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출생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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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출생주의(反出生主義, Antinatalism 또는 anti-natalism)는 인간의 출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철학적 입장이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은 좋고, 죽음은 더 좋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 하인리히 하이네[1]
내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알아 버렸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혼, 가족, 더 나아가 모든 사회 규범에 대한 내 두려움은 거기서 온다. 자기 자신의 결함을 자식에게 전달하는 것, 그래서 자신이 겪었던 시련을, 어쩌면 더 지독한 시련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은 범죄 행위다. 내 불행과 내 고통을 이어받을 사람을 낳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부모들이란 모두 무책임한 자들이거나 살인자들이다.
— 에밀 시오랑

선한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그렇게나 노력하면서, 아이들의 모든 고통을 예방하는 확실하면서도 유일한 방법이, 그 아이들을 애초에 태어나지 않게끔 하는 것이란 사실까지는 대부분 깨닫지 못한다. 그런 이들이 그토록 적다는 점은 매우 유별난 일이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은 그 아이들의 부모가 될 뻔한 이들의 이익에 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위해서는 최선의 결정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존재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치열한 고통을 경험할 필요도 없이,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영원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 데이비드 베너타

반출생주의자는 인간이 아이를 만듦으로써 탄생되는 존재에게 그와 미리 합의[2]되지 않은 고통 가능성을 강제하고, 이는 도의적으로 옳지 않기에 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출생주의는 생물의 본능인 에 대한 애착과 번식 욕구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상이기에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아무래도 지배층·기득권 입장에서는 피지배 집단의 인구 증가를 원하기 때문에 출산을 장려하는 경향이 있다.[3] 근대까지만 해도 안락사를 포함한 자살·독신[4]·무자녀 부부·동성애 등 출산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은 악랄하게 탄압당했고, 현재도 지역에 따라 탄압당하고 있다. 그리고 탄압까진 아닌 지역도 이러한 개인의 선택권을 무시하려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번식하는 게 자연의 섭리이며 따라서 도덕적으로 옳다는 식의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범하는 경우도 많다.

세상은 온갖 종류의 고통·불행·악이 상존하는 곳이고, 고아나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받는 아이들도 많다. 또한 인구도 과밀하여 인간이 충분히 귀하게 여겨지지 못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끊임 없이, 동의 없이 부모에 의해 이 세상에 강제로 던져진다(하이데거의 '피투성被投性').[5] 물론 누군가는 충분히 배가 불러서 세상에는 쾌락행복을 포함해서 좋은 것도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것들이 개인의 고통과 불행이라는 부조리를 상쇄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는 상존할 수밖에 없다.[6]

인간과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기성 가치의 권위를 부인한다는 점에서 염세주의·허무주의[7]와도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 이런 사상들이 자연과학무신론적 사고를 포함해서 인간의 이성이 급격하게 발전하던 근대부터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창조주(조물주)라는 개념이 사실상 궁극의 부모[8]와 같다는 점에서, 신무신론·반신론·반종교주의와 통하는 면도 있다.

현대코펜하겐 해석 이후에도 여전히 거시계는 결정적이다. 인간은 뇌손상·뇌수술·호르몬 등으로 인해 성격이 바뀔 수 있다.[9] 기억은 저장하는 과정에서 변질되거나, 그냥 시간이 지나기만 해도 변질된다. 최면이나 반복적인 상담만으로도 오기억을 심을 수 있다. 심지어 뇌에 가해진 특정 자극을 의식하지 못할 경우 그 자극으로 인한 반응을 자신의 의지로 행동한 것이라고 오해한다.[10] 따라서 ·사후세계·영혼·자유의지 등은 존재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으나 존재 가정이 무요하다.[11] 즉 과학적인 관점에서는 반출생주의를 배격하는 출생 편향적 신앙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이 부분 또한 종교·신비주의적 사고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출생주의 사상에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실 종교·신비주의적 입장이라고 모두 반출생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영지주의나 이에 영향을 받은 여러 교파는 임신 및 출산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정치 기득권과 이해가 일치한 종교 기득권에 의해 이단, 사이비로 몰려 잔혹하게 탄압돼왔다.

인도 종교[12]윤회 사상도 반출생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고통의 유전적 재생산을 은유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불교·자이나교 등은 세상을 고통으로 가득찬 곳으로, 인간을 윤회의 고통에 시달리는 존재로 인식하는데, 이는 반출생주의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마찬가지 관점에서, 해탈열반 개념 또한 깨달음을 통해 번식 욕구라는 번뇌를 극복하고 되풀이되는 삶과 고통의 굴레를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13]

현대의 인구과잉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인권 문제,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 문제, 인간의 영리를 위해 잔인하게 희생당하는 가축과 실험동물 문제 등 동물 윤리•생명 윤리•환경 윤리와도 관련이 있다.

반출생주의적 담론에 대해 혼자 자살하면 되지 않냐는 조롱이 곧잘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무섭고 싫은,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을 구태여 후손에게 강요하지 말자는 반출생주의의 취지를 망각한 논점 일탈이자 본능적 거부감 표출에 불과하다. 살 만큼 살았다는 노인도 막상 죽음이 임박하면 두렵고, 자는 중에 의식하지 못한 채 안락하게 죽길 바라는 법이다. 하물며 끔찍한 고통 때문에 차라리 죽여달라는 불치병 환자도 안락사를 바랄지언정 자살은 쉬이 하지 못한다. 이렇듯 자살은 이미 태어난 이상 고도로 진화한 생존 본능 때문에 실행이 어렵고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울 뿐더러, 사회 역시 자살을 억제하기 위해 편안한 실행 방법을 최대한 차단하고 불편과 고통으로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듯 후손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을 강요하면서 억울한 개인이 자살하면 그만이라는 것은, 결국 자살하는 피해자를 계속 양산하는 부도덕을 옹호하는 것과 같다. 그 외에도 자살자 주변인이 겪을 수 있는 정신적 고통 문제 등이 있다.

