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 (야구 선수)

한화 이글스의 투수. 2010년 갑작스레 등장하여 한화 불펜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보직은 보통 마무리이나 팀 사정에 따라 중간 계투로 뛰는 경우가 많고, 아예 3이닝 넘게 던지는 중무리 투수로 운용되기도 한다. 별명은 노망주. 그가 포텐을 터트리며 1군에 데뷔한 것이 2010년, 즉 그의 나이 35세의 일이었다.

빛을 보기 이전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충북 청주 출신이며 어릴 적부터 야구인생에 마가 끼기 시작했다. 1991년 당시 박정진은 청주중 3학년이었고, 다음해에 충북 최고의 명문 청주고 야구부로 진학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991년 8월, 청주고등학교 야구부에서 심히 불미스러운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고[1] 격분한 학교측에 의해 야구부는 전격적으로 해체되었다.[2]

이때 박정진은 하마터면 야구로 진학할 곳을 찾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그것도 타인의 잘못으로 야구를 접을 뻔 하였으나 다행히 청주의 세광고등학교 야구부에서 배려를 해주어 세광고로 진학했다.[3] 이후 세광고에서 초고교급 기록을 찍어주며 한화로부터 고졸 1차 우선지명을 받아 계약하기로 했으나 느닷없이 연세대학교 야구부로 진학, 한화 구단을 진노케 했고 뒤늦게 부모와 함께 사과하고 대학 졸업 후 무조건 한화에 오기로 약속하였다. 이는 박정진의 집안과 관계있는 이야기인데, 박정진의 조부와 부친 모두 연세대 출신으로 박정진까지 연세대를 나오면 3대 연속 연세대 출신이라는 명함을 내밀 수 있기 때문. 이후 대학에서도 다른 팀을 상대로 압도적인 구위를 보여주었다. 다만 1998년 연고전때 볼넷만 8개를 던지며 2:6 패배에 일조해 연대인들의 지탄을 받았다.

이후 1999년 한화 이글스에 정식으로 입단하나 프로 시즌 첫 해 12경기 12 1/3이닝동안 15피안타(홈런 2개 포함) 10볼넷 11자책으로 ERA 8.03을 기록한 채 2군으로 내려가고, 2000년에도 큰 차이없는 성적(17경기 14 1/3이닝 17피안타(홈런 3개 포함) 9볼넷 9자책 ERA 5.65)으로 2년 대부분을 2군에서 보냈다.

다만 박정진이 프로 입단 후 2009년까지 2군에서만 있었다는 서술은 신규유입층, 주로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이후 유입된 야구팬들이 착각하는 것으로 박정진은 2001~2004 4시즌동안 1군에서 계투진으로 나름대로의 위치를 차지했다. 이는 당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 2001 : 30경기 57이닝 53피안타(5홈런 포함) 31볼넷 30자책 4승 3패 ERA 4.74
  • 2002 : 41경기 47 1/3이닝 60피안타(11홈런 포함) 22볼넷 35자책 1승 2패 4홀드 ERA 6.65
  • 2003 : 57경기 100 1/3이닝 82피안타(8홈런 포함) 23볼넷 48자책 6승 7패 3세이브 11홀드 ERA 4.31
  • 2004 : 31경기 32 2/3이닝 33피안타(6홈런 포함) 23볼넷 20자책 3승 1패 4홀드 ERA 5.51

이처럼 박정진은 팀의 핵심이나 주축선수라기엔 거리가 멀었어도 그래도 꾸준히 1군에 등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1년에는 조기에 구원으로 등판, 7 1/3이닝 1피안타 무실점 구원승을 기록하기도 했고 특히 2003년에는 100이닝을 소화했고 방어율도 4점대를 기록, 사실상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이 시기는 한화 이글스의 1차 암흑기라 불리는 시기5886899보단 나은데 그게 암흑기라고?여서 팬덤의 관심이 거의 없는 것도 이 시기 박정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유이다. 직후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면서 2005~2007시즌에는 팀을 떠났고 2008시즌에서야 복귀한다.

그리고 복귀 후 팬들이 알고 있는 사이버투수 박정진이 나타난다.

도저히 1군 무대에서 써먹지 못할 투수가 되어서 2008년 꼴랑 5경기 1 1/3이닝 출장해 4피안타(1홈런)를 쳐맞고 사라졌으며 2009년에도 10경기 10 1/3이닝을 던져 10피안타 4자책 8볼넷을 던지며 2군으로 사라졌다. 어깨부상과 그로 인한 부상에 따른 특이한 투구 폼때문에 코치진들도 고개를 가로저었고, 2009시즌 종료 후 박정진은 방출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본인도 이때 방출되리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다고.

