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바둑
Go Board, Hoge Rielen, BelgiumEdit Fcb981.jpg
바둑판
놀이 정보
장르 보드게임
추상전략 게임
출시일 주나라 (기원전 1046년~기원전 256년)
또는 상나라 (기원전 1600년경~기원전 1046년)
인원 2명

바둑은 정사각형 격자로 된 바둑판에 흑과 백의 바둑돌을 놓는 추상 전략 게임이다. 한국·중국·일본·대만에서 즐기는 보드게임. 서양권에는 일본 쪽 명칭인 이고(囲碁(いご))의 약칭인 (碁, Go)로 통하고 있다.

규칙[편집 | 원본 편집]

상대방 돌을 둘러싸게 되면 상대방의 돌을 들어낸다. 자기 돌이 상대방 돌에 둘러싸인 자리에는 놓을 수 없으나, 상대방의 돌을 따게 되는 경우는 예외이다. 그러나 동형반복을 방지하기 위해 라는 규칙이 있다.

바둑판은 19×19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에서 9개의 점을 정방형으로 찍어 이것을 화점이라고 한다. 각 줄이 교차하는 지점을 '칸'이라고 부르며, 한 대국자의 돌만으로 둘러싸여 있는 칸들을 '집'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 칸에 바둑돌을 두어서 모양을 형성해 집을 가장 많이 만드는 쪽이 승리한다. 돌을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닌 바둑돌로 이루어진 '선'을 그려서 그 선에 있는 자신의 '영역'의 크기를 비교하여 승패를 결정한다. 먼저 두는 흑돌 쪽이 매우 유리하기때문에 맞수끼리의 대국(호선)이라면 흑을 쥔 사람이 백을 쥔 사람한테 6집반(한국, 일본, 대만) 또는 7집반(중국, 대만)의 인센티브를 준다. 이 인센티브를 이라고 한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바둑 두는 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진 일이다.
以奕爲爲之猶賢乎己
공자, 논어

논어》에서 공자가 바둑에 대해 언급한 사료가 남아 있다. 이에 따라 바둑이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중국에서 발명된 것은 확실하다. 주나라로 추정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주나라 이전인 상나라 시절부터 원시적인 바둑이 발명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바둑은 중국에서 발명하여 이미 고조선 시대에 한반도로 전파된 상태였다. 일본에는 늦어도 한국삼국시대에 전파된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일본 쇼쇼인(정창원)에 백제 의자왕이 일본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한테 보내준 목화자단기국(木画紫檀棊局)과 바둑알인 감/홍아발루기자(紺牙撥鏤棊子, 紅牙撥鏤棊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바둑판은 현대의 9화점식이 아닌 16화점식 바둑판이며, 정창원에 남아 있는 해당 기록은 756년 작성되었다.

가장 오래 남아있는 기보는 삼국지에서 손책여범이 둔 대국의 기보라고 알려져있으나, 한국의 문용직 명지대학교 교수(전 한국기원 프로기사)는 해당 기보를 "위작"이라고 단정했다. 실제로 손책과 여범이 둔 기보는 근대 일본 바둑의 형태를 많이 표절한 것으로 보이는 문제점이 있다.

근대 바둑은 일본에서 전국시대가 끝나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이 패전으로 끝난 이후에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을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전복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막부가 당시 일본의 사무라이들을 통제할 수단으로 바둑을 선택한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강력한 비호를 통해 기소(碁所)라는 관청을 통해 혼인보, 이노우에, 야스이, 하야시 4대 바둑 가문을 직접 육성하였다. 이 4대 가문은 이후로도 서로 경쟁하며 연구를 거듭하여 현대 바둑의 기초가 되는 선착 → 벌림 → 중앙 진출, 실리세력의 구분, 포석정석의 성립 등의 현대에도 이어지는 바둑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도쿠가와 막부가 다시 전복되고 메이지 유신으로 정권을 잡은 계층은 전면적으로 기소를 폐지하고, 4대 가문을 해체할 것을 명령하는 등 바둑을 탄압하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들어온 일본 신정부가 바둑을 탄압하자, 혼인보 가문 위주로 기소의 사실상 후신인 일본기원1924년 창설한 것이 본격적인 현대바둑의 시작이다. 일본기원 창설 이후 10여년 간은 고수들간의 10번기 등 이벤트 대국 위주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39년 마이니치신문 주최로 최초의 현대 바둑 기전혼인보전을 창설하면서 본격적으로 현대 바둑대회라는 것이 개최되었다. 혼인보전은 당시 생각시간을 각자 12시간씩 주고 초읽기도 1회당 5분씩 주는 등 파격적인 장고바둑이었다. 그럼에도 혼인보전의 창설로 인해 바둑은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세계화에 대한 준비를 마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인 1953년, 세계 최초의 속기 바둑 기전인 일본 NHK 주관 NHK배 TV 바둑 토너먼트가 창설되면서 속기 기전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8.15 광복에 따라 한국에 돌아온 조남철의 주도로 1945년 11월 3일 한성기원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현대바둑의 시작을 알렸다. 한성기원은 1948년 조선기원으로 확대되고 1949년 대한기원으로 명칭을 바꾼 후 1954년 6·25 전쟁의 휴전에 따라 한국기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현대 한국바둑의 모태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각 지역별로 기원이 따로 성립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마오쩌둥의 탄압과 홍위병들의 학살로 인해 당시 중국의 바둑기사들도 상당수 학살되었고, 중국 바둑은 1980년대 와서야 현대화되기 시작하였다. 지역기원 단위이던 중국 기원들을 통합할 중국바둑협회와 중국기원은 덩샤오핑1991년에 와서야 허가를 내주었고, 이후 중국도 바둑이 발전되었다.

