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서

朴忠緖.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8년 8월 24일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누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무렵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재학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1일 탑골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해 종로, 대한문, 남대문, 각국 영사관 앞을 순회하며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귀향한 그는 3월 19일 김포군 양촌면 루산리에 소재한 안성환(安聖]煥)의 집에서 박승각, 박승만, 정억만, 전태순(全泰順) 등과 의논하여 양곡 장날인 3월 23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태극기·격문·경고문 등을 작성하여, 오인환과 정억만에게 동리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양곡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장을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후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해 공소했으나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2] 이에 불복해 상고하면서, 박승각, 박승만, 정억만과 함께 상고취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므로 제1심 및 제2심에서 받은 유죄의 판결은 부당하며 복종할 수 없는 위법한 것이므로 상고한다.

그러나 1919년 9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옥고를 치렀다.[3] 출옥 후 김포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4년 1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박충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