그러나 바뀐 감독 한 명이 박정진, 나아가 팀의 몇 년을 책임질 핵심 계투 투수를 구원했다!

신임감독으로 부임한 한대화는 방출선수 명단을 받아든 뒤, 아니 팀에 좌완 투수도 몇 명 없는데 그래도 이 친구는 좌완 아닌가?라며 방출을 보류시켰다. 한대화 말대로 팀 계투진에 좌완투수가 없다시피 하니 최소 좌우놀이용으로 한두 타자정도는 상대할 용도로는 써먹지 않겠냐 하는 것이 한대화의 생각이었다.한두 타자 상대용이 아니라 몇 이닝 책임지는 대투수가 될줄 한대화도 몰랐겠지. 신임감독의 결정을 존중한 구단은 박정진에게 방출 대신 교육리그 파견 통보를 했다. 박정진은 전화를 받자마자 아 방출당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고.

이후 박정진은 투구 폼 교정을 두고 마지막으로 고민하며 팀 내 코치 2명에게 상담했는데, 갓 부임한 성준 코치는 폼 규정을 권유했고, 오랜 기간 팀 동료로 같이하다 코치가 된 정민철네 자신의 폼을 믿어라며 폼을 유지할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박정진은 팀 선배이기도 한 정민철의 조언을 받아들인다. 이 조언은 신의 한 수였다.

늦게 찾아온 전성기[편집 | 원본 편집]

2010시즌 초반 박정진은 패전조로 시작했으나 패전조 치고 상당히 좋은 구위를 보였다.뭣보다 패전이 하도 많아서 허구한날 올라와야 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필승계투조에 편입된 후 그가 보여준 성적은 다음과 같다.

  • 2010 : 56경기 79 1.3이닝 58피안타(3홈런 포함) 27자책점 36볼넷 80탈삼진 2승 4패 10세이브 6홀드 ERA 3.06

기존 커리어하이 시즌이던 2003년을 씹어먹는 성적을 보여주며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한다. 객관적으로 이 성적은 팀의 뒷문을 책임질 마무리 투수라기에 부족하긴 하지만, 동 시기 한화 투수들에게 공평히 적용해야 할 수비 실책으로 인한 스탯상 손해를 감안해야 하고, 아예 마무리 후보가 없던 2010시즌에 팀의 마무리를 책임져주었다는 것은 단순히 스탯상의 수치로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 1년 만에 이렇게 입지가 변한 박정진은 2011시즌에는 전문 마무리 투수로 오넬리 페레즈가 영입되면서 중간계투로 보직을 전환한다. 이후 오넬리가 성적 부진으로 방출되었지만 대체 용병 역시 마무리 데니 바티스타여서 박정진의 보직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믿을만한 중간계투가 전무했기에 시즌 초부터 끝까지 사실상 박정진 혼자서 승리조 중간계투를 책임져야 했다.[4] 이같은 문제가 제대로 드러난 것이 5월 18일 두산 베어스전의 3 1/3이닝 2피안타 무실점 구원승. 그리고 3일 뒤인 5월 21일 기아 타이거즈전에서도 3이닝 무실점.(...) 결국 이후로 구위가 떨어졌다. 그래도 후반기에 바티스타가 합류하면서 소화 이닝이 줄어들어 체력안배에 도움이 되었다.

  • 2011 : 64경기 86이닝 70피안타(6홈런 포함) 31자책점 28볼넷 92탈삼진 7승 6패 7세이브 16홀드 ERA 3.24

2012시즌 초에는 부상으로 몸 상태가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4~5월에 미친듯이 혹사를 당해 말 그대로 난타당하며 무너졌다. 하지만 워낙 투수운용이 최악이어서 팬덤에서는 박정진을 지탄하는 목소리가 별로 없었다. 이후 2군으로 내려갔다 6월에 복귀한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호투를 이어가며 팬들을 감동시켰다. 다만 스탯상으로는 초반에 까먹은게 너무 커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FA로 합류한 송신영이 먹튀화되면서 박정진의 짐을 덜어주지 못한 것, 그리고 바티스타가 시즌 중 선발로 보직전환한 것도 문제였다.

