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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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錫鳳. 자는 이필(而弼), 호는 의산(義山, 義産), 본명은 문봉각(文鳳珏).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최초로 을미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51년 12월 24일 경상도 현풍현 현내면 상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상리)에서 부친 문하규(文夏奎)와 어머니 경주 이씨 이후근(李厚根)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남평 문씨로, 11대조 문세근(文世根)이 경상도 대구군(현 대구광역시)으로 처음 이사와 살게 되었지만 이후로 관직에 진출한 이가 드물었고, 그나마 문석봉의 9대조 문영남(文榮南)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격파한 공로로 선략장군(宣略將軍:종4품 품계) 행(行)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종8품)의 직임을 받았을 뿐이다.

이렇듯 한미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줬다. 문석봉의 문집 <의산유고(義山遺稿)>에 따르면, 그는 12살 때인 1861년 죽궁을 가지고 소뿔을 쏴 어김없이 맞혔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어사 김화영이 술사 이성구를 보내 그에게 육도삼략을 비롯한 병서를 수학하게 했다. 문석봉은 1870년에 이성구와 함께 '고견암'이라는 암자에 기거하면서 3년간 무술을 익혔다. <의산유고>에 따르면, 그는 이후 2년간 두문불출하며 주역을 탐독했고, 1875년에는 중국의 금릉으로 건너가 왕희주에게 침술을 비롯한 한의학을 3년간 수학했다고 한다.

문석봉은 32세 때인 1882년 조운리(漕運吏)를 맡아 전라도 지역의 세곡을 조운선으로 서울까지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가 세곡을 싣고 목포-무안 사이를 지날 때 전라도 지역의 기근 상태를 보고 곡식을 풀어 기민들에게 나누어 주자, 정부에서 체포령을 내렸다. <의산유고>에 따르면, 문석봉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라를 속인 것은 죄이나 이 백성들은 어찌 나라 사람이 아니겠는가. 쌀을 중히 여겨 백성을 버리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

그 후 집안 일을 친구인 김수영에게 맡기고 방장산 속으로 들어간 문석봉은 1891년 고향의 수문동에서 친척인 문용현과 함께 영파재(映波齋)를 지어 빈민 자제 50여명에게 한학을 교육시켰다. 이때 현풍군수 윤병(尹秉)은 비적의 방어를 위하여 그에게 군내 순찰의 임무를 맡겼다. 문석봉은 윤병이 과천군수로 옮겼을 때 그의 책실로 수행한뒤 포군장이 되었고, 1893년 5월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문석봉은 곧 경복궁오위장에 특제되었으며, 그해 12월에는 진잠 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3월 모친상을 당해 집으로 돌아갔다.

1894년 11월 문석봉은 양호소모사의 직에 임명되어 공주부에서 근무케 되었다. 이때는 동학농민군이 득세하던 시기였으며 충청 지역 중에서는 그가 현감으로 재직하였던 공주부 지역이 특히 심하였다. 문석봉의 소모진은 11월 18일 조직되었으며, 11월 29일 간부를 임명한 듯하다. 그는 12월 2일 과천을 출발하여 12월 7일 공주감영에 도착했다. 소모사 문석봉의 첫 임무는 진잠의 동학접주 박만종(朴萬宗)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그는 12월 11일에 출진해 그날 밤 박만종을 체포했고, 이후 박만종을 회유해 최시형을 체포하고자 그를 풀어줬다가 박만종이 도망치자 다시 체포했다.

문석봉은 여세를 몰아 연산, 은진, 진산, 여산, 청산, 보은 등지에 수차례 출정해 동학군을 연이어 격파했다. 특히 1895년 1월 24일부터 28일까지 전개된 연산에서의 동학군과의 전투는 그의 가장 큰 공적이었다. 그는 최사문(崔士文), 최공우(崔公友) 등이 이끄는 1천여 명의 동학군을 공격해 다수를 참하고 40여 명을 체포했으며 투항병 400여 명을 확보하고 동학두령도 5명이 귀화해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의산유고>에 따르면, 문석봉은 소모사로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귀선대부에 특승되고 3대가 추증되는 영예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신년군공록>에는 문석봉의 이름이 없다. 한편 연산을 비롯한 인근 6읍의 주민들이 진잠 지역에 <양호소모사문공석봉명찰선정비>를 세워 그의 공을 기렸다.

