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

한화 이글스, LA 다저스와 現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투수. 2006년 혜성처럼 나타나 신인상최우수 선수상을 동시에 수상하고 미국 진출 전까지 평균자책점 1위 2회, 탈삼진 1위 5회, 다승 1위 1회, 29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 기록(2009~2010) 등 수많은 기록을 만들었다. 2012년 KBO 리그에서 데뷔한 선수 중 최초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 리그로 직행하였다.

아마추어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야구를 시작할 때 아버지로부터 야구 글러브를 받았는데, 그 글러브가 왼손잡이용이라 어린 류현진은 당연히 야구는 왼손으로 하는줄 알고 왼손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덕분에 원래 오른손잡이임에도 좌완투수가 되었다.

인천 동산고등학교 야구부에 소속되면서 1학년때부터 팀을 책임지며 2003년 청룡기때 32강, 16강, 8강, 4강 4경기에 연속으로 등판하여 팀을 결승으로 올렸다. 그러나 거듭된 등판으로 피로에 지쳐 결승전에서는 금민철이 대신 올랐으니 금민철이 부진하자 어쩔 수 없이 등판현진아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하였으나 피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때의 혹사 등이 주 원인으로 작용되어 2학년때는 1년을 쉬게 되었는데, 대학병원에서는 별 문제 아니니 푹 쉬라고 했지만 아무리 쉬어도 차도가 없어 찾아간 다른 병원에서토미 존 서저리 수술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이로 인해 오진으로 인한 반년 + 팔꿈치 수술 후 휴식과 재활을 포함 1년을 그대로 날리고 3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다시 팀의 주축선수로 자리잡으며 2005년 청룡기에서 16강, 8강, 4강 3경기를 연달아 던지며 모두 승리를 기록했고 특히 8강전 성남고전에서 9이닝 14삼진 완봉승을 이룩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러나 류현진에 대한 우선지명권을 갖고 있던 인천 연고 구단 SK 와이번스는 포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재원을 1차 지명한 후였다. 이후 2차 지명에서 롯데 자이언츠는 류현진 지명을 고려하다가 부상 우려로 최종적으로 나승현을 지명했다. 당시 초고교급 투수 빅3으로 한화에 1차 지명된 유원상, 기아 타이거즈에 1차 지명된 한기주와 함께 나승현이 꼽히고 있었으며 류현진은 그 다음이었는데, 결국 롯데는 나승현을 선택한 것. 그리고 나승현은... 그리고 롯데 다음 지명권을 갖고 있던 한화가 얼씨구나 하고 류현진을 지명한다. 롯데에서 류현진을 거르고 지명한 나승현은 2006년에 51경기 3승 16세이브에 평균자책점 3.48을 기록하면서 불펜진에서 활약하는가 싶었지만, 잦은 투구폼 교정과 자기관리 부족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치지 못 하면서 2015년에 방출되었다.[1][2]

프로 데뷔[편집 | 원본 편집]

2006시즌 충격과 공포의 데뷔[편집 | 원본 편집]

시즌 개막 전 구단에서는 유원상에 대해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유원상은 이후 6년간 한화 팬들 혈압 올리게 할 부진을 겪고 있었고, 반대급부로 류현진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2군 투수코치였던 최동원이 류현진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당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대표팀 감독으로 참가 중이던 김인식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류현진을 강력 추천하였다. 이런 적극적 추천에 김인식은 류현진에 대해 '10승을 할 재목'이라며 선발로 기용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수술 경력이 있는데 어떻게 10승을 하느냐, 한화 투수층이 얇으니까 나오는 이야기라며 그의 능력을 평가절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인식은 류현진을 2006년 4월 12일에 열린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기용시킨다.[3]

그리고 그는 이 경기에서 7 1/3이닝동안 10K 무실점의 충격적인 데뷔전을 치르며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데뷔경기 10 탈삼진은 류현진 이전에 선동열, 박동희만이 기록했던 대기록이다. 이후로도 착실하게 승수를 쌓으며 4월 23일 두산전에서 첫 완투승을, 6월 18일에는 통산 100탈삼진을, 7월 7일 삼성 라이온즈전에서는 첫 완봉승을 거두는 등 위력투를 발휘했다. 이런 괴물같은 활약에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양준혁은 “전혀 신인 같지 않았다. 10년차 투수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표정이나 구위, 구질 등 모든 면에서 타자를 압도했다. 한국엔 그런 투수가 거의 없다”고 말하였다.[3]

시즌 성적은 18승 6패 ERA 2.23이며 소화이닝은 201 2/3에 달했고 완봉 1회를 포함 완투 총 5회를 기록하여 이닝소화능력을 입증하였으며 탈삼진 204개개의 포스를 보여주었다. 18승은 1986년 MBC 청룡김건우와 함께 신인 최다승 타이기록(18승)이었고, 최연소 200이닝과 200탈삼진(역대 8번째) 돌파까지 이루어냈으며[3], 1991년 선동열 이후 15년 만에 달성한 투수 삼관왕이기도 하다.[4] 그외 특이한 기록으로 세이브가 하나 있는데, 이는 시즌 막바지에 플레이오프를 대비한 점검 차원의 등판이었다.

