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
박초롱초롱빛나리 생전 사진.jpg
박초롱초롱빛나리양의 생전 모습
사건 정보
날짜 1997년 8월 30일
장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 뉴코아백화점
원인 생활고와 원한으로 인한 살해
인명피해 사망 1명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우리나라가 IMF로 어려웠을 시절인 1997년, 만삭의 임산부인 범인 전현주(28)가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의 뉴코아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영어 수업을 받고 나오던 박초롱초롱빛나리(9)양을 유괴하여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의 한 지하실에서 살해한 사건이다.

피해자의 이름이 특이한 면도 있지만,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은 97년 당시 굉장히 큰 사건이었으며, 공개 수사로 전환 이후 언론에서도 굉장히 크게 보도가 되었다. 때문에 당시 수사에서도 온갖 제보들과 추측 전화가 경찰서로 걸려오곤 했다.

사건 진행[편집 | 원본 편집]

1997년 8월 30일 오후 2시 45분~3시 쯤, 만삭의 임산부였던 범인 전현주는, 서울 잠원동의 뉴코아백화점을 행보하다가 우연히 문화센터로 영어 수업을 받으러 오는 초등 여학생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중 전현주의 눈에 가장 들어온 아이는 가장 예쁘게 생기고 부유하게 자란 것처럼 보였던 9세의 박초롱초롱빛나리 양. 전현주는 부잣집 딸로 태어나 자란 듯한 아이의 모습에 자신의 처지가 비교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1] 박 양에게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걸게 된다.

전현주는 박 양에게 말을 걸어 친근감을 형성한다. "너 몇살이니?" "어디 가니?" 등등.. 그렇게 어느 정도 친근감을 형성한 전현주는 박 양이 영어 수업을 모두 끝마치고 나올 때까지 백화점 앞에서 기다린다. 이후 2시 45분에서 3시 쯤 박 양이 나오게 되자 전현주는 냉큼 다가가 박 양에게 아는 척을 한다. "어머 또 만났네. 너 아까 나 봤지?"... 그러다가 전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꼬셔 유괴하게 된다. 인형이 많은 재미있는 곳에 데려다 줄테니 같이 가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박 양은 전현주를 따라가게 되고, 전현주는 아이를 서울 사당동의 한 지하실로 데려간다. 그 지하실은 전에 연극 극단을 운영하던 전현주의 남편이 쓰던 곳이었는데, 남편의 연극 사업이 실패한 이후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런 장소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탓에 관리 또한 제대로 되어 있을 리가 만무했고, 특히 내부는 정말 건장한 성인이 들어가도 오래 버티기가 힘들 정도로 퀴퀴했으며, 벽에는 온갖 곰팡이가 슬어 있었고, 각종 해충들이 나돌아다니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 9살 아이가 끌려가서 변을 당했으니..

오후 6시쯤, 지하실로 끌려온 박 양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전현주에게 자신을 집에 보내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그러나 전현주는 아이가 행여나 겁에 질려 도망갈까 청테이프로 손발을 묶었으며, 박 양에게 이름과 집 주소, 부모님과 집의 전화번호를 물어본다. 그것도 모자라서 집에다가 직접 확인 전화까지 걸어본다. 아이가 전화번호를 제대로 말한 것인지 확인해야 했었기 때문.

그 시간, 나리네 집에서는 딸이 돌아오지 않자 한바탕 난리가 났고, 경찰관이 실종 신고를 받고 출동하여 나리네 집에 전부 모여든다. 보통 유괴 사건이라면 유괴범으로부터 금전 등을 요구하는 협박 전화가 걸려오기 때문에 경찰관들은 녹음기를 준비하고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후 6시, 전화가 걸려오고, 박 양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는다. 아까 박 양의 집 전화번호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현주가 걸었던, 바로 그 전화였다. 어머니는 전화를 받았고, 전현주는 "나리네 집이죠? 나리는 잘 있어요. 나리가 보고 싶으시면 현금 2천만원을 준비해주세요." 이 말로 그저 박 양이 무사하다는 말과 자신의 요구사항만 남겨놓고 첫 번째 통화를 끊는다. 통화 길이가 너무 짧아 경찰은 발신지 추적에 실패하였다.