문공의 혜택은 옛 사람에 뒤지지 않으며, 덕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성망이 온 나라에 퍼졌으며, 청렴 정직함은 이 세상에서도 유일하다. 근실하고 힘을 들여 정치를 함은 예전에 보지 못하던 바라.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것을 위주로 함에 있어서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잔민을 사랑하고 구휼하니 만인이 비석을 세워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죽은 뒤에라도 은혜를 갚고자 한다. 나라에 충성하니 모든이가 다 칭송한다.

- 양호소모사문공석봉명찰선정비

문석봉은 소모사로써 동학농민군을 '동적(東賊)'이라고 표현하는 등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학에 대한 지나친 탄압은 반대했다. 그가 관영에 보낸 장계에는 그의 이같은 태도가 담겨 있다.

이제 들으니, 금산에 사는 김준영(金俊榮)이 동적에 욕을 당한 일로 그 원한을 이기지 못하여 향민을 모집하여 칭하기를 '의병'이라 하고 '민중'을 다살(多殺)함에 옥천 등지에까지 미친다 합니다. 준영의 이 거병은 가히 '분병(忿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원한을 보복함에 미쳐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이에 옥천 주민들은 역시 '의병'이라 칭하고 통문을 전문에 발송하고 밤에 침입하여 준영을 공격한다 선언함에 비류의 여당이 또한 많이 붙어 그 세력이 치열하니 진실로 놀랍고 통탄할 일입니다. 서로 그르고 옳다고 하니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수괴가 주륙되었고 잔당도 다 해산되었으니 마땅히 각자 편안히 받아들여 이러한 것을 하지 말아야 함에도 다시 서로 군사를 일으켜 도륙하니 슬픕니다. 과연 이것이 '의(義)'입니까, '가의(假義)'입니까?

- 의산유고

공주부에서는 문석봉을 신영 영장에 임명하여 공주부에 근무케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진잠, 연산, 은진의 유생들은 순영과 통리아문에 문석봉 부대를 “인의의 부대”라고 칭송하면서 아직 동학의 잔당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신영으로 부대를 철수케 되면 동학군이 반드시 무리를 지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며, 이는 국가는 물론 백성들이 우려하는 바니 그 해를 제거케 해야 함을 청했다. 그러나 관찰사 박제순은 오히려 문석봉의 신영 근무를 재촉하는 명령을 내렸으며, 결국 1895년 2월초에 신영 영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석봉은 공주부에 구금되었다. 그가 공주의 관병 400명에게 소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히고 신식훈련을 시킨 것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치는 계획이라는 김재수의 고발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서울 경무청에 구금된 그는 경무사 이윤용으로부터 2회에 걸친 공초를 받았다.

이윤용: 너는 능히 일본을 적대할 수 있느냐.


문석봉: 일본인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누구인가. 일본에만 사람이 있고 우리 나라에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우리 태조 이래 5백년간 내려온 조종 사직을 어찌 쉽게 두 손을 들어 오랑캐에게 바친단 말인가. 이를 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그만 둘 것이나, 할 수 있은 즉 신하된 자로서 어찌 한번 죽음을 애석히 여겨 국망을 좌시하겠는가. 통곡하고 통곡할 일이다.

