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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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28대 진덕여왕 김승만 29대 무열왕 김춘추 30대 문무왕 김법민
태종 무열왕
인물 정보
본명 김춘추
출생 604년
사망 661년
국적 신라
가족 아버지 문흥왕, 어머니 천명공주
신라의 제29대 왕
시호 무열왕(武烈王)
임기 654년~661년
전임 진덕여왕
후임 문무왕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은 신라의 제29대 왕이다.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왕이며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다. 대중들한테는 왕명보다는 김춘추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묘호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삼국시대의 왕이기도 하다.

폐주의 손자인데다, 본래 즉위와는 거리가 멀던 위치였으나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화백회의에서 상대등 알천(閼川)이 계승권을 넘겨받았지만 고령인 이유로 거절하자 김춘추가 계승권을 넘겨받아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즉위 전[편집 | 원본 편집]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로 문흥왕에 추존된 김용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이였던 천명부인(天明公主)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풍월주[1]였다곤 하나 근거는 없고 확실한건 아내는 김문희[2]이며 즉위 전 관직은 외교관이였단 것이다.

김춘추 고구려 억류 사건[편집 | 원본 편집]

김춘추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에 지원을 청하러 사신 자격으로 출발했다. 김춘추가 출발한 이유는 642년 자국의 대야성이 백제군에게 함락당하고 출병했던 사위 김품석(金品釋)[3]이 몸뚱이만 남은 시체라는 소식을 듣고, 그걸 계기로 자국 보존을 위한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어쨌든 지원을 청했지만 선대 왕인 진흥왕때 활발한 정복사업 때 고구려부터 빼앗은 한강 상류유역의 영토 문제로 결렬되었다. 결국엔 탈출했으나 김춘추는 심기가 나빠진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에 의해 감금당하기까지 한다.

영향[편집 | 원본 편집]

위 대야성 전투의 패배와 김춘추 억류 사건은 오히려 김춘추와 김유신의 결합을 다지게 했고 그 결과 김유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647년 비담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 공을 시작으로 실권을 얻어나간 김춘추는 구 귀족세력과 '김춘추-김유신을 중점으로 한 신 귀족세력'의 위에 서서 진덕여왕을 즉위시키고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당나라와의 외교와 친당정책[편집 | 원본 편집]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에 지원을 청했으나 거절당한 김춘추는 중국의 당나라로 눈을 돌린다. 648년 출발해 친당 정책을 추진한다 약속했고 그 점을 높게 산 이세민은 그에게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지원군을 약속받았다.

김춘추의 친당 정책은 다음과 같다.

  • 1. 신라의 자주적 연호를 폐지한다.
  • 2. 당조의 연호를 수용하여 대신 사용.
  • 3. 한화정책(漢化政策)
  • 4. 기타

즉위[편집 | 원본 편집]

앞서 말한대로 실권을 장악한 김춘추는 확실한 명분과 정통을 갖기 위해 알천이 계승권을 넘겨받게 끔 하고 자신이 임명한 (꼭두각시) 알천이 계승권을 넘기게 유도해 폐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을 가진 왕으로 추대받아 즉위하였다.

즉위의 숨은 뜻[편집 | 원본 편집]

표면적인 이유는 알천의 거절이지만 사실 정치적 관계가 숨어 있었다. 김춘추의 부인은 김문희인데 김문희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다. 이 말은 폐주 진지왕과 멸망한 구 금관가야계간의 결합이 이루어져 높은 혈통을 얻은 것이다.

정리하자면,

  • 폐주 진지왕계인 김춘추는 김유신계를 통한 군사력이 필요함.
  • 멸망한 구 가야왕족 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신라 왕족' 지위가 필요함.

이러한 이점을 노린 혼인은 신라 왕실 귀족 내에서 새 귀족 집단을 따로 형성하게 되어 기존의 귀족집단의 반발을 샀다. 다만 선덕왕 중반까진 균형을 이루었다고 본다.

즉위 후[편집 | 원본 편집]

한 집이 되기 위한 발걸음[편집 | 원본 편집]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

최치원, 신라의 삼국 통일을 평가하며 - 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

당조의 후원을 약속받은 태종은 이제 삼국통일을 노렸다. 귀족문제로 비롯한 왕권 문제마저 안정시킨 그는 더이상 문제될게 없었다. 659년 백제의 국경선 노략질을 명분으로 당조의 후원을 받아 백제멸망전의 구체적인 작전을 계획했고 동년 3월에 당군 소정방 외 13만 수군(水軍)이, 5월엔 태종과 태자 김법민, 김유신 외 군사 5만명을 이끌고 당군과 연합해 나당연합군을 구성한 후 백제를 친다.

마침내 7월 김유신이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군을 패퇴시키고 당군과 함께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한다. 이어서 백제의 왕 부여의자와 그 왕자 부여융을 압송해간다. 이로써 태종은 사위의 원수를 갚았고 삼국통일에 근접했으며 백제를 신라와 통일시켰다.[4]

얼마 안남은 삼국통일, 이른 죽음[편집 | 원본 편집]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은 백제멸망전에서 전사자들과 참전한 이들에게 추서, 관직 상승을 하사했고 백제인을 회유하기 위해 항복한 백제인들에게 능력에 맞는 신라의 관등을 하사하였다.

그가 백제를 멸망시키는 동안 고구려는 그 틈을 타 신라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성주대사 동타천(冬陁川)이 고구려군을 막아내 태종은 삼국통일의 기반을 만들수 있었고 이미 멸망한 백제땅에 종정(宗貞)을 도독으로 임명해 백제인 회유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제 마지막 관문은 고구려밖에 남지 않았으나 재위 8년째인 661년에 삼국통일의 몇 발걸음을 남기고 사망했다. 왕위는 아들 김법민이 이었으며 그의 의지는 아들 문무왕이 이어 마침내 커다란 한 집을 쌓게 된다.

사후 묘호는 태종(太宗)으로 한국사상 최초의 묘호 사용 사례인데, 묘호는 천자만이 사용하는 칭호이다. 당연히 천자국(황제국)인 당조가 반발했으나 신라 역시 삼국통일을 근거로 반박하자 당도 더이상 문제삼지 않았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뛰어난 언변, 적극적인 외교활동으로 중국의 지원을 받아냈고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친정해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에 근접해 한국사상 민족의 통일을 최초로 이뤄냈다는건 높이 평가되며 태종을 나타내는 독보적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묘호의 사용을 통해 중국과 지지 않는 자주적 권한을 따냈다는 것 역시 높게 평가받는다.

그러나 자국의 힘이 아닌 중국의 힘을 빌렸고 같은 민족을 다른 민족을 개입시켜 전쟁일 일으키고 결론적으론 고구려의 땅 대부분을 손실했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삼국통일'이라 비판받기도 한다. 이 점은 아들인 문무왕도 마찬가지이며 현대인들에게 신라가 뒤통수를 쳤다는 등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게 하였다.

참고로 신라가 잃어버린 요동 이북 땅은 대조영을 우두머리로 한 고구려-말갈 연합세력이 회복하게 된다. 이후 요동에 대해선 발해 참조.

참고항목[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화랑의 우두머리
  2. 김유신의 여동생이다.
  3.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 전사한 후 백제군이 목 부분만 잘라서 사비성으로 가져갔다.
  4. 다만 땅을 바로 병합시키진 못했다. 백제조정이 붕괴했음에도 항복하지 않은 구 백제소속 성과 부여풍을 왕으로 세운 부흥세력이 663년간 당군과 신라에 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