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큐리 계획

머큐리 계획(Project Mercury)은 냉전 시기에 있었던 우주 경쟁에서 미국소련보다 먼저 인간을 우주로 보내기 위해 시작된 유인 우주선 발사 계획이다.

당시 미국은 모든 면에서 소련을 앞서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면서 열등감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이에 미국은 소련보다 먼저 인간을 우주로 보내겠다! 라고 다짐하면서 1958년에 머큐리 계획의 시작을 발표한다.

머큐리 계획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NASA내 전담부서 설립[편집 | 원본 편집]

우선 NASA는 머큐리 계획과 이후에 생길 유인 우주 계획을 지휘하기 위해 전담 부서인 우주 임무 그룹(Space Task Group)을 설립한다.

우주인 선발[편집 | 원본 편집]

당시 우주인의 선발기준은 이렇다.

  • 나이는 40세 이하일 것
  • 키가 180.34cm(5피트 11인치) 이하일 것
  • 몸무게가 82kg(180 파운드) 이하일 것
  • 뛰어난 신체적 조건을 갖추어야 함
  • 학사 학위나 동등한 학력 필요
  • 테스트 파일럿 학교 졸업
  • 합계 1,500시간 이상의 비행시간
  • 인증된 제트 파일럿일 것

미션[편집 | 원본 편집]

머큐리 계획의 특징 중 하나는 미션명을 머큐리-로켓명 미션번호의 독특한 방식으로 정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레드스톤 로켓을 이용한 첫 번째 미션은 머큐리-레드스톤 1이며, 줄여서 MR-1라고 표기한다.

무인 미션[편집 | 원본 편집]

미션명 로켓명 목적 발사일 성공 여부 특징
LJ-1 리틀 조 비상탈출장치 작동 시험 1959년 08월 21일 실패 발사 35분전 누전으로 인해 비상탈출장치 오작동
BJ-1 빅 조 재진입 시험 1959년 09월 09일 부분적 성공 부스터 엔진이 분리되지 않았으나, 머큐리 모듈 모형은 재진입에 성공함
LJ-6 리틀 조 비상탈출장치 작동 시험 1959년 10월 04일 성공 5분 10초 동안 비행
LJ-1A 리틀 조 최대 압력 상황(Max Q)에서의 비상탈출장치 작동 시험 1959년 11월 04일 일부 실패 발사 및 귀환에는 성공했으나 비상탈출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
LJ-2 리틀 조 고고도에서의 영장류가 탑승한 머큐리 모듈 탈출 실험 1959년 12월 04일 성공 샘이라는 원숭이가 탑승했다.
LJ-1B 리틀 조 최대 압력 상황(Max Q)에서의 비상탈출장치 작동 시험 1960년 01월 21일 성공 LJ-1A와 동일한 목적, 이번에는 미스 샘이라는 원숭이가 탑승함
BA-1 비상탈출장치 비상탈출장치 작동 시험 1960년 05월 09일 성공 최초로 실제 머큐리 모듈을 이용한 실험
MA-1 아틀라스 로켓 아틀라스 로켓-머큐리 모듈의 호환성 확인 1960년 07월 29일 실패 발사 58초 후 발사체의 구조적 결함으로 이상으로 작동중단, 머큐리 모듈은 파괴됨
LJ-5 리틀 조 머큐리 모듈 비행 실험 1960년 11월 08일 실패 발사 16초 후 비상탈출장치가 조기 작동함.
MR-1 레드스톤 로켓 머큐리 모듈 안정성 확인 및 레드스톤 로켓과 호환성 확인 1960년 11월 21일 실패 레드스톤 로켓의 이상으로 4인치 떠오른 뒤 작동중단. 비상탈출장치는 정상작동
MR-1A 레드스톤 로켓 무인 저 궤도 비행 실험 1960년 12월 19일 성공 15분 41초 동안 비행
MR-2 레드스톤 로켓 영장류가 탑승한 머큐리 모듈 실험 1961년 01월 31일 부분적 성공 역추진 로켓이 예상보다 먼저 분리되고 모듈이 침수되는 일이 있었으나, 탑승한 침팬지 햄은 무사했다.
MA-2 아틀라스 로켓 아틀라스 로켓-머큐리 모듈의 호환성 확인 1961년 02월 21일 성공 MA-1과 똑같은 목적
LJ-5A 리틀 조 최대 압력 상황(Max Q)에서의 비상탈출시 영향측정 1961년 03월 18일 부분적 성공 LJ-5처럼 비상탈출장치 오동작. 하지만 다른 목적은 달성했다
MR-BD 레드스톤 로켓 레드스톤 로켓 부스터 안정성 실험 1961년 03월 24일 성공 MR-2에서 발생한 로켓 문제를 해결 및 보완하기 위한 미션, 이 미션의 성공으로 레드스톤 로켓은 안정성이 확인되어 무인 실험이 종료된다.
MA-3 아틀라스 로켓 아틀라스 로켓-머큐리 모듈의 궤도 진입 실험 1961년 04월 25일 실패 발사 40초 후 아틀라스 로켓의 유도시스템 이상으로 폭발, 머큐리 모듈은 재진입 성공
LJ-5B 리틀 조 최대 압력 상황(Max Q)에서의 비상탈출장치 작동 시험 1961년 04월 28일 부분적 성공 리틀 조의 발사체 모터 하나가 4초 후에 점화되어 예상보다 높은 압력을 받게 됨, 하지만 머큐리 모듈은 무사했다.
MA-4 아틀라스 로켓 지구 궤도에서의 머큐리 모듈 환경 실험 1961년 09월 13일 부분적 성공 일부 시스템에서 오차가 발견되었으나, 나머지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MS-1 블루 스코트 II 로켓 머큐리 모듈의 원활한 통신을 위해 소형 통신위성을 궤도에 올림 1961년 11월 01일 실패 발사 43초 후 로켓에 이상이 감지되어 자폭
MA-5 아틀라스 로켓 궤도에서의 영장류가 탑승한 머큐리 모듈 환경 실험 1961년 11월 29일 부분적 성공 에노스라는 침팬지가 탑승함. 발사는 성공했지만 자세 제어 시스템의 이상으로 머큐리 모듈이 정상 위치를 이탈해서 궤도에 진입하는데 연료를 너무 많이 소모했다. 그래서 예정된 세 번의 궤도 비행중 두 번만 돌고 귀환해야했다. 하지만 아틀라스 로켓의 안정성이 확인되었으므로 마침내 미국은 유인궤도 비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