  • 2012 : 63경기 49 1/3이닝 36피안타(4홈런 포함) 30자책점 27볼넷 45탈삼진 4승 4패 3세이브 12홀드 ERA 5.47

2013시즌에는 부상으로 아예 6월까지 등판하지 못하다가 7월 9일 첫 등판에서 1이닝 1탈삼진 퍼펙트 피칭을 보였으나 이후 코칭스태프의 무분별한 기용이 또 다시 문제가 되어 무너졌다. 부상으로 재활하다가 겨우 7월 9일 1군 첫 등판한 투수가 시즌 최종 30경기 21과 2/3이닝을 던졌다. 말이 필요 없다.(...) 그래도 그간의 공로를 감안, 팀은 시즌 종료 후 계약금 3억, 연봉 2억 옵션 1억 총 8억으로 FA 계약을 체결했다.

2014시즌도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 시즌 초 신나게 스탯을 깎아먹다가 시즌 중후반부터 귀신같이 부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무리의 보직을 떠앉는다.(...) 다만 2014시즌에는 윤규진이 1군에 합류하며 박정진의 부담을 덜어주었다는 게 다행스러운 점

  • 2013 : 30경기 21 2/3이닝 17피안타(2홈런 포함) 14자책점 14볼넷 21탈삼진 1승 5패 1세이브 6홀드 ERA 5.82
  • 2014 : 60경기 49 1/3이닝 54피안타(5홈런 포함) 33자책점 25볼넷 51탈삼진 4승 4패 9세이브 7홀드 ERA 6.02

2015시즌에는 김성근 감독의 질타와 격려 속에 한화의 필승조로 우뚝 섰다. 특히 FA로 팀에 합류한 권혁이 마무리 보직을 맡으면서 원래 보직인 중간계투로 던지면서 매우 호투하고 있다. 그러나 선발진이 조기 붕괴하면서 박정진 역시 거의 매일같이 등판하며 2~3이닝을 강요당하고 있다.감독님 저 마흔이에요 ㅠㅠㅠ 덕분에 5월 25일 기준 소화이닝이 벌써 37 1/3이닝으로 이대로 계속 굴리다간 100이닝 돌파가 유력하다.(...) 물론 이번 시즌 후 다시 FA 계약을 해야하고 나이때문에 은퇴가 유력하지만, 마땅한 볼펜이 없는 팀 사정상 1~2년은 더 던져줘야 할 선수다보니 팬들은 혹사 좀 그만두고 관리를 해줬으면 하는 바램.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한화 이글스, 아니 프로야구계의 대표적인 동안이다. 팀에 안승민, 장민재, 송창식으로 대표되는 노안 3총사가 있어서 더더욱 비교된다. 농담아니라 안승민이 아무리 젊게 보아도 30대 후반의 얼굴인데, 박정진은 20대 초반의 앳된 얼굴이다.뱀파이어인가?!
  • 흑역사가 존재하는데,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에 해당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다만 공소시효가 지나 사법처리는 받지 않았고 대신 재검을 통해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 제대 후 성적이 좋지 않을 무렵, 한화 팬덤으로부터 집이 잘 사니 야구도 대충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박정진의 집이 청주에서 상당한 부호라고... 물론 성적이 좋아진 이후론 그런 말은 쏙 들어갔다.

주석[편집 | 원본 편집]

  1. 야구부원 7명이 학교 여선생을 배트로 가격, 기절시킨 후 윤간했다. 야구부는 날아가도 말할 것도 없고, 학교 자체가 개박살날뻔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청주고가 지역 최고 명문고다보니 동문들이 결사적으로 사태를 수습해서 이정도로 그친 것.
  2. 이후 청주고 야구부는 1994년 청주기계공고 야구부로 이어졌고, 청주기계공고 야구부는 2008년 청주고로 넘어가면서 청주고 야구부가 부활하게 된다.
  3. 반대로, 박정진과 달리 진짜로 이때 야구를 접은 학생들도 다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연한게, 고등학교 야구부 1개 학년분 선수들이 졸지에 길을 잃어버린 것이니 배려해주고 싶어도 그만한 자리가 쉽게 나올 수가 없다.
  4. 유원상은 신나게 분식회계나 쳐하다가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되었고, 정재원은 몇 경기 반짝하다 제구가 개판나서 2군으로 내려갔으며, 패전조에서 그나마 공 좀 던지며 기대를 가졌던 최진호는 음주 뺑소니 사고라는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갔다. 송창식은 11시즌 아직 빛을 보기 전이었으며 윤규진은 11시즌 신나게 털리고 5월에 2군으로 내려갔다. 윤근영도 2군에서 몸을 만드는 중이었고 안영명은 몸 상태가 성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