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조령 관문

문경 조령 관문
조령3관문(조령관).jpg
조령 3관문 조령관의 모습
건축물 정보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555번지
대지면적 47,283 m2
문화재 정보
종목 사적 제147호
지정일 1966년 3월 22일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성을 지날 때 성주 흥달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서 귀순했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조령(鳥嶺)에 있는 이 관문은 영남과 서울간을 연결하는 관문이며, 군사적 요새지에 해당한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인 계립령(일명 하늘재)이 중요하였는데 고려 초에는 이곳을 새재라고 하여서 조령이라고 칭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참고로 조령 관문은 새재길과 함께 묶여서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이쪽 산책로 주변의 소나무를 보면 V자형의 홈이 파여있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일제시대 당시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물자가 부족해 지자 소나무의 송진까지 채취를 해서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한 짓의 흔적이다. 이래저래 수난을 많이 겪은 역사의 모습이다.

임진왜란 당시[편집 | 원본 편집]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는 신립이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신립은 충주로 후퇴하여 탄금대 전투를 치른 뒤 패배하고 만다. 그러나 이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2관문에 해당하는 곳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여 왜병을 기습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의병장 신충원의 활동으로 이곳의 중요성이 재차 인식되어 그 뒤 조정에서는 신립의 실책을 크게 후회해 조령에 대대적으로 관문을 설치할 것을 꾸준히 논의하다가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개의 관문을 완성했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