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철

朴道哲(또는 朴道喆).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2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4년생이며, 충청북도 진천군 만승면 광혜원리 출신이다. 1919년 4월 3일 충북 진천군 광혜원 장터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6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면사무서와 경찰서를 공격했다. 그는 선두에 서서 경찰서를 습격하다, 일본 헌병대 총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이를 목격한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헌병 주재소를 찾아가 울부짖다가 헌병의 총격에 의해 희생되었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박도철이 피살된 뒤, 유족은 연좌제가 적용되는 걸 피하기 위해 족보를 불태우고 금성군 금왕면 도청리로 이주하여 어렵게 살아갔다. 훗날 박도철의 손자 박영섭 씨는 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을 인정받기 위해 30여 년전부터 관련 자료를 모아 국가보훈처에 신청했지만, 번번이 심사 과정에서 탈락했다. 4.3 시위 당시 피살된 이들 명부에 그의 이름이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독립유공 포상을 포기하다시피했던 2015년 3월, 증손녀 박명현 씨가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증조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순국하셨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당시 일을 증언해주실 분들이 모두 돌아가셔서 독립유공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2019년 1월, 충북 진천향도사연구회 소속 오인근 씨가 이 글을 발견했다. 광혜원 만세 시위 자료를 수집하던 그는 박명현 씨가 박도철의 증손녀라고 생각하여 연락을 취했다. 그후 향토사연구회는 국가기록원의 3·1 운동 피살자 명부와 1919년 일본 헌병대가 남긴 관련 기록 등을 샅샅이 찾아 박도철의 독립운동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관련 자료를 발견한 뒤에도 박도철의 독립유공 포상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박도철의 유족이 족보 등을 태운 탓에, 박도철과 박영섭 씨가 '가족'이란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천향도사연구회는 포기하지 않고 주민들의 증언과 박영섭 씨 부친의 재적 등본 등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그후 2년간 소명과 재신청을 반복한 끝에,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박도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