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희 (18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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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元熙. 이명은 박연희(朴延熙).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8년 3월 10일 충청남도 대전군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렸을 때 학교에 보내주지 않으려는 모친에 맞서 단식 투쟁을 벌인 끝에 끝내 학교에 갈 정도로 투쟁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철원보통학교의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일본에 유학하였다. 이때 김사국(金思國)과 결혼한 그녀는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이 주도한 서울청년회계의 청년당대회(靑年黨大會)에 참여하였다.

1923년 김사국이 간도 용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 기관의 파괴를 계획하자 이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귀국 후 1924년 5월 서울에서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를 창립하면서 여성의 권익향상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어 1925년에는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를 주도 조직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부인의 독립과 자유와 모성보호의 실현을 도모하는 조선의 딸들아, 굳세게 뭉치자"고 호소하였다. 경성여자청년회는 일요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실시하는 등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는 중앙여자청년동맹(中央女子靑年同盟)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청소년 남녀의 인신매매 금지, 만 18세 이하 남녀의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직공의 8시간 이상 노동야업 폐지, 무산아동 및 산모의 무료요양소 설립’ 등을 주장하였다. 5월에는 당시의 여성운동가가 총망라되어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할 때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회원모집의 임무를 맡았다. 이후 교양부의 책임자로 계몽강연을 하며 각 지방을 순회하였다. 아울러 동아일보에 논설 등을 발표하며 여성의 사회 의식 향상을 도모하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분규해결에도 힘썼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일을 수행하면서 병을 얻은 그녀는 1928년 1월 15일에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는 1928년 1월 17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34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거행되어 천여 명의 추모객들이 모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박원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2년 그녀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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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