역어에 대해[편집 | 원본 편집]

우리가 원해서 출생한 게 아니니 '반출주의' 대신 '반출주의'가 낫다는 의견이 있다. 이런 의견의 배경에는 페미니즘에 반감을 지닌 입장에서 출산 부담을 여성에게만 지운다며 저출을 저출으로 바꿔 부르자페미니스트들의 주장으로 인해, 반출생주의라는 단어 역시 정치적인 조어로 보여 생기는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저출생이라는 단어의 적절성 문제를 떠나서 반출생주의도 위와 같은 경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출생주의'란 단어는 국적과 관련한 동음이의어로도 존재한다.

서양에서 구체화된 반출생주의를 한국보다 먼저 수입한 일본에서는 반출생주의로 거의 굳어진 상태다. 따라서 서양 학문을 번역할 때 일본을 참고하는 경향이 있는 한국 역시 저대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

'안티 나탈리즘'으로 음역한 경우도 많이 보인다. 단 실제 영어 발음은 '앤티-내이털리즘' 또는 '앤타이내이틀리즘'에 가깝다.

'인구 억제주의'로 의역한 기사도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는 '신맬서스주의(Neo-Malthusianism)'와 혼동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기독교와의 관계[편집 | 원본 편집]

기독교 주류는 반출생주의(Antinatalism)가 배격하는 출생주의(Natalism)를 지지한다. 이 때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일렀다는 구절을 그 근거로 든다.[14] 어차피 정치 기득권이나 종교 기득권이나 부양받을 피지배 계층 인구가 많을 수록 좋은 게 보통이고 이런 면에서는 서로 일치하는 편이다. 따라서 출생주의는 지배층과 종교가 유착[15]하여 상부상조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반출생주의는 기독교와 상극에 가깝다.

기독교는 멋대로 자신이 그렇게 창조해놓고 무고한 아이와 동물까지 홍수로 몰살시킨 창조주를 절대선으로 숭앙하는 종교이다. 그리고 인류가 의 존재로 인해 고통받는 이유를 자유의지 탓으로 돌리는데, 아담하와가 창조주에 의해 강제로 주입당한 자유의지로 인해 창조주의 맘에 안 드는 일을 하고 에덴에서 추방당했다는 이유로 인류 전체에게 연좌제원죄를 적용,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대속' 신앙을 요구한다.[16]

이 때 불신자는 죽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데, 자녀가 불신자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만약 기독교인 부모가 그 자녀를 신실한 신자로 키우지 못하고 천국에 보내는데 실패한다면, 이 부모는 설령 고의가 아니더라도 그 어떤 악질의 아동 방임·학대·살해 부모가 자녀에게 가한 고통보다 더 끔찍한 지옥의 고통을 자녀에게 선사한 죄인이 되고 만다. 이런 끔찍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일단 낳고 본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책임하다고 볼 수 있으며, 아예 낳지 않는다면 적어도 불신자인 자식은 생기지 않으며 최소한 이런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신학계에서는 연옥 같은 개념을 지어내 물타기를 시도하거나 견강부회식 성경 해석으로 나름의 합리화를 시도하지만, 평신도 중 이런 부분에 대해 충분히 고민한 후 낳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비자발적 불신자의 처우 문제[17] 등은 지옥에 대해 회의하게 만든다. 여호와의 증인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지옥의 이미지가 하느님의 공의에 어긋나며 성경 내용과 상이하다는 이유로 이를 부정한다.

자녀를 낳고 싶고 그럴 여력이 있다면 그만큼 입양을 하면 된다. 모세·예수·에스더는 사실상 입양아였고, 로마서·에베소서 등에서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에 기독교에서는 입양 역시 장려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혈연에 집착하는 기독교인이 많다.

의외로 성경에는 반출생주의를 대변하는 듯한 구절이 곳곳에 존재한다. 솔로몬 왕의 저작이라는 전승이 있는 전도서에는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복되고 태어나지 않은 자는 더더욱 복되다는 실레노스의 지혜와 유사한 구절이 있다. 그 외에도 욥기, 예레미야 등에 생일을 저주하며 차라리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 죽는 게 좋았다는 구절이 존재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가룟 유다에게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거라고 말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독신을 긍정적으로 말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생일을 이교적·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성경 구절들을 근거로 생일을 기념하지 않는다.

사실 기독교(가톨릭·개신교·정교회 등)가 인구 면에서 대표적일 뿐, 유대교·이슬람교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자체가 (현대에) 출생주의적인 면이 타 종교에 비해 강한 편이다.

페미니즘과의 관계[편집 | 원본 편집]

페미니즘은 분파가 여럿인만큼 사상에 따라 공통분모를 보이기도, 반목하기도 한다.

낙태 찬성파, 비출산 옹호 계열 페미니즘과는 '여성은 재생산 도구가 아니다'라는 점을 함께 긍정하지만 '출산은 여성의 권리이며 생명을 낳는 어머니는 위대하다'라고 주장하는 페미니즘과는 마찰을 빚고 있다.

여성의 권리가 향상되고 교육을 받는 국가일수록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조혼을 하고 출산을 하는 비율에 매우 적어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페미니즘에 관해서는 중립, 긍정적인 관점을 보인다.

