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멕시코 전쟁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미국멕시코 양국 사이에서 전개된 전쟁. 남북전쟁과 함께 현대 미국을 만든 중요한 전쟁으로, 당장 현재 미국 영토의 국경선은 사실상 이때 확립됐으며 미국이 본토에서 치른 마지막 전쟁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신생 멕시코 공화국의 텍사스 지역 미국계 거류민 문제로 발발한 텍사스 독립 전쟁은 텍사스측의 불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멕시코 정부는 공식적으로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현실적 상황은 이와 별개로 진행되었으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열강들도 신생 텍사스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했다.[1] 멕시코는 국경 지대에서 지속적으로 텍사스와 긴장관계를 유지했지만, 사실상 텍사스의 독립과 존속을 유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문제는 텍사스가 독립국가로 존속할 역량이 부족했다는 데 있었다. 영토는 넓었지만 그에 비하면 인구도 부족했고 경제력은 더더욱 열악했다. 무엇보다 텍사스 공화국의 국민 대다수가 미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기에 독립국가 텍사스의 존속에 열의가 없었다. 텍사스 공화국 수립 이후 독립국가 유지파와 미 연방 합류파의 갈등은 계속되었지만 최종적으로 합류파가 승리하여 미국 정부에 합병을 요청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팽창론자, 호전론자, 강경론자가 득세하고 있었다. 이들은 텍사스의 연방 합류는 당연하고, 멕시코 영토긴 하지만 거류민이 얼마 안 되는 켈리포니아 일대까지 모조리 미국 영토로 두어 태평양 출구를 확보하길 희망했다. 당장 대통령 제임스 포크가 이런 강경론자였다. 당연히 미국은 텍사스의 합류 요청을 승낙했고 멕시코는 이에 반발했다.

멕시코로선 미국이 일방적으로 자국의 반란군이 점거한 지역을 강점한 것에 대한 공식적 분노와 함께,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했던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텍사스 흡수를 계기로 거대해지는 것을 용인하기 어려웠다. 독립한 지 30년도 채 되지 않은 멕시코로선 북방의 이웃나라가 거대해지면, 국가기반이 확실히 다져지지 않은 자국의 주권과 이득이 크게 침해되리라 본 것이다. 당장 미국 내부에서 태평양 진출론이 나오는 와중이니 멕시코로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캘리포니아 영유권은 법적으로만 멕시코에 있을 뿐, 몇몇 정착지를 제외하면 확실히 관리되는 것도 아니었다.[2]

이에 멕시코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며 항의했지만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멕시코와 텍사스의 경계선인 리오그란데 강에 병력을 결집시키며 도발했다. 멕시코는 리오그란데 강보다 북쪽인 누에시스 강을 국경으로 하자고 주장했으나 미국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1846년 4월 25일, 멕시코군은 리오그란데 강 주변에서 작전 중이던 미군을 공격, 격퇴했고 미국 정부는 이를 도발이라고 규정하고 멕시코에 선전포고한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전쟁이 일어나긴 했지만 멕시코군은 공세로 나설 역량이 되지 않았고, 미군이 오히려 캘리포니아 일대에 전면적인 공세를 단행했다. 개전 후 3달이 지난 7월 7일, 대서양에서 출발한 미 함대가 캘리포니아 앞바다에 출현, 몬테레이에 지상군을 상륙시켰고, 동시에 로키 산맥을 가로지른 미 본토의 병력이 협격을 가하며 캘리포니아의 요새들을 포위, 1846년이면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전면적인 승리를 굳혔다. 멕시코군은 반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무위에 그쳤다. 동시에 미 해군은 멕시코의 서해안(태평양 연안)에서 활발한 통상 파괴전을 개시하여 멕시코의 연안해운을 마비시켰다.

그러나 멕시코가 항전의지를 굽히지 않자 미국 정부는 멕시코 본토에 대한 공세를 결의, 1847년을 기해 제2차 공세를 개시했다. 미군은 총 3개의 공격루트를 선정했다.

  • 1. 뉴멕시코 방면에서 엘파소를 거쳐 남하, 새크라멘토 전투에서 승리한 후 2번 군과 합류
  • 2. 텍사스 방면에서 리오그란데 강을 넘어 몬테레이를 함락하고 산타 안나의 멕시코 중앙군을 격파. 1번 군과 합류한 후 멕시코시티로 진격
  • 3. 뉴올리언스에서 출항하여 해로로 멕시코 만 남단의 후방인 베라크루스에 상륙, 수비대를 격파하고 텅 빈 남쪽을 통해 멕시코시티로 진격