한 편, 사당동 지하실에서는 첫 번째 통화가 끊기고, 박 양이 재차 전현주에게 자신을 집에 돌려보내줄 것을 부탁한다. 분위기가 매우 무겁게 흘러가자 극도의 공포감을 느낀 박 양은 울고불며 전현주에게 자신을 집에 보내달라고 아예 애원을 한다. 그러나 전현주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박 양의 소리가 바깥까지 들리게 될까 두려워 박 양의 입과 코를 막아버렸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계속 신음소리를 내며 몸부림을 치자, 전현주는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인다. 집에 보내달라며 애원하던 박 양은, 이내 수면제의 효과에 무너져버렸으며, 전현주는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목을 졸라 살해한다. 이후 전현주는 박 양의 시신을 당시 지하실에 있던 커다란 등산가방에 유기하게 되고, 박 양의 몸이 등산가방세 들어가지 않자, 아이의 옷을 모두 벗겨 등산가방에 시신을 쑤셔넣는다.

이후, 아이가 사망한 상태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박 양의 집에서는 범인에게 또다시 전화가 걸려올 것이라 믿고 밤을 새며 기다렸지만, 전화는 날이 밝도록 오지 않았다. 결국 다음 날 8월 31일, 나리가 실종된 지 24시간이 지난 오후 3시 52분, 드디어 박 양의 집으로 두 번째 전화가 걸려온다. "나리네 집이죠? 돈은 다 준비되었나요? 왜 돈은 준비를 안 하시죠?..." 이번 통화는 특이한 점이 있다면, 분명 발신자는 동일인이 분명했으나, 희한하게 발신자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진이 빠져있고 기운이 없는 듯한 목소리였고, 어째 한숨 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또한 통화도 어제보다 꽤 길게 이어졌고 말이다.

경찰은 두 번째 통화에서 발신지 추적에 성공하였고, 그 전화의 발신지는 명동의 한 공중전화 박스로부터임이 밝혀졌으며, 그 공중전화박스로 형사들이 출동한다. 범인을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잡아놓아야 했기에, 경찰 측은 박 양의 어머니에게 통화를 최대한 질질 끌도록 유도하였고, 박 양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너무 보고 싶은데 목소리 한 번만 들려달라고 애원을 하면서 시간을 끌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범인 "나리는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나리가 보고 싶으시다면 현금으로 2천만원을 준비해서 명동역 남대문 방향에 있는 10층짜리 건물의 8층으로 가서 기다리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후 형사들이 해당 공중전화 박스를 급습했지만, 그 곳에는 막 전화를 끊고 떠나간 듯한 흔적이 있었을 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머지 않은 과거에 범인은 이 곳에서 통화를 했다. 경찰관들은 길을 가던 행인들 다수를 붙잡아 방금 전 공중전화 박스를 사용한 사람에 대해 물어본다. 사람들마다 조금 다르게 얘기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바로 범인은 키가 작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라는 것.

당시로써 별 방법이 없었던 경찰은 시민들의 진술에서 나온 공통점을 참고하여 수사를 진행했고, 범인이 사용한 공중전화 부스의 수화기에는 지문이 분명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에, 수화기를 통째로 뜯어내어 국과수에 지문 감식을 의뢰하여 넘겼다.

그리고 그 날 오후 9시쯤, 드디어 기다리던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범인은 자신의 요구사항인 2천만원과 전달받을 장소를 재차 얘기하였다. 이 때, 경찰은 또다시 전화 발신지 추적을 시작했고, 그 결과 그 전화는 서울특별시 명동의 한 커피숍에서 걸려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경찰은 범인을 잡아놔야 하기에, 박 양의 어머니에게 통화 시간을 오래 끌도록 하고 명동의 경찰들을 거의 총동원하여 곧바로 해당 커피숍으로 출동, 범인은 박 양의 어머니가 경찰에 신고하였음을 눈치채고 전화를 끊었지만 경찰들은 다행히 도주하기 전에 해당 커피숍을 급습하였다. 해당 커피숍 안에 있던 사람은 총 13명.