채식주의와의 관계[편집 | 원본 편집]

동물의 고통에도 관심을 보이는 반출생주의자 중에서는 채식주의를 겸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반출생주의 서브레딧에서도 채식주의자 여부 투표 결과를 보면 타 서브레딧에 비해 채식주의자 비율이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향후 육식을 해 동물에게 고통을 주거나 채식주의 강요로 본인이 고통받을 가능성이 있는 자식을 낳는 부모 채식주의자에겐 반감을 보인다.

입양에 대한 시선[편집 | 원본 편집]

압도적으로 긍정적이며, 많은 반출생주의자들이 입양을 했거나 고려한다. 이 때문에 자식을 아예 두지 않는 childfree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인간 뿐 아니라 동물들도 비인륜적인 재생산을 하는 펫샵이 아닌 보호소에서 안락사를 기다리는 버림받은 개체들을 입양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동물에도 반출생주의를 적용하는 경우, 펫샵을 전부 폐쇄하고 남은 동물들은 중성화 후 인간이 죽을 때까지 보살피고 더 이상의 재생산은 중단하자는 의견도 있다.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는다면 편의에 의한 중성화, 성대수술, 유기동물 등 인간이 저지른 온갖 만행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편집 | 원본 편집]

  • 결혼에 관해서는 중립적인 시선이다. 사랑하는 두 성인이 합의 하에 결정하는 것이므로, 동의를 구할 수 없는 출산과는 다르게 여긴다.
  • 동성애에 관해서도 중립적이거나 오히려 호의적이다. 일반적으로 동성 커플은 출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인류의 발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낙관주의에 회의적이다. 발전한 사회는 이전 사회의 상위호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베너타의 논리[편집 | 원본 편집]

위 사상은 본디 명확한 구심점 없이 파편화된 상태에 가까웠으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대학교 철학 교수로 재직 중인 데이비드 베너타에 이르러 본격적인 논증이 이뤄졌다. 베너타는 누군가를 존재시키는 행위는 결코 그 존재를 위한 행위일 수 없으며, 항상 해악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18]에 따르면,

  • 고통은 나쁘다.
  • 쾌락은 좋다.
  • 고통의 부재는 좋다. 그 좋음을 향유할 존재가 애초에 없더라도.
  •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 그 부재가 쾌락을 빼앗긴 상황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그리고 쾌락을 얻을 존재가 애초에 없다면 빼앗길 일도 없다.
  • 행복한 사람을 또 만들어야 할 도덕적 의무는 없지만, 불행한 사람을 또 만들지 말아야 할 도덕적 의무는 있다.
  • 아이를 만들기로 한 이유로 아이를 가질 때의 이익을 드는 것은 이상하지만, 아이를 만들지 않기로 한 이유로 아이를 가지지 않을 때의 이익을 드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 우리는 우리의 결정 때문에 태어난 누군가가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인해 그 결정을 후회할 수 있지만, 우리의 결정 때문에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가 쾌락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그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 우리는 누가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에 슬퍼하지만, 누가 태어나지 않아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슬퍼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위 논리에 거부감을 느끼고 삶의 질에 대해 비이성적인 평가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낙천주의 편향: 우리는 우리의 과거[19], 현재, 미래를 긍정적으로 왜곡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
  • 적응: 우리는 주변 상황에 적응을 해서, 상황이 더 나빠지면 행복의 기준을 그에 맞춰 낮춘다.
  • 비교: 우리는 주변의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우리 삶을 판단하며, 대부분 자신의 상황보다 더 나쁜 상황과 비교해서 자신의 행복의 가치를 과대평가한다.

베너타의 반출생주의 논증은 '비동일성 문제(미래 개인의 역설)'[20]의 유력한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2018년 법학적성시험(LEET) 언어이해 제시문으로 위 베나타의 논증이 출제되었다.

생명 윤리, 환경 윤리 문제[편집 | 원본 편집]

David Benatar, Gunter Bleibohm, Gerald Harrison, Julia Tanner 등의 반출생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의 생명체들에 대해서도 도의적인 관심을 기울이길 촉구한다. 이들은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서 인간 만큼 파괴적이고 해로운 생명체는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을 제외한 수십억의 동물은 매년 육식성 식자재 생산을 비롯하여 각종 실험에 이용당한 후 아무렇게나 폐기된다. 또한 서식지 파괴를 비롯하여 벌어지는 각종 환경 파괴 등으로 인해 무수한 종의 생명체가 학대•학살당하며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것은 오로지 인류라는 종의 가학적인 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행해진다.

이렇듯 인류 문명이 만들어낸 부조리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그렇기에 위 반출생주의자들은 그저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 다른 종에 해를 끼치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동물권 사회운동가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동물 권익과 환경 보존을 위한 가장 확실한 해결책으로 인위적인 인구 억제가 거론되는데, 이는 반출생주의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인간이 더 적어지거나 혹은 완전히 없어질 수 있다면, 그들에 의해서 다른 지각 있는 생명체가 겪게 되는 피해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아이를 한 명 덜 낳는 것은 환경을 고려하는 다른 활동보다 20배 가량의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있다.[21]

반대 의견[편집 | 원본 편집]

피터 싱어와 같은 공리주의 철학자는 '인간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반출생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인간은 수많은 백신과 기계를 만들어냈고 투쟁을 통해 인권을 신장 시켰으며, 달에 가는 것을 넘어서서 화성에 테라포밍을 할 계획을 넘볼 정도로 발전 중이라는 게 근거다. 현대에도 난민, 동물 학대, 질병, 환경 파괴와 같은 부정적인 면이 많지만 인간은 그걸 극복할 힘이 있다고 믿는다. 반출생주의대로 모든 인간이 번식을 멈추면 110여년 이내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인간이 환경을 딛고 더 나은 존재로 발전한 가능성은 완전히 차단되고 만다.