무늬뿐인 해군만 있던 멕시코군은 미군의 후방상륙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수도가 남북으로 협격당했고, 주전선의 주력부대는 투입 족족 개박살나며 후퇴를 거듭했다. 9월 13일, 멕시코군은 수도를 지키기 위해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인 3,400여 명을 투입하여 차폴페텍 전투를 치뤘으나 질적 열세 속에 3,000여명이 죽거나 다치고 사상자 포함 800여 명을 포로로 잡히는 회복불능의 패배를 입었으며 멕시코 시티는 미군에게 함락되었다. 이후로도 산발적으로 멕시코군이 반격했으나 모조리 격퇴당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산타 안나에 의한 9월 말 반격작전으로, 미 상륙군의 모항 베라크루스와 멕시코 시티 사이의 연결을 차단하려는 시도였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수도 함락, 주력부대의 괴멸, 모든 반격의 실패라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멕시코의 패전은 기정사실화되었다. 마침내 멕시코는 미국이 제의한 협상안을 수락하였고, 전쟁을 끝낸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1848년 2월 과달루페 이달고 협정이 체결되면서 멕시코는 텍사스 공화국의 미국 연방 합류를 인정하고 멕시코의 북부 영토를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강매해야 했다.[3] 참고로 이 조약으로 사들인 영토는 현재의 캘리포니아, 유타, 네바다, 애리조나의 거의 대부분과 뉴멕시코콜로라도, 와이오밍의 일부 등 약 136만㎢에 달한다. 부채탕감분까지 포함해서 보더라도 1㎢당 13.4$라는 역대급 헐값의 국가단위 부동산 매입이었던 셈이다. 참고로 이 면적은 현재 멕시코 영토 면적 전체와 비슷한 수준이다(...)

  • 미국

미국에게 이 전쟁의 승리는 단순한 영토 획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1840년대 미국은 이미 유럽 이민자의 증가로 더 이상 이주민들에게 헐값에 불하할 서부 무주지가 없는 지경이었다. 이는 곧 이민자의 감소와 이로 인한 국가성장동력의 상실을 의미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해 미국은 쏟아지는 유럽 이민자들에게 서부 영토를 마음껏 불하하기 시작했고, 미국 개척이민자들은 순식간에 태평양의 캘리포니아까지 우글거리게 된다. 단, 새로 얻은 영토에 대한 노예주/자유주 문제를 두고 남부와 북부의 갈등이 심화되는 문제도 있었고 이는 남북전쟁의 계기 중 하나가 된다. 아울러 태평양 출구를 확보하게 되면서 대서양-태평양 양 대양을 접하는 진정한 해양국가로 발돋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훗날의 일이지만 캘리포니아에선 금땡이(...)가, 텍사스에선 원유가 콸콸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 멕시코

사실 멕시코에게 영토 상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장기적으론 멕시코의 성장에 커다란 지장을 준 영토상실이었지만 당시 기준으로 멕시코는 충분한 개척이민자 확보 실패로 인해 북부 영토의 유지가 어려웠고, 이 문제로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면서도 계속 수세에 내몰려, 멕시코 본토와 북부 영토의 연결선이 이들의 공세로 차단될 지경에 이룰 지경이었다. 멕시코에게 진짜 큰 타격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수립이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과의 가장 큰 차이점인데, 패전과 함께 독재권력을 행사하던 산타 안나의 실각은 멕시코 정치를 혼돈 속으로 빠트렸고 이후로 강력한 리더십의 정부가 들어서지 못했다. 멕시코 정부는 지방을 통제하지 못했고, 이는 이후 내전, 치안악화 등을 불러일으키며 멕시코를 이류국가에 머물게끔 하였다.

  • 아메리카 원주민

멕시코에 묻힌 이 전쟁 최대의 피해자. 원주민 세력은 기존 멕시코 세력과의 충돌에서 계속 우위를 점하며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그러나 멕시코를 패퇴시킨 제3세력 미국이 등장하고, 미군과 엄청난 숫자의 유럽 이민자들이 서부로 몰려오면서 원주민 세력은 순식간에 쇠락했다. 대대적인 미국의 서부진출에 총력을 다해 저항하였으나 미국은 철도를 깔고 전신주를 부설하며 군대를 내보냈고, 이민자들은 꾸역꾸역 밀려오며 땅을 개간하고 들소를 사냥했다. 그렇게 원주민들은 미국과의 오랜 투쟁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만다.

각주

  1. 유럽의 경우,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미국에 흡수되어 미국이 거대해지는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이 우려는 현실화된다.
  2. 당장 캘리포니아의 경우 공식적으로 스페인 영토이던 18세기 후반, 러시아 세력이 남하하여 요새를 세우고 영토로 선포한 적도 있었다. 관리능력 부족으로 스스로 철수하긴 했지만 그만큼 힘의 공백이 있었던 것이다.
  3. 정확히는 미국이 전쟁으로 끼친 손해배상금 명목으로 건낸 1,500만 달러와 기존에 멕시코의 대미 부채 325만달러의 탕감이었다. 다해봐야 1825만달러가 전부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