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성

朴汝成. 이명은 박성렬(朴成烈).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0년 9월 30일 충청도 제천군 봉양면 송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진위대에서 근무하다가 1907년 8월 해산된 후 청풍으로 내려와 조동교(趙東敎)·황대성(黃大成)·조동규(趙東奎)·방필성(方必成)·박덕준(朴德峻)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15일 휘하 의병 약 35명과 함께 말안(末安)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제천에서 조우, 4시간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였고 또 야간 포위공격을 가하여 이들을 끝내 충주로 퇴각시켰다. 다음날 일본군이 다시 내습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험지에 복병을 두면서 약한 저항을 하여 영월로 퇴각하는 형세를 보여 일본군을 유인하였다. 이어 이날 밤에 일본군이 민가에 유숙하고 있음을 알고 의병들과 같이 이들을 기습하여 일본군 5명을 사살하고 13명을 부상시켰다. 이에 대해 일본군이 기록한 '조선폭도토벌지'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박여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병사들이 치를 떨었다.

그는 또 원주진위대 참위 출신 양재원(梁在遠) 등과 합세해 인제를 공격, 군청과 주재소, 우편소를 습격하고 친일단체인 일진회원을 응징하는 등 활동을 벌였다. 계봉우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편찬한 '독립신문'에 「의병전(義兵傳)」을 연재하면서, 박여성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기술했다. 그러면서 "일본군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놀라고 낙담하였다고"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박여성은 1908년 10월 13일 충주 하달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전사했다. 그의 묘소는 제천시 봉양면 공전리 장담마을 충주박씨 선산에 안장되었다. 제단에는 그의 이명인 성열(成烈)로 되어 있으며, 부인 파평윤씨와 합장되어 있고 묘소 앞에는 '의사박여성선생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여성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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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