다만 그와 동시에 피터 싱어는 반출생주의를 인구 억제를 위한 효용적 수단으로 인정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수혜 없이 의무만이 있는 사상[편집 | 원본 편집]

반출생주의에 따르면 가장 좋거나 나쁘지 않은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어떻게든 존재 - 태어나게 된 이상 나쁨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며, 이를 보상받을 길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존재하게 되어 남을 존재하게 할 능력(새로운 생명의 탄생 능력) 이 있는 이상, 존재하는 이는 남을 태어나지 않게 할 의무가 있다. 반출생주의에 따르면 보상 없이 수행할 의무만 있는것이다.

기독교의 구원 사상, 미륵불 사상, 민주주의적 평등 사상, 공산주의 사상 등의 공통점은 지금은 없다 할지라도 먼 미래에나마 주어질 수혜가 있다. 기독교나 미륵불 사상 같은 경우에는 전능한 구세주가 우리를 생의 고해로부터 구원한다는 수혜를,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적 평등 사상에서는 신분적, 계급적 차별로부터 철폐된 평등사회라는 수혜의 전망을 제시한다. 그러나 반출생주의 사상에서는 수혜자가 없다. 비존재하는 잠재적 인간들은 원래부터 비존재하였으며, 비존재하는 이상 어떠한 추가적 이익을 안겨줄 수 없고, 존재하는 사람은 존재라는 '나쁜' 상황에서 구원받을 방법이 없다. 개인적으로 인생을 혐오하여 자살하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22] 심지어 자신을 낳은 부모에게조차 화풀이할 수 없다. 반출생주의는 자신의 부모를 증오하여 폭력이라도 행사하는 순간 그것을 고통으로 간주해 악행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때문이다.

반출생주의는 특정한 상황을 문제라고 규정할 수는 있으나, 막상 "지금 존재하는 우리들"이 그 문제에서 어떻게 개선을 볼 수 있을지는 대답할 수 없다. 문제의 귀결은 '애초에 문제에 처하게 하지 말자(아이를 영원히 비존재하는 상태로 남겨두는 것으로)'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미 존재하는 우리는 이 문제에서 어떻게 덜 고통스러울 수 있는가?" 에 대해서는 위대하신 베너타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아서 행복하게 사시든가..." 라고 할 뿐.

그러므로 반출생주의는 기독교나 미륵불,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인기를 얻었듯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 구석이 없다. 결국 데이비드 베너타 등이 잠시 책을 쓰고 화제가 된 것을 빼면 반출생주의는 거의 논의되지 않으며, 일부 염세주의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혐오할 때의 레퍼토리로만 쓰일 뿐이다. 어떤 반출생주의 옹호자들은 도덕적 만족감을 제시하는데, 문제는 반출생주의자들이 한사코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와는! 을 외치는 죽음 옹호 사상(Promortalism)의 지지자들도 똑같이 '도덕적 만족감'을 수혜로 제시할 수 있다. 그들이 실제로 사람을 고통에서 해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살인을 하거나 자살하지 않는 수행모순과는 별개로, 그들은 이러한 사상이 도덕적으로 옳다 주장하며 도덕적 만족감을 수혜로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출생주의자들부터 그 도덕적 만족감에 동의하지 않으며, 유감스럽게도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반출생주의를 따르는 데서 오는 '도덕적 만족감'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출생주의자들이 죽음 옹호 사상의 도덕적 만족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면, 반출생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도 반출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도덕적 만족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23] 또한 데이비드 베너타가 분석철학적으로 정립한 반출생주의 사상은 지지자들도 인정하다시피 의무론적이며, 그 행위가 옳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어떤 반출생주의자들이 도덕적 만족감, 출생 감소로 인한 환경 파괴의 감소 등의 '좋은 결과'를 제시하는 것은 의무론적인 윤리에서 결과주의적 효용을 가져오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모순이다.

옳기만 할 뿐, 그 외에 아무런 현실성도 없는 주장을 우리는 공염불이라고 한다.

반론[편집 | 원본 편집]

의무주의는 인기, 이익, 결과에 상관 없이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에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의무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반출생주의에 대해 인기, 이익, 결과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사상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결과주의와 비결과주의 사이에서 선택의 문제가 될 것이다.

사상이 갖는 인기와 사상의 정당성은 무관하다. 여러 형태의 집단 이기주의가 더 인기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노예 제도가 당연시되던 시절이 있다고 해서 노예 제도가 옳은 것은 아니다. 대다수가 친자 번식에 집착한다고 해서 입양의 가치가 무시되지는 않는다.

반출생주의는 '최대한으로 신속한 멸종'이라는 결과에 집착하는 결과주의 사상이 아니다. 단지 모두가 반출생주의를 수행한 끝에 멸종된다면 어쩔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할 뿐이며, 끝없는 비자발적 희생자의 생성을 멈추기 위해 '자발적이며 점진적인 멸종'을 추구한다.