- 의산유고

경무청은 이 사건에 대해 법부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 공주에 거주하는 김재수가 밀고하기를, 공주의 전 감사 조상희, 사인 김문주, 연산사인 조익중과 호서소모관 문석봉 등이 흉패한 일을 꾸미려고 하는 뜻이 있다고 함에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여 바로 순검 8인을 파견하여 조상희, 조익중, 문석봉과 식주 이정삼을 체포하였다. 엄히 심문한 바, 조상희가 인심을 선동하고 함부로 의병을 일으킨다고 말하며 모반하기를 나라에까지 미치니 그 마음이 실로 흉악하다. 갑사를 모으고 무기를 사고 갑옷을 제조하여 개화당을 터멸한다는 말이 있다. 김재수의 말을 믿을 증거는 없으나 그들이 주문을 외우고 기도하여 하늘에 고하고 땅에 재사지내어 가로되, '조화정도계룡(趙化鄭都鷄龍: 조씨가 정씨가 되어 계룡산을 도읍지로 삼는다)'이라 한다. 조익중 또한 그러하다. 문석봉은 타인의 사주를 받아 군사 모을 것을 갈구하고 의리에 의지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다 하니, 그가 김문주, 조익중의 감언이설을 어찌 기다리겠는가. 식주인 이정삼은 비록 김문주, 조상희와 접촉하였으나 그 연유는 모른다 한다.

이후 그는 실형을 받고 6월 21일에 석방되었지만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격노해 친구 엄진섭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성모께서 변을 만남은 실로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大變)이고 신하로서 모두 통분하는 바이다. 그러나 아직도 복수를 하지 못하니 뜨거운 피가 뱃속에 가득 차 그대로 참을 수 없어 처자와 영결하고 대의를 일으켜 흉적을 토벌하고자 한다. 자식들을 형께 보내 부탁하니 살펴주기 바라오.

문석봉이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동기는 명성황후가 비참하게 살해된 것에 대한 복수심 외에도 개화론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다. 그는 양호소모사로 재직중일 때 옛 관복을 입다가 관찰사에게 "그대가 지금 흑의를 입지 않았으니 적이 달아나 숨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 위무하고 겸하게 따르게 할 것인가."라고 질책을 받았고, 정부의 '변복령'에 대해 "동방에 다시 옛 의관을 회복할 길 없네."라고 탄식했으며, 단발령에 대해서도 반감을 드러내는 시를 지었다. 이렇듯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개화 정권에 대한 강력한 반감을 가진 그는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물리치고 개화정책을 뒤엎어 유교 질서를 회복시키려 했다.

문석봉은 9월 초 서울에 올라가 민영환 등 중신들을 만나 거의(擧義)의 뜻을 밝히고 대전으로 내려와 9월 18일 충청도 유성 장터에서 의병을 집결했다. 그보다 전, 을미사변 때 일본군에 가담하여 명성황후 암살에 일조한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은 문석봉이 봉기하기 직전인 9월 13일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격려했다.

신민이 복을 받지 못함에 이런 대변을 만나니 너른 하늘 아래 누가 통곡치 않으리오. 지난번 뵙고 난 후 혼자 원통함만 품고 있을 뿐이더니 이번 편지에 계율의 뜻이 강개하고 명확하니 한편으로 무릎을 칠듯이 탄복할 뿐입니다. 성은을 모두 같이 받고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음은 하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요, 또 하나는 신민의 원한을 설욕하고자 함입니다. 원컨대 영감께서는 현명하고 어진 선비를 모아 거의의 참뜻을 믿게 하여 대사를 이루기를 축원합니다.

- 의산유고

문석봉은 의병을 일으킨 뒤 선봉장에 김문주, 중군장에 오형덕, 군향장에 송도순을 임명했다. 김문주는 공주 출신의 유학으로 문석봉과는 소모군 때부터 참모사로 동고동락했으며 지난 2월 1차 의병 때도 같이 거의를 공모하여 체포되었던 동지였다. 오형덕은 옥천 출신의 유학자로 역시 문석봉이 양호소모사로 재직 시 휘하에서 중군장으로 참여하였던 인물이다. 송도순송준길의 10대손으로, 1874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1893년 이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1894년 봄 사헌부 대사헌과 승정원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받지 않고 낙향한 인물이다. 이들 외에 문석봉 의병에 참여한 인사로 진사 김종률과 영장 최은동, 김성의 등이 확인된다. 김성의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인 송애 김경여의 후손으로 문석봉의 제의로 의병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석봉은 지휘부를 조직한 후 통문을 각지에 발송했다. 통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통유할 일은, 성모께서 해를 입으신 것은 실로 천고에 없는 대변입니다. 일찍이 복수를 하지 않고 참아 이 적들과 어찌 한 하늘에서 더불어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감히 욕되게 사는 것보다 영광되게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아, 우리나라 누구인들 신하가 아니며 누가 복수를 원하지 않으리오. 같이 일어나 대의로서 흉당을 멸망시키고 사직을 건지는 것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을미 9월 모일.

