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집단학살

1994년 4월 7일부터 1994년 7월 15일까지 3개월간 르완다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 후투족이 투치족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었으며 투치족 반군인 르완다 애국전선르완다 내전에서 승리함에 따라 종결되었다. 르완다 집단학살은 UN PKO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식민지 시기[편집 | 원본 편집]

르완다는 1980년 독일제국의 독일령 동아프리카 속으로 편입되어 식민지가 된다. 당시 독일은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관리할 역량의 부족으로 인해 르완다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패배하자 1916년. 벨기에가 르완다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편입시켰다. 벨기에는 식민지 내 갈등을 조장하고 이를 통해 식민지를 통치했는데, 당시 후투와 투치는 일종의 계급구조에 가까운 관계였고, 인종집단들은 아니었다. 후투와 투치는 상호간 교류나 결혼을 하였고 같은 종교를 믿고 같은 언어를 썼으며 결혼등으로 후투와 투치간 이동이 가능한 구조였다. 그러나 벨기에는 투치가 더 백인에 가깝다는 이상한 이유로 투치를 편애했고, 숫적으로 적었던 투치를 정부에 대거 채용해 식민지를 경영했다.

르완다 독립[편집 | 원본 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세계적으로 독립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르완다도 마찬가지라 1959년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벨기에가 철수하자 후투는 투치를 몰아내고 정부를 장악하였다. 1960년대는 투치에 대한 후투의 탄압과 폭력이 계속되던 시기였는데, 이 시기에 투치족은 폭력을 피해 주변 아프리카 국가로 도망쳐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난민들중 우간다로 도망친 후투족은 고향인 르완다로 돌아가려는 준비를 시작했는데 이게 바로 르완다 애국전선이었다.

1차 르완다 내전[편집 | 원본 편집]

그리고 1990년. 르완다 애국전선은 르완다를 공격했다. 이 전쟁은 1990년부터 1993년까지 계속되었고 르완다 애국전선은 르완다의 수도인 키갈리를 겨우 30km 남겨놓은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개입해 르완다 애국전선을 저지하였고 UN의 중재 하에 르완다와 르완다 애국전선은 협상을 시작해 1993년 8월 이루샤 협정을 맺으면서 1차 르완다 내전은 종결되었다.

하비야리마나 대통령 암살[편집 | 원본 편집]

....그렇게 내전이 종결되고 협정이 이행되면 이 문서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은 프랑스군이 철수하면 바로 수도가 함락될 상황에서 협상에 응하고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나, 르완다 내 급진주의자들과 과격파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그들은 대통령이 투치족과 협정을 맺어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대통령이 탄 비행기를 격추시켜 대통령을 암살했다. 물론 자신들이 했다고 밝히지는 않았고, 모든 죄를 투치족에 뒤집어 씌웠다.

학살주체[편집 | 원본 편집]

르완다 집단학살은 르완다 정부군도 참여했으나 주력이 된 것은 후투자치군 혹은 후투민병대라 불리는 민병조직이었다. 르완다 정부군은 후투민병대에게 총기 지급은 제한적이었으나 수류탄은 뿌렸고, 특히 중국에서 수입한 마체떼를 마구 뿌렸다. 이 마체떼는 애초에 학살을 목적으로 수입된 것이었다.

국제사회의 반응과 대응[편집 | 원본 편집]

국제 연합[편집 | 원본 편집]

적십자사[편집 | 원본 편집]

학살의 종결[편집 | 원본 편집]

르완다 애국전선은 계속 전진하며 마침내 키갈리를 점령하였고 르완다 정부는 르완다 애국전선이 장악하게 되었다. 르완다 애국전선이 르완다로 계속 전진해 오자 후투족은 투치족들이 복수할까 두려워 르완다 애국전선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으며, 이는 학살이 끝나고 후투족 난민문제를 일으켰다. 이 3개월 동안 50~80만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에는 르완다 애국전선에 협조했다는 명목으로 학살당한 후투족도 끼어있었다.

르완다국제전범재판[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