부양 단절 및 국가 경쟁력 약화[편집 | 원본 편집]

반출생주의가 개인에게 경제적으로 이득이 될 수 있다고 충분히 볼 수 있지만,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대한민국의 경우 출생률 저하에 따른 인구 데드크로스 현상을 겪어 2020년에 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태어나는 사람은 적은데 부담해야 하는 노인 인구는 늘어 부양금이 증가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뉴스

국민 연금의 고갈 뉴스 역시 인구 감소의 영향으로 가속화되고 있어 반출생주의가 마냥 개인에게 이득을 가져다준다고는 보기 힘들며, 사회에 만연하게 될 시 오히려 개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한국은 특히 국토 내의 자원이 희귀해 인구가 매우 중요한 나라다.
인구 감소는 현재 북한과 대치 중인 상태에서는 큰 악재로 작용하며, 무엇보다도 경제적 원동력이 상실되어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다른 국가에 의해 나라가 멸망한 경험이 있기에 주변국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현 상황에서의 인구감소는 긍정적이라기보다 대비해야하는 문제 중 하나로 인식 된다.

반론[편집 | 원본 편집]

반출생주의의 정당성과 경제 문제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반출생주의는 현재 세대의 향략을 위해 미래 세대를 수단화, 자원화하고 희생시키는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설사 개인 입장에서의 결과적 측면을 놓고 보더라도, 반출생주의의 수행 방식인 비출산이 출산에 비해 개인에게 경제적 손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는 경제 성장 둔화와 막중해진 부모의 책임 등으로 인해 당장 금전적으로 손해를 감수하고 자녀에게 투자해봐야 그만큼 노후에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인이 자신의 노후를 위해 아이를 낳는 것이 오히려 낳지 않는 것보다 그 개인에게 더 큰 손해가 된다는 것이다.

부양 부담이 급증한 원인은 수명의 비약적 증가로 인한 고령화이다. 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미래 세대를 낳는 것은 미래 세대를 희생양 삼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력해지는 시한폭탄을 떠넘기는 것에 불과하다. 인구와 수명이 증가할 수록 그만큼 피부양 인구도 증가한다. 인구 폭발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 속도는 기술 발전 속도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경우, 많은 전문가들은 출산 장려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났으며, 인구 절벽(인구 지진)으로 인해 연금 고갈 등의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하거나,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희생자 수라도 줄이는 것이 부모는 자녀 양육 때문에 자신의 노후 준비가 더 어려워지고 자녀는 부모보다 더 커진 부양 부담을 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인물[편집 | 원본 편집]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독일의 철학자. 반출생주의로 해석되는 쇼펜하우어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본능적 욕망으로 인해 고통이 생겨나고, 존재는 고통으로 가득하다. 세상은 쾌락보다 고통이 더 많고, 쾌락이 고통을 배상할 수도 없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인생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며,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에 굴복하여 아이를 만드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며 부도덕하다. 따라서 삶은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방해하는, 이로울 것이 없는 사건으로 여길 수 있다.
  • 에밀 시오랑: 루마니아의 작가.
  • 자코모 레오파르디: 이탈리아의 시인. "태어난 생물에게 생일은 한탄해야 하는 날이다." "모든 것은 죄악이다. 내 말은 모든 것이 그러하며 사악하다는 뜻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죄악이다. 모든 것은 사악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존재는 사악함이며 사악함을 위한 사제로 임명받았다. 죄악은 그 목적이며 마지막 목적이며 우주다. 유일하게 좋은 것은 비존재뿐이다."
  • 카림 아케르마: 카림 아케르마는 인간이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선한 창조주를 가정하여(신정론), 인위적인 고통 생산으로부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더 이상 무리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쾌락의 최대화보다 고통의 최소화를 가장 중시하는 부정적 공리주의 측면에서 반출생주의를 지지한다.
  • 테오필 드 지로: 벨기에의 작가이자 사회 운동가. 동지와 함께 '비부모의 날'을 정해 기념했다. 그는 태어나지 않을 권리, 그리고 이것이 이미 침해된 경우 좋은 부모에게 태어날 권리를 제창했다. 또한 아이를 낳는 대신 입양을 권한다. 유튜브
  • 페테르 베셀 삽페: 노르웨이의 작가. 아이가 동의 없이 태어난다는 것을 고려하여, 결혼했으나 아이를 낳지 않는 걸 선택했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 과잉 진화한 탓에 지나친 인식·이해 능력을 지니게 됐고, 그 탓에 존재하지 않는 정의와 의미에 대해 망상하며 버티는 비극적인 존재로 파악했다. 그리고 이런 부자연스러운 현실 왜곡과 인간 초월에 대한 갈구를 끝낼 방법은 출산을 회피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자세한 사항은 위키백과반출생주의 문서와 페테르 베셀 삽페 문서 참고.
  • 훌리오 카브레라: 브라질에 거주하는 아르헨티나 철학자. 비존재를 막연히 나쁘게 보는 긍정적 윤리의 모순을 지적하며, 도덕적으로 보다 일관성 있는 '부정적 윤리'를 주창했다. 그는 인간의 삶은 구조적 부정성으로 인해 여러 고통 요소를 지니고, 살면서 누군가를 조작하고 해를 끼칠 수밖에 없기에 근본적으로 도덕적 실격이라 여긴다. 또한 사람들이 아이들을 단순히 미적 대상으로 여기며, 아이는 부모를 위해 구조적으로 부정적인 세상에 던져진다고 본다. 그리고 아이를 만드는 행위는 최악의 가해 행위이자 자율성 훼손 행위라고 주장한다. 자세한 사항은 위키백과의 반출생주의(영문) 문서와 훌리오 카브레라(영문) 문서 참고.
  • 마광수: 국어국문학자.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못내 억울하고, 게다가 적반하장 격으로 세상에 내보내준 은혜를 고마와하라고 들입다 강조해대는 사상이 얄밉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식에게 효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자식은 그저 '애완용'으로 길러야 한다." - <마광수의 뇌구조> 中
  •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의 소설가.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야. 무슨 뜻이냐 하면 생명을 만들어내는 일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 어떤지, 그걸 잘 모르겠다는 거야. 아이들이 성장하고, 세대가 교체되고,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지? 산을 더 허물어서 바다를 메우고, 더 빨리 달리는 차가 발명되고 더 많은 고양이가 치여 죽어. 그뿐 아니겠어?" - <양을 쫓는 모험> 中
  • 이한: 변호사, 법학 박사. 데이비드 베너타의 저서「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의 역자. 윤리학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시민교육센터
  • 라파엘 새뮤얼: 뭄바이의 사업가이자 인도인 반출생주의자. 반출생주의를 근거로 변호사인 부모를 고소했다. BBC 기사
  • 레스 나이트: 미국의 사회 운동가. 그는 사람들에게 자발적 인류 멸종 운동(Voluntary Human Extinction Movement, VHEMT)에 동참하길 권한다. VHEMT 참여자들은 반출생주의를 통해 인구과잉으로 인한 기아 문제, 자원 고갈 문제 등을 해결 또는 억제할 수 있다고 여긴다.[24] 하지만 이들은 자살 혹은 살인을 권장하지도 않고, 강제 불임 수술을 통해 사람들이 출산을 하지 못하게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태어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으니까 최대한 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가자고 할 뿐. VHEMT 공식 홈페이지

