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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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東奭.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9년 3월 22일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에서 김해장로교회 창립자 배성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대구계성중학교에 재학하던 중 일제에 대한 항의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대구계성중학교를 중퇴한 뒤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해 3년간 공부해 무사히 졸업했다. 이후 목포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배일의식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킨 혐의로 체포되어 몇달간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 만주로 망명해 김좌진과 함께 활동했다.

1918년경 귀국한 배동석은 경성연합의전(京城聯合醫專)에 입학해 의학을 전공했다. 그러던 1919년 2월 12일, 이갑성의 초대를 받고 이갑성의 자택을 방문한 그는 그곳에서 김원벽(金元璧), 김형기(金炯璣), 윤자영(尹滋瑛), 김문진(金文珍), 한위건(韓偉健) 등 학생 대표들과 만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논의한 뒤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는 방안을 논의했다. 2월 14일에 다시 이갑성의 자택에서 이들과 논의한 그는 2월 26일일 마산으로 가서 경상남도의 민족대표 선출에 관여했다.

1919년 3월 1일, 배동석은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수천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했고, 3월 5일에 남대문역 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3월 9일 함안군 칠북면으로 내려와서 장인인 김세민 함안 이령교회 장로와 만나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하여 칠북면 연개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게 하였다. 이후 김해로 내려와 3월 30일 김해 동상동 전통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었다. 이 시위는 4월 5일 진영시장, 4월 11일 명지면, 4월 12일 장유 무계장터 시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4월 2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11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해 공소했지만 1920년 4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2] 그는 그곳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고 결핵까지 걸렸다.

배동석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부친을 두었지만, 정작 본인은 개신교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경성 연동경신중학교에 입학한 뒤 이명헌과 원세성의 간증을 듣고 오히려 “동양선교회는 국가와 사회를 해롭게 하고 사람을 미신으로 인도하니 폭발탄을 던져 파멸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서도 “교회는 미신적이요 비과학적이다. 과학 이상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영혼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면 영혼도 없고 하나님도 물론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다 형무소에 수감된 뒤 폐결핵을 선고받고 올리버 R. 에이비슨 세브란스병원장의 병보석 요청이 수락되면서 간신히 풀려난 그는 병원에 입원한 뒤 비통함을 느낀 나머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살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던 중 같은 병실을 사용하고 있던 성결인 이정설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모교다리 예배당에서 오전예배를 드리고 오후 성별회에서 성결이라는 설교를 듣고, 경성성서학원 40일 기도회에 참석해 신학을 공부했다. 그 결과 진정한 개신교도로 거듭난 그는 한국 최초의 결핵병동인 세브란스병원 결핵병사를 세웠지만,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24년 8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배동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4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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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