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앙투아네트 푸아송 드 퐁파두르 후작부인

(마담 드 퐁파두르에서 넘어옴)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 드 퐁파두르 후작부인
Jeanne Antoinett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
Boucher Marquise de Pompadour 1756.jpg
인물 정보
본명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
다른이름 퐁파두르 부인
출생 1721년 12월 29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764년 4월 15일 (43세)
프랑스 왕국 파리
국적 프랑스
종교 로마 가톨릭
배우자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 (1741~1745)
가족 아버지 : 프랑수아 푸아송
어머니 : 루이즈 마들랭 드 라 모트
아들 : 샤를 기욤 루이
딸 : 알렉산드린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 드 퐁파두르 후작부인 (Jeanne Antoinett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은 루이 15세로얄 미스트리스(정부)(프랑스어: maîtresse-en-titre 메트레상티트르)로 뒤바리 부인과 더불어 유명한 루이 15세의 정부이다. 흔히 마담 드 퐁파두르, 퐁파두르 부인(Madame de Pompadour)로 알려져있다. 후일 공작부인으로 작위가 바뀌었으나 당시 받은 후작이 더 유명하기에 후작으로 표기.

역사 속에서는 프로이센 왕국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러시아 제국옐리자베타 여제와 함께 동맹의 역전을 창시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상세[편집 | 원본 편집]

신분은 평민이였지만 아버지는 금융업자였고 어머니는 코르티잔이였기에 주 손님인 귀족들의 인맥이 있어 집안은 부유했고 퐁파두르도 귀족 못지 않은 고등 교육을 배웠다. 때문에 뒤바리 부인과 달리 그녀는 교양과 지성을 갖추었고 루이 5세에게 버림받지 않고 죽을 때까지 총애를 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정부가 되기 전[편집 | 원본 편집]

그녀의 아버지 프랑수아 푸아송은 파리의 부유한 금융업자였지만 횡령 혐의로 국외에 도주했고 어머니 루이즈 마들랭 드 라 모트는 코르티잔(고급 매춘부)으로 결혼 한 것도 직업을 위해서였지, 결혼 후에도 매춘 생활을 청산하지 않는 문란한 여인이였다. 사실 당시에는 이런 결혼이 흔했었는데 코르티잔의 결혼은 후일 일어날 스캔들이나 사생아를 막아주는 바람막이였고 루이스는 오히려 이런 고급 매춘부 생활 덕에 귀족이나 여러 부르주아들과 친분이 있어 남편도 이를 이용해 출세할 수 있어서 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어머니의 애인(내지는 손님) 중 한 명인 샤를 프랑수아 폴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이 퐁파두르의 친부로 의심받기도 했다.

오히려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샤를 프랑수아 폴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은 필요 이상으로 푸아송 가문을 지원해준 것도 모자라 퐁파두르의 교육에 큰 후원을 해주었고 퐁파두르가 성장하자 자신의 조카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과 결혼시켜준 것도 그의 행동이 없었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퐁파두르는 에티올르 부인(마담 드 에티올르)였다. 1745년 2월 24일. 황태자의 결혼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루이 15세와 에티올르 부인은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미모에 첫 눈에 반한 루이 15세는 에티올르 부인과 노르망을 이혼시켰고 후작부인의 칭호와 함께 후손이 없어 단절된 퐁파두르의 성을 내려주었다.

왕의 정부가 된 후[편집 | 원본 편집]

왕의 정부로서 루이 15세의 밤상대 및 말상대를 항상 해주었고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에게 순종을 해 처신에도 신경을 썼다. 때문에 그녀가 루이 15세에게 항의하거나 화낸 건 단 두 번으로 전부 다른 정부와 치정 관련 문제였다.

말년과 최후[편집 | 원본 편집]

나이가 들면서 루이 15세의 총애를 유지하기 위해 어린 소녀들을 바친 포주짓을 했으나 결국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이야깃거리[편집 | 원본 편집]

  • 아들과 딸 둘다 요절했으며 전 남편 데티올과 사이에서 본 자식들이다. 루이 15세와 사이에서 생겨난 자식은 없다.
    • 딸 알렉산드린은 그나마 오래 살았기에 퐁파두르도 신경을 써 귀족 가문에 시집보내려고 했으나 건강 문제로 10살에 요절했다. 그러나 퐁파두르는 신분상 연회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울지도 못했었다.
  • 남편 데티올은 강제 이혼을 당한 뒤 퐁파두르를 평생 용서하지 않았으며 어느 오페라 여배우와 동거를 하다 퐁파두르 사후 여배우와 재혼해 새 가정을 꾸렸다.
  • 로코코 패션의 선지자 중 한 명으로 퐁파두르가 입은 드레스는 물론이고 머리스타일까지 "퐁파두르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유행을 탔다. 후일 이 부풀린 머리는 리젠트 머리로 재해석되었다.
  • 생전에 엄청난 예술광으로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이름을 날렸다.
  • 코르티잔 문서의 인물 예시 문단에는 편의상 퐁파두르 부인이 기록되어있지만 퐁파두르는 어머니와 후배격인 뒤바리 부인과 달리 직접적으로 매춘을 한 적이 없었다. 그마저도 루이 15세와 첫 만남 당시 유부녀로서 불륜을 저질렀다는 도덕적인 결함밖에 없었다.

대중매체[편집 | 원본 편집]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