물론 전화는 끊어졌지만 분명히 범인은 그 커피숍 안에 있는 상황. 경찰들은 커피숍의 입구와 출구를 봉쇄하고 해당 커피숍 안에 있는 모든 손님과 종업원들을 검문하였으며,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지문을 채취하는 등의 수사를 벌였다. 그런데 구석 좌석에 앉아있던 한 임산부를 검문하려는 순간, 그 임산부가 지금 만삭의 임산부에게 뭐하는 짓이냐며 경찰에 강력하게 저항했고, 배가 너무 아프다며 병원을 가야 한다고 연기를 한다. 안타깝게도 경찰은 수사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상황인데다가 만삭의 임산부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고, 결국 경찰은 지문과 인적사항 등만 확인한 뒤 범인을 눈앞에서 그냥 보내준다.

물론 범인을 눈앞에서 보냈지만, 분명 검문을 실시했던 13명의 손님 중 20대 여성 한 명이 범인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에 경찰은 해당 커피숍에 있던 모든 20대 여성들에게 일일이 미행을 붙여 잠복 수사를 실시하게 된다. 동시에 유괴범이 경찰이 수사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더 이상의 협박 전화는 걸려오지 않는 상황. 이에 박 양의 부모님의 동의 하에 경찰은 실종 5일째인 9월 4일, 수사를 비공개 수사에서 공개 수사로 전환하게 되고, 이때부터 모든 언론에서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사건에 대해 미친 듯이 보도하기 시작, 전국민이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면서 경찰서에는 온갖 추리 전화 및 제보 전화가 걸려 들어왔다. 1997년 당시 이 사건이 굉장히 큰 사건이었기에..

그러던 어느 날, 경찰서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한 남성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는데, 그 남성이 말하길, "자신의 딸이 9월 1일, 가출을 하여 연락이 안 되고 있는데, 만삭의 임산부 상태이다."라는 것. 앞서 언급했듯이 전에 수사했던 커피숍의 모든 20대 여성들에게 미행이 붙었으며, 자신의 집 앞에서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성이는 것을 찜찜하게 느끼기 시작한 이 남성은 이윽고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알고보니 범인 전현주의 부친이었던 것.

경찰은 이 증언을 사건의 중요한 열쇠로 삼았다. 분명 커피숍에 만삭의 임산부도 대상에 포함이 되었고, 가출 시기도 사건의 시점과 비슷했기 때문. 경찰은 해당 남성을[2] 경찰서로 불렀고, 이전에 걸려온 범인의 목소리가 담긴 협박 전화가 녹음되어 있는 테이프를 남성에게 들려주었다. 테이프를 듣고난 남성은 잠시의 고민 후 말했다.

제 딸의 목소리가 맞습니다.

범인의 검거[편집 | 원본 편집]

위 남성의 증언을 토대로 경찰은 전현주가 범인임을 거의 확신하게 되었으며, 추가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공중전화의 수화기에서도 지문 채취를 해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수화기의 수많은 지문들 중 범인 전현주의 지문이 발견되었다. 드디어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었고, 경찰은 수사의 방향을 제대로 잡게 되었으며, 그동안의 미행을 바탕으로 만삭의 임산부가 다닐 만한 지역의 모텔을 전부 다 뒤졌다. 아무래도 만삭의 임산부가 혼자서 모텔에 들어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케이스인지라 범인의 꼬리를 잡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사건 발생 13일만인 9월 12일,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의 한 모텔에 범인으로 보이는 만삭의 임산부가 들어왔다는 첩보를 받았으며, 잠시 후 경찰들이 해당 모텔로 모두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길고 길었던 13일의 여정 끝에 드디어 범인 전현주를 검거하게 된다. 검거 당시 전현주는 머리도 완전히 산발이 되고 눈도 완전히 풀려버린, 매우 초췌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제 범인은 검거되었고, 박 양을 구하는 것이 다음 목적이었던 경찰은, 범인에게 박 양의 위치를 알려줄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대답을 하지 않는다.. 경찰은 여러 가지 협박까지도 해보다가 결국 전현주에게 호소까지 하게 되고, 버티다 못한 전현주는 경찰들을 당시의 지하실로 안내한다.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퀘퀘한 냄새와 온갖 쓰레기가 다 모여 있던 그 지하실은 몇 달째 쓰지 않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런 장소였다. 전현주는 그 곳으로 형사들을 데리고 온 뒤, 계단 아래 구석진 곳에 있는 한 등산가방을 가리킨다.