유인 미션[편집 | 원본 편집]

파일럿 이름 우주선명-발사체명 호출부호 주요 목적 발사일
앨런 셰퍼드 머큐리-레드스톤 3 (MR-3) 프리덤7 (자유 7호) 우주에 있는 우주인의 상태 평가 1961년 5월 5일
거스 그리섬 머큐리-레드스톤 4 (MR-4) 리버티 벨7 (자유의 종 7호) 우주에 있는 우주인의 상태 추가 평가 1961년 7월 21일
존 글렌 머큐리-아틀라스 6 (MA-6) 프렌드쉽7 (우정 7호) 궤도에 있는 우주인의 상태 평가 1962년 2월 20일
디크 슬레이튼 머큐리-아틀라스 7 (MA-7) 델타7 취소 취소
스콧 카펜터 머큐리-아틀라스 7 (MA-7) 오로라7 궤도에 있는 우주인의 상태 추가 평가 1962년 5월 24일
월리 쉬라 머큐리-아틀라스 8 (MA-8) 시그마7 9시간동안의 궤도비행 1962년 10월 3일
고든 쿠퍼 머큐리-아틀라스 9 (MA-9) 페이스7 (운명7호) 하루동안의 궤도비행 1963년 5월 15일

프리덤 7호 (머큐리-레드스톤 3)[편집 | 원본 편집]

프리덤 7호는 앨런 셰퍼드가 탑승했으며, 15분 22초 동안 탄도비행을 했다.

리버티 벨 7호 (머큐리-레드스톤 4)[편집 | 원본 편집]

리버티벨 7호은 거스 그리섬이 탑승했으며, 15분 37초 동안 탄도비행을 했다.

프렌드쉽 7호 (머큐리-아틀라스 6)[편집 | 원본 편집]

프렌드쉽 7호의 파일럿인 존 글렌은 아틀라스 로켓을 이용하여 미국인 최초로 궤도비행을 성공했으며, 지구 궤도를 세 바퀴 돌고 귀환했다.

오로라 7호 (머큐리-아틀라스 7)[편집 | 원본 편집]

오로라 7호는 스콧 카펜터가 탑승했으며, 프렌드쉽7호의 존 글렌과 똑같이 지구 궤도를 세 바퀴 돌고 귀환했다.

시그마 7호 (머큐리-아틀라스 8)[편집 | 원본 편집]

시그마 7호는 월리 시라가 탑승했으며, 지구 궤도를 6바퀴 돌고 귀환했다. 그리고 머큐리 계획에서 가장 성공적인 미션으로 기록되어 있다.

페이스 7호 (머큐리-아틀라스 9)[편집 | 원본 편집]

페이스 7호는 고든 쿠퍼가 탑승했으며 지구 궤도를 22.5바퀴 돌고 귀환했다. 미국인 최초로 우주에서 하루를 보냈으며, SSTV를 이용하여 TV 중계를 하기도 하였다.