문석봉은 우선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회덕현을 급습하여 탈취한 무기를 가지고 300여 명의 의병을 무장시킨 뒤 10월 21일 오전에 진잠으로 들어가 공주 군수 이세경을 만났다. 그러나 이세겸은 협조를 거부하고 의병의 동태를 관찰사에 보고했다. 10월 28일, 문석봉은 공암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했다. 공주에 살던 유학자 이단석은 <시문기(時聞記)>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0월) 28일, 갑자기 의병 수천이 대전 유성에서 공암에 이르러 읍부로 치달려 갔다. 지나는 촌락마다 소동이 일어났으나 잠시 후 날이 어두워지며 퇴거하여 해산했다. (중략) 연유를 물은 즉 중궁전의 복수를 하고자 하는 뜻이며 개화로 인해 해를 입었으나 지금 관리가 도니 자 모두 개화하는 사람들이라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싸움에 익숙치 못하고 병기가 예리하지 못하여 관군에 패한 바 되었다. 의병을 창기한 자는 경인 문석봉이다.

문석봉은 공주로 진격했으나 관군의 매복에 걸려 크게 패했다. 이후 중군장 오형덕과 함께 경상도 고령 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했다. 그는 고령 현감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감역 윤희순으로부터 군자금 지원을 약속받았다. 한편 초계군수 신태철은 “관에서 상금 만금을 그대들에게 걸고 있으니 잠시 숨어 후일을 도모하시오”라고 이들의 안위를 걱정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고령 현감 조모는 원조 요청을 거부하고 그의 행적을 고발했다. 결국 11월 24일 순검 서윤묵, 정인원, 이효진 등이 들이닥쳐 문석봉을 체포했고, 정부에서는 이들 세 사람에게 갑종상으로 6원씩을 상금으로 줬다. 대구부 감옥에 갇힌 문석봉은 11월 25일 경무관 장규원으로부터 공초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그간의 경과와 심정을 비장하게 토해 놓았다.

본인은 작년 양호소모사가 되었다. 금년 2월 김재수의 무고로 서울 경무청에 체포되어 구금 중 다행히 신원되어 6월 21일 출옥하였다. 8월 198일 성모께서 해를 당하시니 실로 천지에 일찍 없었떤 초유의 대변인 즉 어찌 국가의 신민으로 와신상담하여 그 원수를 갚고자 할 뿐 아니라 진실로 올바른 인륜을 가진 자라면 천하만국이 누가 함께 적을 토벌하고 죽이지 않겠는가. 본인이 충의의 마음으로 처자와 영결하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하고 우리 성모의 옥체에 손을 댄 역적을 조사하여 북궐 아래 현륙하고 그 살을 포 뜨고 그 간을 헤쳐서 만분의 일의 분함이라도 씻고자 맹세하였거늘 국운인지 신운인지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다. 마땅히 일사보국할 것이니 속히 죽여 많이 묻는 수고로움을 하지 말라.

- 의산유고

11월 28일. 문석봉은 관찰사 이중하의 공초를 받았다. <의산유고>에 실린 관찰사와의 공초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 네 나이는 몇이고 무슨 관직을 받았으며 어느 직에 있었으며 어느 곳에 사느냐?


답: 참 세밀한 사람이구나. 긴요한 질문이 많은데 어찌 세세한 질문에 힘들이는가. 나는 사대부다. 긴요한 이유가 있는 질문만 하고 황당하고 세세한 것은 하지 마라. 공초에 다 실려 있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

문: 국모가 해를 입으신 일이 8월 19일인데 왜 9월 18일 기의하였는가.

답: 너는 정말로 무식한 자로구나.

문: 어찌하여 무식하느냐.