종교 및 단체[편집 | 원본 편집]

  • 자이나교: 자이나교는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와 동시대에 태어나, 신분 역시 비슷하게 왕자였다고 전해지는 마하비라[25]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한다. 자이나교는 사실상 인도 서북 지방에서만 계승되고 있는 극단적인 금욕주의 종교로서, 자이나교의 승려는 불살생(아힘사)을 위해 나체로 지내거나(공의파) 헐벗는 등(백의파) 계율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26]만 소유한다. 또한 채식은 물론이고 그조차도 죽지 않게 일부를 떼어 먹을 수 있는 것만 먹으며 벌레가 물어도 방치하는 등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이나교의 5계[27]는 종교학적으로 뿌리(브라만교)가 같은 불교의 5계[28]보다 요구 조건이 훨씬 더 엄격하다. 마하비라는 걸식을 위한 그릇조차 거부하여 손을 모아 받아먹고 성욕에서 비롯되는 행위 자체를 금했다고 전해진다.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해탈 방법은 식욕마저 버린 아사이다. 이러한 자이나교의 교리는 설령 자신이 고행할지언정 미물을 포함한 다른 존재에게 주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영지주의: 초기 기독교가 성립할 때 상대적으로 헬레니즘 기질이 강했던 영지주의는 보다 헤브라이즘 기질이 강했던 당대 기독교 주류에 의해 탄압당해 쇠락했다. 당시 이단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남용되다 보니 지칭하는 저변이 지나치게 넓긴 하지만, 기독교 금욕주의 관련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성욕과 식욕을 특히 죄악시했으며, 결혼이나 출산을 부정적으로 보는 기독교 관련 교파들은 거의 모두 영지주의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 엔크라테이아파: 엔크라테이아파는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절제(encrateia)'를 미덕으로 삼았던 기독교 이단 교파로, 육식•음주•결혼•성생활 등을 사탄을 돕는 일로 여겨 금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탄생이 죽음으로 이어지므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출산을 멈춰야 한다고 보았다. 시리아의 타티아누스는 그리스 교육을 받고 진리를 찾다 발견한 기독교로 개종하는데, 스승 사후 엔크라테이아파의 지도자가 된다. 그는 성찬례의 술을 물로 대체하는 등의 일로 인해 파문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 마르키온파: 기독교인 중 최초로 정경(正經)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이 철저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구약에서 묘사된 유대교의 하느님이 얼마나 모순적이며 악의적인지 신랄하게 비판하며, 사랑의 하느님인 예수의 하느님이 불행과 악이 만연한 불완전한 세상을 창조할 리 없다고 믿었다. 또한 성교의 난잡함이나 임신 및 출산의 고통을 납득하지 못했으며, 결혼을 유대교의 하느님을 돕는 일로 간주하고 배격했다. 결국 이단 선고 후 탄압받고 마니교에도 흡수되는 등 세력이 쇠했다.
  • 보고밀파, 카타리파: 불가리아에서 기원한 기독교의 이단 교파인 보고밀파는 기독교의 선한 하느님이 이런 불합리한 세상을 만들었을 리 없다고 여겨 악마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출산은 악마를 기쁘게 할, 육체의 노예를 만들어내는 행위로 파악했다. 따라서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성행위를 경원시했다. 대신 성욕 해소 대안으로 항문성교를 권장했다.[29] 이후 보고밀파는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다. 카타리파는 보고밀파의 시각을 공유했으며, 결국 알비 십자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말살당했다.
  • 마니교: 페르시아에서 기원하였으며, 조로아스터교·유대교·기독교·불교 등 온갖 종교의 교리를 융합한 종교인 마니교는 육식, 간음, 출산 등 육적인 것을 고집하면 환생의 고통을 겪는다고 설파했다. 위협적인 성장세를 보이던 마니교는 교조 마니가 처형되는 등 기득권 종교들에 의해 모진 박해를 받았다. 그 박해 와중에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이 바로 기독교의 교부로 추앙되는 아우구스티누스이다.
  • 셰이커: 진교도(震敎徒)라고도 한다. 18세기 중엽 미국에서 일어났으며, 이름은 교파의 의식 중 하나인 격렬한 춤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들은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모두가 재산을 공유하고 결혼을 경원시하며 순결을 미덕으로 여겼다. 출산을 거부하는 대신 고아나 노숙자를 입양하였으며, 21세에 공동체에 머물거나 떠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었다.
  • ANP(The Anti-Natalist Party): 영국의 반출생주의 정당. 이들은 단지 불필요한 쾌락을 위해 불필요한 고통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출산 억제를 위한 세법 도입을 주장하기도 한다. ANP 공식 홈페이지

