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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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始昌.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3년 11월 5일 경기도 시흥군(현재 서울특별시 금천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생부 박해겸(朴海謙)의 슬하 3남 5녀 중 막내아들이자 다섯째로 출생했고, 유아 시절 한양과 인천 제물포, 경기도 파주, 양주 일대에서 지내기도 했다. 1904년 2월 경기도 시흥에 귀향하여 성장하다가 아버지가 일찍 죽자 1905년 11월 1일 6살 때에 아버지 박해겸의 6촌 형인 박은식에게 입양되었고, 이후 황해도 해주에서 성장했다. 1911년 4월 모친이 사망했고, 5월에는 박은식이 조선을 떠나 만주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 양누이 댁에서 지내야 했던 박시창은 1916년 서울 오성학교를 졸업한 뒤 부친의 지인을 따라 해삼위(海蔘威)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박은식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박시창은 1919년 3월 노령(露領)에서 3.1 운동 소식을 접했고, 얼마 후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같은 해 9월 부친과 함께 하얼빈을 거쳐 상하이로 갔다. 그는 1921년 10월 부친 박은식, 박경산, 박태하, 황훈, 최중호, 김문세, 이영운 등과 함께 <사민보>를 발행했다. 사민보는 배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기사를 게재하며 3만여 부를 발행했고, 그 중 2천여 부는 한국 내로 보내졌다. 박은식은 사민보의 주필을 맡아 항일논설을 게재하고 이순신 전기를 연재했다.

1923년, 박시창은 난징 중앙대학에 입학했지만 몇달 후 휴학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생활고 때문에 학비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조선인청년동맹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25년 11월 부친 박은식이 서거하자 상하이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한 그는 1926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 제5기 포병과에 입교했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개시되자, 그는 국민혁명군 포병대에 편입되어 북벌에 참가했다. 그해 10월 국민혁명군이 우한에 입성한 뒤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가 설립되었다. 그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우한분교에 입학했고 1927년 7월 졸업 후 중국군 장교로 지내는 동시에 한국의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박시창은 우한분교 재학 시절 친분을 맺었던 진공목, 진갑수, 안재환, 김영재, 송욱동, 장기준, 그리고 중국 기술교관으로 있던 백득림, 홍의균, 권준, 전창무, 노세방 등과 같이 무한한인혁명청년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점점 확장되어 후에 의열단 무창지부로 발전했다. 또한 1928년 난징의 군관단(軍官團)에 입대했으며, 1929년에는 국민혁명군 경위군(警衛軍)에서 8년 동안 복무했다. 경위단은 나중에 제 87사단으로 개명되었는데, 제87사단은 당시 국민혁명군 중 손에 꼽히는 정예부대였다. 1932년 일제가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을 때, 박시창은 제 87사단 소속 중대장으로서 참전하여 2달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후퇴했다.

1935년, 박시창은 김구의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 활동에 적극 협력했다. 그는 노태연, 염온동과 함께 낙양에 배치되어 연락원으로 활동하며 그 일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중국군관학교에 입교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독립운동가 최중호의 딸 최윤신과 결혼했고, 이후로도 중국군에 계속 복무하다가 1941년 김홍일과 함께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 육군대학에 입교한 이는 그와 김홍일, 그리고 최용덕 뿐이었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일부가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었을 때,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 역시 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제1지대 장교로 활동했으며,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에 선임되었다. 또한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10월,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그와 문일민을 광복군 참모부 참모로 임명했고, 그는 그해 12월까지 참모로 재직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광복군은 일본군에 동원되었던 한인 청년들을 편입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귀국 후 대한민국 군대의 기초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박시창은 광복군 상하이 잠편지대의 지대장에 임명되어 상하이 및 인근 일대 한인 교포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했고 병사들의 귀국 알선에도 진력했다. 또한 1945년 10월 7일엔 광복군 총사령부 판사처장 김학규와 함께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장군에게 특파단 활동 상황과 일본군에 동원되었던 한인 청년들을 편입시키는 일에 대해 보고했으며, 10월 10일에 상하이 호강대학에 집결한 한인 사병 6천여 명의 사열식을 진행했다.

그러나 광복 후 남한에 설치된 미군정이 광복군이 군대로서 편제를 유지하여 귀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중국 국민정부 역시 1945년 12월 광복군의 확군 활동을 금지했다. 결국 박시창은 장병 및 교민들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서 1946년 7월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후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해 중령 계급을 수여받고 1948년 신설된 제 16연대 연대장을 맡았으며, 1949년에는 제102여단장을 역임했다. 그 후 6.25 전쟁에 참가해 여러 전투에서 국군을 이끌었고,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을 거쳐 1959년 6월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1976년 제5회 광복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1986년 6월 7일 서거했다. 향년 86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박시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며,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헀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