서 근무하면서 그는 문경옥이라는 여성과 결혼하게 되지만 얼마 못가 이혼하게 된다.

해방 이후[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광복이 되자 백석은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귀국한다. 그는 스승이었던 조만식 밑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정권에 밉보였고 이 과정에서 그는 시를 창작하는 것보다도 러시아 문학작품을 번역하고 1957년 조선문학에 《집게네 네 형제》를 출간하며 아동문학 집필에 힘쓰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북한에서 숙청되어(붉은 편지 사건) 량강도 삼수군 관평리 협동농장에서 양을 치는 일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다시 시를 쓰다가 1960년대 절필하고 1995년 1월 사망한다.

작품 목록[편집 | 원본 편집]

  • 고향(故鄕)
  • 국수
  • 그 모(母)와 아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여우난곬족
  • 적막강산
  • 집게네 네 형제
  • 흰 바람벽이 있어

각주

  1. 백석 시 중 “여우난곬족”이 여기서 유래됐다. 참고로 이 마을은 백석의 본관인 수원 백씨 집성촌이었다고.
  2. 그때 당시 백석은 학교 교회에 출석하며 선교사들과 꾸준히 접속해 영어실력을 키웠다고 한다. 그가 3학년 때 살던 곳 주소는 도쿄 기치조치(吉祥寺) 1895번지였다고 하는데 후술할 길상사하고 큰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