일본이 세계바둑을 주도하는 모양이 되자 친중파 대만인인 잉창치(응창치)는 국제 바둑 기전인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이하 응씨배)의 창립을 선포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일본은 후지쯔를 끌어와서 1988년 응씨배 개최 40일 전 세계 최초의 국제 바둑대회인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이하 후지쯔배)를 창설한다. 후지쯔배와 응씨배의 창설로 본격적으로 바둑의 국제화에 따른 표준적인 생각 시간(2~3시간)이 부여되었다. 중국 주관 바둑대회가 진짜 생긴 것은 사실 한참 이후인 춘란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이하 춘란배, 1998년)까지 가야한다.

제1회 응씨배에 한국에서는 조훈현 九단 한 명만 간신히 초청받아 참가하였고, 이 조훈현이 혈혈단신으로 일본과 중국의 강자를 쓰러뜨리고 제1회 응씨배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한국바둑도 본격적으로 세계 주류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한국에서는 1992년 제3회 동양증권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이하 동양증권배)[1]를 개최하여 한국도 국제 바둑 기전 대열에 합류한다. 이창호 九단이 당시 만 16세 5개월의 나이로 세계 최연소 세계대회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한국 바둑의 1990년대 ~ 2000년대 독주가 시작되었다. 한국은 동양증권배 외에 1996년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 마스터스(이하 삼성화재배), LG배 조선일보 세계기왕전(이하 LG배)를 개최하며 당시 일본 1개(후지쯔배), 중국계 대만 1개(응씨배), 중국 0개(춘란배는 1998년에서야 생긴다)이던 국제 바둑대회 시장에 한국만 3개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단숨에 세계 바둑계의 핵으로 떠올랐다. 반대급부로 일본 바둑은 급속히 몰락하여 자기들만의 모양바둑으로 가버리고, 국제 대회 경쟁력을 상실하여 갈라파고스화로 치닫고 말았다.

이후로는 각 국가의 현황에서 다룬다.

국가별 현황[편집 | 원본 편집]

한국[편집 | 원본 편집]

2018년 한국바둑리그
신진서 九단(좌) vs 신민준 九단(우)

조훈현 九단과 내제자인 이창호 九단이라는 불세출 천재 두 명의 출현으로 1990년대 세계 바둑계를 휩쓸기 시작한 한국 바둑은 전성기를 맞았다. 한국기원의 연구생 시스템이 정착된 이후 기재가 나온 것이다. 이른바 포스트 이창호 세대라는 목진석 九단, 안조영 九단을 시작으로 이세돌 九단, 송아지 삼총사라 불리는 박영훈 九단, 최철한 九단, 원성진 九단이 등장한 것이다. 이외에 백홍석 九단, 조한승 九단, 박정상 九단 등의 기재가 쏟아져나오며 한국 바둑의 전성기는 201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특히 2000년대 초중반부터 이세돌, 박영훈, 최철한, 원성진, 백홍석은 중국 바둑계의 거친 도전을 물리쳐가며 세계 대회 우승을 나눠먹었다.[2] 2000년대까지 세계 바둑을 한국 바둑이 주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출생자들은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으로 한국 바둑의 주도권 상실이라는 결말을 초래하고 말았다. 90년대생 출신으로는 박정환 九단만 후지쯔배, LG배, 몽백합배를 차지하고, 1989년생인 강동윤 九단, 김지석 九단이 각각 후지쯔배, LG배(강동윤)와 삼성화재배(김지석)을 한 것이 그 뿐이다. 박정환 이후 세대는 안타깝게도 세계대회에서 중국 기사들에 막혀 탈락하는 경우가 잦아 한국 바둑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2016년 이세돌 九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국 이벤트로 인해 바둑TV 시청률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는 등 바닥을 다지는 조짐이긴 하지만 기재는 나오지 않고, 한국 바둑이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한국 바둑 국내대회는 2016년부로 거의 다 전면 폐지되어버렸다. 국수전, 명인전 등 기초 대회 자체가 사라졌다. 이로 인해 이후 세대들은 바둑대회 경험을 쌓기 어려워져 더욱 세계대회에서도 경쟁력이 약화되는 악순환을 반복중이다.