영화[편집 | 원본 편집]

  • 가버나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 신분증도 없고, 출생증명서도 없어서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자인. 법정에 선 자인에게 왜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지 판사가 묻자 자인이 대답한다.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이 끔찍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게 그들이니까요."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영어 위키백과:반출생주의
  • 반출생주의 레딧 : 가장 인원 수가 많은 반출생주의 커뮤니티 중 하나. 초기엔 인원이 적었지만 청년 실업난, 환경파괴, 코로나 창궐 등 세상의 부정적인 면들이 많아지자 빠르게 인원 수가 증가하고 있다.

언론 보도[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이와 비슷한 내용의 그리스 전설이 있다. 미다스 왕이 디오니소스의 시종이자 거인 현자인 실레노스를 붙잡아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뭔지 물었다. 그러자 실레노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가련한 하루살이 종족이여! 우연과 간난(艱難)의 아들이여! 듣지 않는 것이 너희들에게 좋을텐데, 어째서 나로 하여금 말하기를 강요하는가? 너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은 너희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다시 말해서 태어나지 않는 일, 무(無)라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에게 다음으로 좋은 것이란 곧 죽는 것이다." 소포클레스희곡에도 비슷한 대사가 있는데 위 전설을 변용한 것일 수 있다. 쇼펜하우어, 니체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다.
  2. 이에 대해 합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아니라는 반론이 있다. 예컨대 아동은 판단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성인의 아동범죄에 아동이 설득당해 동의하더라도 무효로 간주된다. 하물며 태어나기 전의 아이는 저런 동의를 얻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반출생주의가 정당화된다. 아이를 고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이의 행위의 자유를 크게 제한할 수밖에 없는 것 역시 아이에게는 고통이다.
  3. 물론 이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도 있다. 계획생육정책 등 여러 국가가 시행한 산아제한정책이 바로 그것. 그러나 이것은 당시 맬서스가 제기한 인구 과다로 인한 사회 붕괴 우려 때문이었으므로, 현 사회 구조 유지를 추구하는 출산장려정책과 사실상 목적이 같으며 본질적으로는 다를 게 없다. 실제로 맬서스의 인구론이 무너지고 당장 더 문제가 되는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선 상태.
  4. 가톨릭 등의 경우 성직자에 한해 독신을 요구하지만, 이는 세습을 막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5. 소위 '낳음당했다.', '낳은 죄' 등으로 표현되는 부모와 자식 간의 비대칭성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낳아줬으니 감사히 여기고 효도해라.'라는 적반하장식의 세뇌교육을 빙자해 이루어져온 게 현실이다. 비단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욕구를 못 이겨 낳은 이상 당연한 양육 의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키워줬다는 생색을 내는 경우는 흔하다.
  6. 질서혼돈, 논리비논리처럼 행복과 불행, 쾌락과 고통은 공존하기에 구분될 수 있는 개념이다. 설령 다수의 쾌락과 행복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소수의 불행과 고통을 정당화할 순 없는데, 심지어 현실의 불행과 고통이 소수라고 볼 수도 없다. 그리고 행복했던 기억도 죽음의 순간엔 이미 과거일 뿐이다.
  7. 허무주의도 능동적 허무주의가 존재하는 등 꼭 태도가 무기력하지만은 않다. 그리고 반출생주의 또한 이미 태어난 사람은 이왕 사는 거 되도록 즐겁게 살자고 말한다. 단지 번식 욕심은 아이를 위해 포기하고 참자고 설득할 뿐이다. 반출생주의 역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상대와 어떠한 암묵적 합의조차 없이, 그 상대에게 고통 가능성을 강제하는 것은 나쁘다는 도덕적 당위에 기반한 일관성 요구이며, 그 결과 현재로서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최선으로 여겨질 뿐이다.
  8. 보통의 부모라면 그들 역시 부모에 의해 강제로 태어나 사회적으로 세뇌된 존재이기에 이해와 용서의 여지가 있지만, 스스로 존재한다는 전지전능한 부모는 그럴 여지도 없다. 특히 현세의 고통도 모자라 맘에 안 드는 자녀를 위해 각별히 영원한 고문장까지 예비한 부모라면 현대의 관점에서는 악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9. 전두엽이 큰 충격을 받아 손상되거나 종양에 침식될 경우, 단기 기억 상실·언어 장애를 경험하거나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폭력성을 띠기도 한다. 19세기에는 정신질환 치료를 목적으로 전두엽을 헤집는 수술이 성행하기도 했는데, 얌전해지는 대신 삶에 있어서 대부분의 의욕을 잃거나 사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그리고 우울증세로토닌·도파민·노르에피네프린·멜라토닌 등 호르몬의 결핍 및 불균형이 원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 1990년대 미국에서 프로이트를 흉내내던 상담사들에 의해 많은 아이들이 부모가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굳게 믿게 되어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또한 뇌에 연결한 전극을 통해 손을 움직이도록 만든 실험, 과거 간질 발작을 막기 위해 뇌량을 절개했던 분리뇌 환자 양안에 각각 별개의 그림을 보여주고 행동을 유도하는 실험 등에서 피험자는 유도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으로 그럴싸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꿰맞춰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행동이라고 굳게 믿었다.