답: 형세를 깨닫지 못하니 어찌 무식하고 배움이 없다고 하지 않겠느냐. 내가 시험삼아 말하겠다. 당일 우리 국모가 변을 만난 후 신하가 된 자 누가 마음이 찢어지고 떨려 곧바로 일으키고자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우리 5백년 녹을 받은 대신이 백 천이 아니건마는, 어찌 한두 동지도 없단 말이냐. 한 달을 고대하도 한 사람도 봉기하는 자 없었다. 사람이 죽음을 판단하기는 진실로 어렵더라. 밤낮으로 생각하여 마음 속에 죽을 것을 결심하고 의심이 없는 연후에 처자와 영결하고 분연히 몸을 일으켰는데 나를 보고 늦다고 말한 즉, 이씨 성을 갖고 관직이 참판에 해당하는 관찰사 그대는 국은을 받음이 무겁지도 않느냐. 어찌하여 지금까지 복수의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편안히 고관으로 있느냐.

문: 너와 동모한 자는 몇 사람이냐.

답: 이 어린애의 소견이여. 반역자 외에는 만천하의 사람이 자식이 아님이 없고 신하 아님이 없거늘 타인이 그 어미를 죽임에 자식된 자 어미의 복수를 하지 않음이 가하며, 타인이 임금을 시해함에 신하된 자 임금의 원수를 갚지 않음이 가한가. 난신적자는 어느 시대에나 없으리오 만은 금일과 같이 많은 때는 없었다.

문: 네가 창의한 의인 즉 의이나 불법한 것이 남아 있다. 왕명 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무슨 법이냐.

답: 애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무리가 어찌 불의라는 말을 하는가. 갑신흉사(갑신정변을 가리킴)는 왕명이 있었으며 갑오년 6월 21일의 일은 있었는가. 금년 8월 19일은 왕명이 있었는가. (중략)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무리와는 내가 더불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싫다.

문: 너는 공주성을 점거하고자 하였다는데 이는 무슨 의도였느냐. 국가의 성지를 임의로 취할 수 있느냐.

답: 너는 어찌하여 이렇게도 사리를 깨닫지 못하느냐. 손에 무기도 없이 만약 지리의 이점을 선점하지 못하면 어떻게 예리한 무기와 흉악한 병사를 대적할 수 있느냐. 또 우리가 당당한 의사로서 우리 왕의 성지를 취하여 국모의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 불가하고 너희들이 왜적에게 땅을 상납하고 주인을 팔아 영화를 구가하는 것은 가하단 말이냐.

(관찰사가 책상을 치며 대노했다.)

문: 너는 어찌 감히 단상 위를 올려 보며 사신을 욕하느냐.

답: 우리 왕조의 고사에 단상위를 올려보지 않음이 문무관의 예의였으나 내가 왕의 신하로서 어찌 구구하게 무군의 무리에게 체면을 닦겠는가. (이어서 소리를 질려 가로되) 이씨 반역자(진감현감 이세경)를 어떻게 하면 그 살을 포 뜨고 그 간을 씹을 것인가. 또 어떻게 조씨 반역자(고령 현감 조모)를 붙잡아 그 고기를 날로 맛볼 것인가. (이어서 통곡하며 이빨을 깨물어 두 개의 치아가 부러졌고, 선혈이 손바닥 위에 뿌리고 입속에 남은 피가 가득찼다.)

문: 이는 미친 자이다. (가두라는 명령을 하고 병풍 뒤에 들어갔다.)

문석봉은 옥고를 치르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지만 재봉기를 꾀해 1896년 봄 영장 최은동, 중군장 오형덕과 함께 파옥, 탈출하여 과천에 올라왔으나 이미 그의 집은 일본병에 의해 불태워져 있었다. 그는 4월에 서울에 들어와 정계의 요로들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어 원주로 내려가 ‘도지휘’가 되어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도중에 병에 걸려 8월 12일 현풍으로 귀환했고, 결국 11월 19일 밤에 병사했다. 향년 46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문석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당초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남리에 안장되어 있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또한 대전 유성구청은 2004년 유성시장에 '을미의병의 효시, 유성의병'이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