다행히 2010년대 중후반부터 바둑 인공지능을 빠르게 흡수한 신진서 九단이란 걸출한 천재가 등장해 세계대회를 휩쓸고 있으며, 기존 강자인 박정환 九단, 신진서의 입단동기인 변상일 九단 등 강한 기사들이 계속해서 활약하고 있어 한국 바둑이 전성기를 달리고 있다.

여자바둑의 경우엔 최정 九단과 오유진 九단 등이 2010년대 중반부터 국제무대에서 꾸준히 좋은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편집 | 원본 편집]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쳐서 세계 바둑계의 주도권을 상실한 일본 바둑은 국제 경쟁력을 상실한 채 그들만의 리그, 갈라파고스화로 치닫고 말았다. 한국과 중국의 주도적인 바둑 풍조 대신 자신들의 모양바둑 위주의 바둑을 고집하고, 대부분의 국제 바둑 기전이 제한시간을 2~3시간으로 맞추며 스피드 바둑화를 꾀하는 중인데 반해 일본내 기전들은 최소 4시간 / 대삼관(큰 기성/명인/혼인보) 기전은 8시간이 주어져 봉수를 통한 초장고바둑을 고집하는 것이다. 국제기전과 동떨어진 국내 바둑 기전의 틀을 전면 교체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니 일본 출신 기사들이 스피드 바둑에서 맥을 못추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며, 속기파인 이치리키 료 九단과 중국식 수읽기 바둑을 구사하는 이야마 유타 九단 정도를 빼면 세계대회에서 상위권 성적을 내는 일본 기사는 없다시피 하다.

일본기원은 게다가 일본 바둑의 강한 기사들이 자꾸 세계 바둑대회에서 떨어지자 발을 빼버린 후지쯔배, 도요타덴소배의 폐지를 방관했으며, 이후로도 국제 메이저 바둑 기전을 개최할 의사가 없다.

그럼에도 일단 기성전의 우승상금이 4500만 엔, 대국료까지 5000만 엔으로 최대 우승상금 국제대회 응씨배(우승상금 40만 달러)보다도 큰 점은 위안거리이지만, 그나마도 계속해서 상금이 감소하고 대회가 사라지는 등 앞날이 밝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여자바둑의 경우엔 사정이 약간은 나은데, 후지사와 리나 & 우에노 아사미 등 세계대회에서 꾸준히 활약해주는 기사들이 있다. 준결승~결승 즈음엔 한국과 중국 여자기사들에게 밀리기 일쑤지만, 8~16강 안에는 은근히 자주 들어가는 편.

참고로 일본기원이 개혁을 안하려고 한 건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원로 바둑인 가토 마사오 九단이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인재 육성을 위한 혁신안을 추진했는데,[3] 2004년 뇌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거의 대부분 휴지조각으로 전락했고 이를 기점으로 갈라파고스화가 가속화 되어 현재에 이리고 있는 것.

중국[편집 | 원본 편집]

2016년 아함동산배
구리 九단(좌) vs 미위팅 九단(우)

1990년대, 2000년대 모두 한국 바둑에 밀려있던 중국 바둑은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바둑을 밀어주고 중국의 13억 인구의 힘으로 인해전술을 펼치고 있다. 이에 2010년대에는 완전히 세계 바둑의 주도권을 한국으로부터 빼앗았으며, 국제 바둑 기전 우승은 중국 기사들의 잔치가 되어가고 있다.