결말[편집 | 원본 편집]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경찰들은 서둘러 그 등산가방을 열어보게 되고, 이내 경악을 하게 된다. 등산가방 안에는 뭐 하나 걸치지도 않은 알몸 상태의 박 양이 싸늘한 시신으로 들어있었다. 시신은 한 번에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부패한 상태였으며, 목에는 목 졸린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상술했듯이 등산가방에 사람을 넣어야 했기에 부피를 줄이기 위해 옷을 벗기게 된 것. 형사들의 끈질긴 노력과 부모들의 눈물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것은 박 양의 싸늘한 시신이었던 것이다.

부모에게 예쁜 아이로 기억되고 있었던 박 양은 그렇게 참혹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범인 전현주[편집 | 원본 편집]

당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던 전현주는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평범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으로 올라가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썽이 많았던 전현주는 끝내 대학에서 제적을 당하고 만다. 제적을 당하게 된 전현주는 생업을 위해 여러 가지 방안으로 취직을 시도했지만, 이미 대학에서 제적을 당해버린 상태였기에 취직이 수월하게 될 리도 만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현주는 한 남자와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 남자가 연극 극단에 소속되어 연극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부모님의 반대가 매우 거셌다. 연극 극단 일을 하면서 생업을 어떻게 하겠냐며 그 남자를 무시했고, 결혼을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결국 전현주는 자신이 바라던 대로 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후에 밝혀진 사실인데, 전현주는 이 남자와 결혼을 하는 과정에서도 남자에게 자신의 경력 및 약력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일삼았다고 한다. 남편도 전현주의 학력과 약력을 알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대충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갈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운영하던 연극 극단이 사업을 실패하고, 연속되는 불행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전현주는 남편과의 관계도 멀어지게 된다. 몸은 만삭 상태인데 생업은 개판이고, 빚은 점점 쌓여만 가는데 그렇다고 그녀에게 들어오는 일거리가 하나도 없게 되자, 점점 전현주에게는 삶이라는 것이 의미 없게 되었고, 전현주 스스로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가지게 된다.

그렇게 사회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원망을 품고 살아가던 전현주는 사건 당일이었던 8월 30일, 딱 봐도 부잣집 딸로 보이는 박초롱초롱빛나리 양을 보고 자신의 인생과 극심히 비교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되며, 자신도 모르게 박 양에게 말을 걸게 된다. 그렇게 그녀는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하게 된 것.

사건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실 박초롱초롱빛나리 양은 사건 발생 9일 후인 9월 8일이 생일이었는데, 이에 집에서는 박 양의 생일파티 준비를 해놓고 제발 박 양이 무사히 부모의 품에 안기기만을 기원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 양은 생일을 맞기도 전인 사건 당일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이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더욱더 깊은 감정을 심어주기도 했다.

처벌 관련[편집 | 원본 편집]

처음에 전현주는 단독범행이 아닌 공범이 있음을 계속 주장하였다. 자신이 하고 싶어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도록 시킨 공범이 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전혀 없었기에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으며, 결국 이 사건은 전현주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이 났다.

전현주의 죄질은 너무나도 불량했기에 검찰은 전현주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그러나 부장판사는 전현주가 그래도 초범이었다는 점, 그리고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 점을 토대로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을 감형시키게 된다.

전현주는 검거 후 2개월이 지난 1997년 10월 15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가락동 경찰병원에서 뱃속의 아이를 순산하였으며, 그 아이는 출산 직후 남편이 데려갔고, 이후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고 한다. 출산 과정에서 전현주는 2주간 형집행이 정지되었다.[3]

전현주는 2024년 04월 23일 현재까지도 청주여자교도소에 수감되어 무기징역수로 26년째 복역중이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범인이 임산부라는 것은 사실 발생하기 쉽지 않은 케이스였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사건이기도 하다. 후에 친절한 금자씨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었다고.
  • 앞서 언급했듯이 이 사건 이후로 이름을 길게 짓는 사례가 줄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유언비어이다.

각주

  1. 후술하겠지만, 사실 전현주도 부잣집까진 아니었지만 비교적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하여 갑작스럽게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것.
  2. 범인 전현주의 부친
  3. 다른 임산부 같으면 4주간 형집행정지가 되어야 하는데, 전현주는 죄질이 너무 불량하여 2주만 정지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