  11. 현상의 원인으로 가정한 존재가 있든 말든 동일하게 해당 현상이 설명 가능하다면 오컴의 면도날 원칙에 의거해서 생략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예시로 에테르 가설, 플로지스톤 가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등이 있다. 다만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자유의지의 존재를 가정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양립가능론에 기반한 의무론 측면에서 부모에게 굳이 자녀를 낳아 자녀의 고통과 죽음을 야기한 책임을 묻고 비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12. 카르마힌두교카스트 제도는 수저 계급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13. 영국령 인도 출신 법학자 하리 싱 구어는 자신의 저서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출산과 죽음의 순환을 끝내라는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아이를 만드는 것이 인생의 고통과 죽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아이를 만들지 않을 거라는 것.
  14. 다만 기독교 내 근본주의 또는 교조주의적 입장을 제외하면 출생주의가 꼭 절대적인 교리라고 할 수는 없다. 성경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다양할 수 있기 때문. 그러나 출생주의적인 해석에 절대 다수가 동조적이거나 중립적인 입장인 건 사실이다. 사실 과거에 이에 반하는 교파가 있긴 했으나 이단으로 몰려 말살당한 바 있다. 종교 및 단체 항목 참조.
  15. 현대의 정경유착, 경언유착 등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치인과 대형 교회의 유착 정황은 자주 목격된다. 미국의 초대형 교회는 대기업과도 맞먹는다. 물론 이는 개신교만의 문제는 아니고,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공산권 국가나 일부 예외 사료를 제외하면 전세계 과거와 현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 정말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누가 어떻게 지옥에 갈지 미리 다 알면서(예정설) 그러도록 방치한다는 뜻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칼뱅·루터 등은 예정설을 주장하는 동시에 신은 무조건 선이니 정당하고(신정론), 자유의지가 악에 물들었기에(루터는 아예 노예의지론을 주장했다.) 악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악의 문제를 해명하려는 신정론의 모순은 에피쿠로스 시절부터 이미 지적되어 있던 것이다('악이 존재하는 한 신은 악하거나 무능하다.'). 전지전능하고 절대선인 신은 분명 다른 좋은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피조물이 고통받을 것을 알면서 이렇게 창조했다는 것은 모순이다. 이에 대해 불완전한 인간이 감히 완전한 신의 뜻을 어찌 아냐고 신앙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다면 모든 신학과 종교 논리 또한 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간이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 개신교 주류 주장에 따르면, 신앙을 알고 선택할 기회 없이 사망한 아이 등의 경우 천국에 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영유아 살해, 순교 강요, 종교의 자유 박탈과 전도 금지를 포함한 대대적인 종교 탄압 등 극단적이고 반사회적인 범죄 행위가 타인을 천국에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실제로 아메리카 원주민 영아를 세례해주고 바로 살해한 스페인 기독교인들의 사례가 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이런 생각 자체가 신의 뜻에 반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므로 생각 자체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18. 해당 링크의 서평에도 그의 사상이 잘 요약되어 있지만 저작권 문제로 위키에 직접 기재하지 않는다.
  19. '좋았던 옛날' 편향(므두셀라 증후군).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기반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기에 미화된 추억이 미래에 대한 현재의 태도를 결정하기 쉽다.
  20. 비동일성 문제는 태어날 자녀나 후손이 겪을 장애나 환경 오염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한 부모와 현재 세대의 선택이, 원래 존재했어야 할 자녀나 후손 대신 다른 동일성(정체성)을 지닌 자녀나 후손을 존재시킨다는 역설 또는 딜레마에 대한 윤리적 문제다. 데릭 파핏이 이 문제를 제기한 이래 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미래 세대에 대한 도덕적 책임의 근거와 기준에 대해 논쟁하고 있다.
  21. (영어) Paul Murtaugh (2009.7.31.). Family planning: A major environmental emphasis, Oregon State University,. 2019.12.21.에 확인.
  22. 반출생주의는 자살을 적극적으로 찬성하거나 조장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개인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살하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23. 데이비드 베너타부터 자신의 사상이 널리 범세계적으로 동의받을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 판이니 말이다.
  24. 실제로 중국은 계획생육정책을 시행했고 인도에서도 비슷한 정책을 시행했다. 한국도 군사독재 시절 산아제한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권장이 아닌 강제적인 방식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인권을 침해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저출산이 경제 성장 둔화의 원인이 되는 등 국익을 저해한다고 여겨지자 오히려 출산장려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25. 대영웅이라는 뜻이다. 본명은 바르다마나. 마하비라는 엄밀히 말해 자이나교의 교조는 아니나 그에 준한다. 마하비라는 승자, 정복자라는 뜻을 가진 '지나'로 숭상되는데, '자이나'는 이 '지나'를 따르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26. 방울 지팡이, 입을 가리고 물을 걸러먹을 천, 빗자루 등. 이것들 역시 미물조차 최대한 죽이지 않기 위한 도구에 해당된다.
  27. 불살생, 불소득(무소유), 불망어(거짓말 금지), 불탈취(절도 금지), 불음(모든 성적 행동 금지)
  28. 불살생, 불투도(절도 금지), 불사음(간통 금지), 불망어, 불음주
  29. 항문성교를 뜻하는 단어 buggery는 보고밀파가 기원했던 불가리아에서 유래한 말로 알려져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에는 피임법이 발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