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창식 (1899년)

민창식 (1899년).PNG

閔昌植. 이명은 김무, 박무, 쥬라블레프.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9년 9월 21일 한성부 북부 안국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동학교에서 수학한 후 대동인쇄사와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의 신문사 인쇄직공으로 일했으며, 1920년대에 연우사(鉛友社) 동인,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회원, 혁청당(革靑黨) 당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공산주의 단체인 화요회 회원이 된 그는 1925년 서울에서 경성인쇄직공조합(京城印刷職工組合)을 결성하고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인쇄직공 등의 노동자 권익 확보를 위해 힘쓰며 대동인쇄주식회사(大東印刷株式會社)·창신인쇄주식회사(倉新印刷株式會社) 파업 등에 참여했다.

당시 대동인쇄주식회사의 직공 파업은 인쇄소 직공들의 불합리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일어난 것으로, 회사 측은 직공 측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해놓고는 오히려 주모자 등을 해고하였다. 이에 직공들은 다시 들고 일어났고, 민창식은 직공들과 함께 동맹 휴업을 벌이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부산직공파업 때에도 이를 원조하고자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을 강연하기도 했다. 한편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한 민창식은 활동범위를 넓혀 청년운동 및 사회주의 활동을 벌여 나갔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 위원으로 인쇄직공조합이 설치된 경성부 제2구 제1야체이카의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6.10 만세운동 당시 격문의 인쇄와 배포를 담당한 그는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하도록 하기 위해 원산과 평양 등지에서 선전문을 배포했다. 그러나 거사 전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고,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자택에서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1938년 4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민창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독립유공자 공훈록[1]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