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흡(莫茂洽, 1563년~1592년, 재위 기간 1564년~1592년)은 대월 막 왕조의 제5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다.
대월 남북조시대 북조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며 그가 후여조에게 패해 탕롱에서 처형된 시점을 막조의 실질적 멸망이라 본다. 4대 황제인 선종의 장남이며 즉위 당시엔 나이가 어려 막경전과 막돈양이 그를 보좌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기[편집 | 원본 편집]
막무흡은 선종의 아들로 1563년 2월에 태어났다. 아버지 선종 시기엔 이미 재건된 여씨 대월에게 패배해 탕롱을 빼앗겼고 막씨 대월은 오로지 북방만 통치하는 바람 앞의 촛불과 다름없는 상황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종이 1562년 죽자 그를 이어 즉위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친정이 불가했기에 큰숙조부 막경전(莫敬典)이 군무를, 작은 숙조부인 막돈양(莫敦讓)이 어린 무흡을 품에 껴안고 조정을 담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 2세였다.
당시 여조의 실권자 정검은 탕롱 수복과 더불어 여조의 고토를 수복해나갔는데, 이런 상황에서 막씨 조정 내부엔 불화가 일어나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기 급급하는 등 불신이 깊어졌다. 이런 고발은 막경전과 군무를 담당하는 단웅왕이 아버지 막경전의 첩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건에까지 미쳐 단웅왕을 폐서인시키고 단웅왕의 동생 막경부(莫敬敷)를 당안왕(唐安王)으로 봉한 다음 막경지의 병권을 위임하기까지 했다.
수복 시도와 패퇴[편집 | 원본 편집]
이런 상황에서 여조의 정검은 약해진 막씨 대월의 산남(山南)일대를 계속 공격했고 막군이 계속 패배하자 막조의 조정에선 그를 어떻게 막아낼지 논의했다.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군권의 총책임자 막경전의 목소리가 가장 컸고, 여씨의 주력 대다수가 막씨를 치기 위해 밖으로 나왔으니 여씨의 수도인 청화(淸化)는 비어 있을 것이고, 그곳을 기습하자고 하였다. 섭정인 막돈양이 의견을 수용했고 1565년 막경전은 청화를 기습해 여조의 군사를 대패시켰고 정검을 압박해 철수하게끔 했다. 그러나 수도를 떨어뜨리진 못했고 1568년 다시금 회복한 정검이 북벌하자 이전처럼 수세에 몰린다.
한편 막씨의 숙적인 정검이 1570년 죽고 그의 장남인 정회가 실권을 이어받았지만 무능하고 주색에 빠져 실망한 동생(정검의 차남) 정송이 반란을 일으켜 여조의 정세가 잠시 혼란해진 틈을 타 막경전이 10만 대군과 출병하여 정회를 정벌하자 정회가 막조에게 항복했고 그 기세에 이어 막경전이 여씨대월 본토를 공격하자 정송은 막아낼 수 없었고, 막씨의 군대가 마칠강(馬漆江)과 람강(藍江) 일대를 일시적으로 수복했다. 그러나 세력을 회복한 정송이 연이어 기습하자 주둔한 막조의 군대가 여씨에게 행복했고 다시금 땅을 빼앗겼다. 최후의 시도로 막경전은 예안을 공격했고 순화와 광남 사람 일부가 막 왕조와 내통을 시도했으나 최남방의 통치자 완황에게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예안마저 정송의 지원군으로 막조는 다시금 패퇴한다.
친정 시기[편집 | 원본 편집]
이후 여조의 장수인 여급제(黎及第)와 영종(英宗)이 정송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일어나자 그 틈을 타서 막경전이 청화, 예안을 다시금 공격했고 더불어 1573년 막무흡이 성인이 되자 친정을 시도했다. 황제령으로 1574년 막경전, 막옥련, 완권을 보내 여러 차례 예안, 청화을 공격해 여조를 열세에 몰아넣고 두 대월의 우위를 차지했으나 1580년유능한 장수 막경전이 병사하자 막조의 가세는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가 죽자 병권은 이전에 섭정하던 숙조부 막돈양이 이어받았지만 막돈양은 군무를 행하는 능력이 부족해 후여조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패배했다. 엎친 데 더불어 막무흡 본인도 녹내장에 걸려 실명했다가 몇년 후에야 시력을 되찾았지만 황제마저 불능에 빠지자 막조의 장수들은 분분히 흩어져 여씨에게 투항하였다.
마침내 1591년 정송이 완유료(阮有僚), 황정애(黃廷愛), 정두(鄭杜)[1]을 거느리고 북방으로 진격하자 쇠퇴한 막조는 대패했고 수도인 승룡성까지 진입하기까지 이른다. 막무흡은 성을 버리고 도주해 보제진(菩提津)의 토괴관(土塊館)에 거주했고 남은 무신들에게 승룡을 지키라고 명했으며 막옥련, 완권을 소집해 승룡을 어떻게든 지키려 했으나 대패했고 수도인 승룡마저 빼앗겨 막 왕조는 사실상 멸망하고 만다.
최후[편집 | 원본 편집]
막무흡은 아들 막전(莫全)에게 감국을 명해 남은 조정을 다스리게 한 후, 자신은 남은 병사를 모아 후여조의 진영에 투신했다. 이전에 탄핵되었다가 웅례공(雄禮公)에 봉해진 막경지가 정송에게 저항했지만 패배했고 더이상 가망이 없어지자 막무흡은 배를 타고 도망가 민간[2]에 숨어들었지만 11일 후 마을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정송의 부장에게 사로잡혔고 승룡으로 압송되어 3일 동안 산 채로 거리에 묶여 매달렸다.
이후 보제진으로 끌려가 참수당했고 머리만 청화로 전해져 여조에선 그의 눈에 못을 박은 뒤 청화의 저잣거리에 효수하여 백성들이 보도록 하였다. 막조의 비극적인 최후와 동시에 대월의 통일을 알리는 광경이였던 것이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감국인 아들 막전은 막조의 남은 무리를 이끌었지만 막경지가 황제를 칭하고 자립하여 막전의 무리를 흡수하자 막전은 그에게 투항해 막씨 세력을 하나로 결집했으나 정송에게 패해 둘다 참수당했다.
다만 이전에 막경지의 아들인 막경용(莫敬用)이 명의 국경에 접근해 명에게 자신들의 상황을 알려 구원을 청했고 명조의 신하 진대과(陳大科)가 명조의 만력제에게 막씨를 고평(高平) 지역에서 제사를 이어가도록 아뢰어 고평 일대에 막경지의 동생 막경공을 봉해 명맥을 이어가도록 했다. 괴뢰의 형태로 재건된 막조는 1677년 막경우가 정작에게 패해 도주하기까지 85년을 더 존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