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하 (18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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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相夏(또는 朴尙夏). 영문식 이름은 Sang Ha Park.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1년 7월 20일 충청남도 은진군(현재 논산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하와이로 이주했고, 1907년 호놀룰루에서 김익성 등과 함께 대한제국의 부흥과 한인 교육 장려를 목적으로 전흥협회(電興協會)를 설립하고 전흥협회 기관지인 <전흥협회보> 편집장을 지냈다. 1909년 국민회가 설립되었을 때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서기 겸 재무 책임을 맡았고, 1912년에는 총무로 선출되는 동시에 하와이 지방총회 헌장 기초 위원이 되어 헌장을 기초했다. 그리고 1912년 11월 8일에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1차 회의에서 윤병구와 함께 하와이 대표로 출석했다.

1913년 11월부터 1941년 1월까지 하와이지방총회장을 역임했으며, 이후로는 호놀룰루 한인감독교회 목사를 맡으면서 하와이 한인청년회 이사부 임원 겸 부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하와이 <신한국보>와 <국민보> 주필을 역임했고, 1925년 하와이로 건너온 박용만과 함께 저축회사 설립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사로 활동하며 독립 의연금을 모집했다. 이후 1934년부터 1936년까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 총무를 맡았고, 1934년 11월에는 대조선독립단과 대한인국민회 통합을 주선했으며, 1937년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국민회 대표로서 동지회와 국민회의 합동 운동에 참여했다.

1941년,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에 선출되었고, 1943년 국민회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44년 10월 25일 <국민보> 기사에 ‘애국 동포에게 호소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임시 정부의 군사 활동 지원을 호소했다. 이후 하와이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9년 4월 19일 호놀룰루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박상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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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