취소된 미션[편집 | 원본 편집]

머큐리-주피터 (MJ-2)[편집 | 원본 편집]

머큐리 계획 초기에는 레드스톤 로켓과 아틀라스 로켓, 주피터 로켓을 발사체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주피터 로켓을 이용한 머큐리-주피터는 예산문제와 아틀라스 로켓을 이용한 실험에서 더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취소된다.

리틀 조 5A (LJ-5A)[편집 | 원본 편집]

리틀 조 5A는 돼지가 탑승할 예정이었던 미션이나 돼지의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취소되었다.

대신에 그 운없는 돼지들은 머큐리 모듈의 제작사였던 맥도널(현재는 맥도널 더글러스)의 엔지니어들은 새로운 벌집모양의 충격완화장치를 장착한 머큐리 모듈의 드랍 실험에 이용되었다. 그 결과 돼지들은 모두 무사하여 벌집모양의 충격완화장치는 적합하다고 보고되었다.

머큐리 풍선 비행 실험 계획[편집 | 원본 편집]

머큐리 모듈에 풍선을 달아서 최대 고도 24km까지 올린다음 바다에 떨어뜨려 모듈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연구진들은 루이스 연구센터의 고도 바람 터널(Lewis Research Center's altitude wind tunnel)에서 동일한 상황의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는데다가 역추진 로켓까지 사용이 가능하고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고 판단하여 이 실험 계획을 취소시킨다.

한편 소련도 보스토크 계획에서 비슷한 실험을 계획했으며, 실제로 시행까지 했지만 우주복에 이상이 있어서 탑승자(우주인이 아닌 공수 부대원이었다)는 사망했다.

머큐리-레드스톤 3A (MR-3A)[편집 | 원본 편집]

MR-2의 역추진 로켓의 이상 분리 이후, 레드스톤 로켓 개발의 총 책임자였던 베르너 폰 브라운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인 미션(MR-BD)을 계획했으나 NASA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레드스톤 로켓에 역추진 로켓을 제외하고는 문제가 없으니 일단 사람을 우주로 보내자는 계획이었지만 개발진의 강렬한 항의로 MR-3A는 취소된다. 만약 MR-3A이 강행되었다면 인류 최초의 우주인은 유리 가가린이 아니라 엘런 셰퍼드가 되었을지도...

머큐리-레드스톤 5 (MR-5)[편집 | 원본 편집]

레드스톤 로켓을 이용한 탄도비행으로 계획되었으며, 존 글렌이 탑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961년 8월 소련이 보스토크 2호에서 하루동안 지구 궤도를 17바퀴 돈다음 귀환에 성공하자 또 열등감이 폭발한 NASA는 모든 탄도비행을 취소시킨다. 그리고 존 글렌을 아틀라스 로켓을 이용한 궤도비행에 투입시킨다.

머큐리-레드스톤 6 (MR-6)[편집 | 원본 편집]

디크 슬레이튼이 탑승할 탄도비행으로 계획되었으나 MR-5와 같은 이유로 취소된다.

머큐리-아틀라스 7 (MA-7)(델타 7호)[편집 | 원본 편집]

왜 디크 슬레이튼의 델타 7호만 취소되었는지 물을 건 당연한 이야기.

디크 슬레이튼의 경우 원래 1962년 3월 16일에 머큐리-아틀라스7의 파일럿으로 선발되었으나 이틀 후 받은 건강검진에서 심장에 이상 신호가 발견되어 비행중지 처분을 받고 행정직으로 밀린다. 참고로 델타 7호는 본인이 원하던 애칭이라서 공식 문서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다. 디크 슬레이튼은 그 후에도 계속 NASA에서 근무하면서 술담배를 끊고 여러 노력을 하여 20여 년 후 심장이 회복되자 아폴로-소유즈 계획에서 활약하게 된다.

머큐리-아틀라스 9A (MA-9A)[편집 | 원본 편집]

고든 쿠퍼가 탑승할 예정이었던 궤도비행이었으며, 시그마 7호와 동일하게 지구 궤도를 6바퀴 비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우주 비행사가 부족한 상황이라(카펜터는 백업 파일럿, 존 글렌과 엘런 셰퍼드는 정치적 아이콘이 되어 비행 일정을 잡기 힘들었으며 슬레이튼은 심장 이상으로 지상근무직으로 밀리고 거스 그리섬은 머큐리-아틀라스 4의 사고 조사 중이었다) 고든 쿠퍼는 지구 궤도를 18바퀴 비행하는 MR-9의 파일럿이 된다.

머큐리-아틀라스 10 (MA-10)[편집 | 원본 편집]

엘런 셰퍼드가 탑승할 예정이었던 미션이며, 이번에는 우주에서 3일(!)동안 보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예산 초과와 페이스 7호의 실패로 인해 위험성이 크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여담으로 호출부호로는 프리덤 II이었다.

각주

이 문서에는 해당 링크를 번역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