2000년대에는 구리 九단이 이세돌 九단과의 라이벌 매치를 수없이 하면서 중국 바둑계를 이끌어왔다. 하지만 2010년대에 중국의 바둑 스타는 단연 커제 九단[4]이다. 커제는 바둑 실력도 최상급이지만 특유의 연예인급 센스로 팬들과의 소통이나 언론 인터뷰를 자신의 주목에 맞게 끌어오는 법 등 스타성을 크게 높였다. 커제 뒤로 탕웨이싱 九단, 천야오예 九단, 저우루이양 九단, 탄샤오 九단, 미위팅 九단, 스웨 九단, 롄샤오 九단, 구쯔하오 九단, 셰얼하오 九단 등 세계대회급 커리어의 수많은 기재들이 쏟아져나와서 더 이상 물량을 버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2010년대 중국 바둑이 세계를 주도하게 되자 몽백합배, 바이링배, 천부은행배 등 바둑 세계대회를 줄줄이 쏟아내고 있다. 이들 홈에서 개최되는 세계대회의 위력은 굉장해서, 더 많은 바둑인구들이 몰리게 하고 있다. 바둑 인공지능이 대세가 된 2010년대 중후반 이후론 한국이 무섭게 치고 올라와 양강구도를 형성중에 있다.

여자바둑의 경우에도 한국과 함께 세계대회를 양분하고 있으며, 특히 위즈잉 七단이 최강자로 불린다.

대만[편집 | 원본 편집]

2017년 기왕전
린쥔옌 七단(좌) - 왕위안쥔 八단(우)

대만 출신의 실력파 기사들은 꾸준히 나오곤 있으나 내부 파벌싸움 문제로 병든지 오래라 세계 바둑계에서 한 발짝 소외된 것이 현실. 이 때문에 대만의 유력한 바둑 인재들은 대만 바둑협회가 아닌 일본기원을 통해 입단하여 자국의 바둑 팜(Farm)이 더욱 말라가는 원인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장쉬, 위정치, 쉬자위안 등.

대만 바둑계 파벌싸움을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대만기원해봉기원이 주도권을 놓고 한참 싸우는 바람에 1990년대 중반 아예 대만의 모든 바둑 대회가 5~6년간 전면 중단되고 재건되지 못하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다. 결국 2000년 신 대만기원을 세우고 대만기원, 해봉기원이 지부로 격하되는 방식으로 갈등이 봉합되나 싶더니 저우쥔쉰 九단의 처우 문제를 두고 대만기원(지부)이 저우쥔쉰을 제명하고 해봉기원에 입적하는 등 치명적인 갈등이 여럿 터져나왔다.

2006년 저우쥔쉰 九단이 대만기원 소속 기사로는 처음으로 LG배 조선일보 세계기왕전을 우승함으로써 전 세계를 뒤집어놨다. 저우쥔쉰 九단은 얼굴에 특이한 붉은 반점(홍반)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동료 학생들한테서 왕따구타를 당하는 등 수난을 당했으나, 바둑에 더욱 몰입하여 결국 바둑계를 뒤엎어놨다.

2010년대에는 대만에서도 유력한 기재가 별로 나오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왕위안쥔 八단, 린쥔옌 七단, 천스위안 九단 등이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 정도.

그러나 대만 소속 여자 바둑기사는 실력이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 스타가 있다. 대만-호주 이중국적헤이자자 七단이 그 주인공. 헤이자자 七단은 바둑기사로 입단했지만 본업이 모델에 가까운 기사로, 세계 여자 바둑계에서 이름난 절세 미인이다. 아예 바둑기사로는 전무후무하게 연예 기획사에도 소속되어 스케줄을 조정하는 등 말 그대로 완전히 연예인. 그 외에 쑤성팡 三단, 위리쥔 二단 등 대만의 여자 기사들은 상대적으로 외모로 인해 더욱 주목받아 대만 바둑계의 후원을 유치하는 등 화제거리를 몰고가고 있다.

유럽[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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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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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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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기전[편집 | 원본 편집]

국제기전[편집 | 원본 편집]

  •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
  • 천부은행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
  •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 마스터스
  • LG배 조선일보 세계기왕전
  • 바이링배 세계바둑오픈
  • Mlily 몽백합배 세계 바둑 오픈전
  • 춘란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 농심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동양증권배 1, 2회 대회는 한국 국내대회에다가 일본 기사 1명을 초청한 대회였기때문에 국제기전으로 인정이 거부된다. 1992년 제3회 동양증권배부터 국제대회로 공인하고 있다.
  2. 이세돌: 후지쯔배, 삼성화재배, LG배, 도요타덴소배, BC카드배, 춘란배, 박영훈: 후지쯔배, 중환배, 최철한: 응씨배, 중환배, 원성진: 삼성화재배, 백홍석: BC카드배, 박정상: 후지쯔배
  3. 대표적으로 프로들이 단수를 올릴 수 있는 건 승단전이란 대회를 통해서만 가능했는데, 이걸 폐지했다. 그리고 일본내 기전을 외국기사들에게 오픈하려고 했으나 무산.
  4. 커제: 몽백합배, 신아오배, 바이링배, 삼성화재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