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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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건축물 정보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49-1번지 외
총면적 129,349 m2
문화재 정보
종목 사적 제346호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茂長面)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읍성과 관아로 1991년 2월 26일에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다.

무장읍성[편집 | 원본 편집]

본래 이 곳은 고려시대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 두 고을이었으나 태종 17년인 1417년에 두 현을 합치고 군진을 설치하면서 무장진을 두어 병마사가 현의 일을 겸임하게 하다가 이후 세종 5년인 1423년에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고치면서 첨절제사 관할의 군진이 되었다가 이후 일반 현으로 변경하면서 현감이 부임하면서 일대의 읍치를 한 곳이다.

성곽은 군진이었던 무장진 설치 당시 무장진 병마사가 축성한 둘레 약 1.2km의 평지성으로 사두봉이라고 하는 야트막한 구릉지를 가운데 둔 형태로 사각형에 가까운 성벽을 갖추고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문종실록에는 둘레 1470척(약662m), 높이 7척(약 2.8m), 해자는 212척에 2개의 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돌로 쌓은 석성이 2,639척(약 1.2km) 이었고 높이는 7척이며 안에는 두 샘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문종~중종대 사이에 성이 확장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문은 남문과 동문 두 곳이 있었고 모두 옹성을 갖추고 있었으나 현존하는 문루는 남문인 진무루 1개이며 앞면 3칸, 옆면 2칸의 목조 평문식 성문이며 앞에는 옹성이 둘러쳐져 있었다.

이외에 남측 성벽 동편과 서편에 각각 2개소의 수구가 있어 성 내 샘의 물이 연못을 거쳐 성 바깥 해자로 흘러들어가게 되어 있었으며, 현재 해자 모습 일부와 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관아 및 내부시설[편집 | 원본 편집]

현재 무장읍성 내 시설물들은 다음과 같다.

  • 객사 : 조선시대 무장현에 내려온 관리나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한 건물로 무장읍성의 객사에는 옛 무송, 장사의 끝자를 따서 송사지관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본관에 궐(闕)자를 새긴 나무판이 있는데 이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과 지방관들이 여기에 경의를 표했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도 이 곳에서 축하의식을 행하였다.
  • 동헌 : 조선시대 당시 현감이 머물렀던 곳으로 내부에 내아가 자리하고 있다.
  • 옥사(감옥) 터 : 조선시대 죄인을 가두어 놓던 곳으로 감시의 용이성을 위해 원형의 담장을 둘러놓았다.
  • 읍취루 : 객사 동편에 자리한 누각으로
  • 연못 : 객사 뒤편 사두봉을 중심으로 동서에 2개의 엿못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읍성철폐령에 의해 읍성 기능 상실 당시 메워진 후 2004년까지 무장초등학교의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2009년 연못에 대한 발굴조사를 한 뒤 연못을 복원하여 다시 물이 고이자 이 곳에 100년 넘게 잠들어 있던 연꽃의 씨가 발아하여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등 당시의 자연상태가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장읍성 사진[편집 | 원본 편집]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이 무장읍성의 옥은 천주교 순례코스 중 하나로 전북지역 천주교 최초 순교자였던 최여겸(복자 최여겸 마티아)가 개갑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최여겸은 순조 1년인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충청도 한산의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배교자의 밀고로 4월 13일 체포되어 한산관아, 전주감영을 거쳐 형조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고향인 무장읍성 옥에 구금되었다가 8월 27일 개갑장터에서 참수되어 3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조선 말기 무장현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지점에 해당한다. 고부 봉기 이후 잠시 해산하였던 농민군은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에 의해 본격적인 무장봉기(1차 봉기)를 하게 되었는데 해당 지점이 현 고창군 공음면 일대였으며 이후 인근 무장읍성을 바로 접수하게 되었다. 당시 무장현감은 농민들이 모여 봉기하는것을 보자마자 관군과 함께 도주했고 남아있던 아전들이 문을 열어주어 농민군은 이 곳에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무혈입성한 전봉준은 아전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내아가 아닌 객사에서 창의문을 선포하였고 덕분에 무장관아는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아 현재까지 관아의 형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내려오게 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