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립대학 설립운동

  • 民立大學設立運動

개요[편집 | 원본 편집]

1919년 3.1 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할 당시 우리 민족의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일어난 일종의 문화운동이며 민족운동이다.

경과[편집 | 원본 편집]

1920년 6월에 월남 이상재와 한구설, 윤치소등을 비롯한 인사 100명이 조선교육회설립발기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된 운동으로, 1922년,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결성하게 된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총회를 사흘에 걸쳐서 개최하였으며, 자금을 모으고,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게 된다.

이후 각 지역에서 대학 설립에서 모금을 하여 대학 설립 자금을 모으고, 대학 설립 요건을 거의 다 충족하여서 일제에 대학 설립 허가를 요청하게 된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운동의 경과를 지켜본 일본 입장에서는 이 운동이 상당한 열기를 가지게 되자 이를 단순한 교육운동이 아닌 정치운동으로 판단하고 탄압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은 담당 공무원의 뭉개기(...)였다. 대학 설립 요건을 모두 다 갖춰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서류 접수만 해 놓고 일을 진행시키지 않는 것. 어째 예나 지금이나... 그러나 지속적으로 서류를 접수하자 이러한 방법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일종의 꼼수를 쓰게 된다. 그것은 그냥 대학 설립은 불가하고 일본 본토의 대학의 분교로 조선 내에 대학을 설립하여야 한다고 한 것. 이에 도요대학의 분교로 발족하는 것 까지 수락을 하자, 일제는 일본의 대학 관련 법령인 대학령에 분교 설치에 관한 조약이 없다는 이유로 설립을 거부한다 장난하냐 이러면서 일본은 우선 기존에 있던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먼저 조선의과대학으로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해당 운동을 중단할 압력을 넣으며, 만일 대학을 설립할 것이면 조선인 학생 이외에 일본인 학생들도 입학시켜야 한다고 압박하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는 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게 되는데, 이는 이미 국가에서 대학을 세웠으니 더 이상 대학설립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하지 말라는 입장을 표하기 위한 것. 실제로 1922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게 되는데, 여기에 따라서 1924년 경성제국대학관제를 발표하고,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게 된다. 이후 일제는 민립대학운동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여 민립대학설립기성회를 해산시키게 된다.

이후[편집 | 원본 편집]

  • 경성제국대학 설립 이후 기독교계통의 학교인 이화학당이 연합기독교여자대학으로 승격운동을 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교, 협성신학교가 연합하여서 종합대학 설립운동을 벌였으나 좌절된다.
  • 1926년 3월에 서울의 유지들이 모여서 다시 민립대학을 설립하고자 추진을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된다. 이 당시 중앙집행위원장이었던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확장하여 농과대학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하필 그 해에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서 민종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해지는 바람에 실패하게 된다.
  • 1931년 민립대학기성회의 자금을 관리하던 인촌 김성수는 독자적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총독부에서는 한국인에 의한 대학설립은 불가하다는 기본방침을 확인한 뒤,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게 된다. 이후 1940년 보성전문학교의 대학 승격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게 된다.
  •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한반도에는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 이외에는 단 한 개의 민립 또는 사립대학도 설립되지 못하게 된다. 해방 이후에는 경성제국대학이 1945년 11월에 국립대학교의 설치를 요청하면서 1946년에 서울대학교로 재개교하면서 대한민국의 국립대학 역사가 시작되게 된다. 이후 이전의 사립전문학교들이 미군정에 대학 승격을 요구, 승인을 받으면서 대학으로 승격이 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