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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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淵世. 창씨명은 신촌연세(新村淵世).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3년 4월 9일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에서 박자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농사를 도우며 인근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다가 군산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전킨(W. M. Junkin)이 세운 영명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이수했다. 이후 그는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에 있는 신명학당에서 한문과 역사를 가르쳤다. 또한 이리 고현교회와 군산 구암교회에 출석, 봉사하였고, 이후엔 모교인 군산 영명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그러던 1919년 2월 26일,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영명학교 출신 제자 김병수(金炳洙)가 찾아와 서울의 만세 운동에 관한 동향을 알리고, 28일 다시 내려와 비밀리에 독립선언문 95매를 전해 주었다. 이에 박연세는 동료 교사 이두열(李斗烈)·김수영(金洙榮) 등과 함께 만세 운동 준비에 돌입하였으나, 거사 전일인 3월 5일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 운동은 그대로 전개되어 3월 20일 1천여 명의 횃불 시위로 이어졌으며, 4월 4일에는 1만여 명이 모인 이리역전 시위로 번져 갔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전북노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진학했으며, 이후 이리 지역의 고현교회와 황등의 동련교회에서 위임목사로 활동하다가 1926년 9월 목포에 있는 양동교회에서 재직하였다.

그러나 1942년 1일 20일, 일본 경찰은 목포지구기독교회 목사로 봉직 중인 박연세를 신사참배를 반대한 불경죄와 보안법 위반 등 각종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후 그는 1년간 미결수 상태로 있다가 1943년 10월 목포지법에서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복심법원으로 넘겨진 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4년 1월 대구복심법원 공판 도중, 재판장 좌승보무(佐勝保戊)가 물었다.

천황 폐하가 높은가, 예수 그리스도가 높은가?

박연세가 답했다.

저는 육체적으로 천황을 존경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존경합니다. 언젠가는 천황도 예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후 1944년 2월 15일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연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