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태조

이공온(李公蘊, 974년 3월 8일 ~ 1028년 3월 31일)은 옛 베트남 대구월 이가의 초대 황제로, 묘호는 태조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태조 이공온은 와조제의 폭정에 지친 민심을 얻어 차기 황제로 추대되어 대구월의 새로운 왕조인 이가를 열었다. 그리고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강화시켰다. 또한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승룡(현재의 하노이)을 수도로 천도한 황제다.

974년 3월 8일, 대구월 북강 고법주 정방촌(현재의 박닌성 뜨선현)의 복건인 화교 호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이자 가문의 유력자였던 범씨 부인의 영향으로 3세부터 당시 황실의 국사이자 비니다류지파[1] 제12대 조사인 만행법사의 제자로 들어가서 엘리트 수준의 불교 교육을 받았다. 만행은 그를 제자로 받으면서부터 그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만행법사의 밑에서 교육을 마친 후에는 조정으로 가서 실력을 인정받고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끋내 당시 황제였던 와조제의 신임을 얻어 좌친위전전지휘사의 직위까지 오르게 됐다. 와조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공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자신의 딸을 그에게 줬지만 그는 주지육림에 찌든 폭군이었으며[2] 민심은 이미 그를 떠난지 오래였다. 이공온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다.

1009년, 와조제가 치질로 사망하면서 황실은 그의 동생들로 인한 내란으로 휩싸였다. 우전전지휘사인 완저와 기후인 도감목은 당시 황실에서 제일 명망높은 이공온을 차기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정하고 500의 병력을 이끌고 내란을 종식시켰다. 이후 그동한 와조제 치세에서 탄압받던 선종파 승려 계층들은 만행법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기 위한 정통성을 알리기 위해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樹根杳杳
木表青青
禾刀木落
十八子成
震宮見日
兑宮隠星
六七年間
天下太平

1009년 11월 21일에 황위에 오른 그는 연호를 순천으로 정하고 개국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마친 뒤 수도를 화려 (현재의 호아르)에서 대라성으로 천도하기로 한다.[3] 이 때 천도하러 대라성으로 배타고 하롱베이를 건너던 도중 대라성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전설 때문에 대라성은 승룡으로 개명됐다고 한다.

수도를 천도한 이후 이공온은 사회적 혼란의 방지를 위해 외척인 기존 여가 세력들과 쿠데타의 주모자였던 개국공신 세력들간의 갈등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각 계층 간의 대대적인 단결을 실시하여 일반 백성들과 소수 민족 세력, 기타 호족 세력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포용했다.

그의 치세에는 불교가 국교였고, 그에 따라 불교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불교의 대중화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각주

  1. 당시 대구월의 불교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무언통파가 주류였지만, 비니다류지파는 정통 인도식 불교를 따르는 선중파 계열이었다.
  2. 나랏일을 할 때면 무조건 드러누웠고, 죄인을 나무에 매단 뒤 그 나무를 베어서 낙사시키고, 송나라식 법통을 따르지 않은 승려들을 노리개로 삼았다.
  3. 이전 왕조였던 정가와 여가가 화려를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일찍 멸망한 것으로 판단되고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대라성이 용반호거의 지세를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1대 태조 이공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