이런 미칠듯한 성적으로 그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신인왕과 시즌 MVP를 석권하였다.

비록 데뷔 첫해에 200이닝을 넘게 던지면서 피로가 쌓인 탓에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는 크게 부진했지만[3],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팀은 우승을 놓쳤지만, 3경기(선발 2경기)에 등판해 12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2.25을 기록하며[4] 선동열 감독이 '지키는 야구'를 모토로 내세우며 막강한 불펜진으로 승리를 지켜내는 삼성 라이온즈 투수진 상대로도 기죽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프로야구 2006 시즌 중에 열린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사회인 야구 선수들이 주축이 된 일본전에 선발 등판하였으나 대량실점하며 강판당하고 류택배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다. 이는 류현진에게 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택배원이라는 루머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2007~2009시즌[편집 | 원본 편집]

2007시즌 : 17승 7패 ERA 2.94 탈삼진 178 (211이닝) 2008시즌 : 14승 7패 ERA 3.31 탈삼진 143 (165 2/3이닝) 2009시즌 : 13승 12패 ERA 3.57 탈삼진 188 (189 2/3이닝)

승수나 ERA로는 점점 나빠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2007시즌 이후로도 계속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팀 선발진이 붕괴하면서 류현진 개인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져만 갔고, 수비와 볼펜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 이로 인한 영향이 성적지표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08시즌의 경우 소화이닝이 급감했는데, 이는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에 차출되었기 때문이다. 해당 대회에서 류현진은 캐나다전에서 9이닝 5안타 3볼넷 무실점으로 완봉승을 거두면서 팀의 승리에 기여했고[5], 결승 쿠바전에서도 선발로 등판하여 금메달의 주역이 되었다. 하지만 팀에 복귀한 후 한화는 그 유명한 류패패패패를 시전하며 5위로 시즌을 마친다. 류현진 외에는 믿을 투수가 없었던 것.

이는 2009시즌도 마찬가지여서, 류현진 혼자 고군분투했지만 류패패패패는 변하지 않았다. 때문에 3점대 중반의 평균자책점에도 불구하고 최다패 2위를 떠앉게 된다. 더군다나 2회 WBC의 대표팀에 참가하면서 페이스를 일찍 끌어올린게 독이 되었다. 하지만 후반부부터 본격적으로 기량을 만개하기 시작하여 7월 11일 LG전에서 무사사구 완봉승을 기록하고, 8월 19일부터 6경기 연속 QS를 기록하게 된다.

2010~2012시즌 최전성기[편집 | 원본 편집]

2010시즌 : 16승 4패 ERA 1.82 탈삼진 187 (192 2/3이닝) 2011시즌 : 11승 7패 ERA 3.36 탈삼진 128 (126이닝) 2012시즌 : 9승 9패 ERA 2.66 탈삼진 210 (182 2/3이닝)

2010시즌 류현진은 말 그대로 언터쳐블이었다. 2009시즌 막바지 6경기를 이어 사상 초유의 29경기 연속 QS 기록을 수립한다. 특히 류현진이 10시즌 달성한 QS 23회 중 22번이 QS+라는 점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애당초 현대 야구에서 선발투수가 평균자책점 3점대만 기록해도 훌륭하다고 하는데, 2점대도 아니고 뭔 마무리투수스러운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니 2010시즌은 말 다했다. 5월 11일 LG전에서 9이닝 1실점 17K라는 대기록을 쓰기에 이른다. 이는 기존 9이닝 최다 탈삼진인 선동렬, 이대진의 16개를 1개 차이로 넘어서는 것으로 특히 투수에게 매우 불리한 구장이라는 청주구장에서 달성한 기록이라는 데서 매우 의미있다. 이러한 대활약으로 2010년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덕분에 커리어하이 찍은 김광현은 지못미

2011시즌에는 부상으로 자주 이탈하였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의 모습은 보여주며 11승을 거두었다. 다행히도 팀에 류현진 외에 여러 선발 투수들이 떠오르면서 류패패패패의 공식은 벗어날 수 있었다.

2012시즌은 류현진의 위력과 불운을 동시에 보여준 해였다. 한화의 수비진은 답이 없는 한화의 수비를 아주 제대로 보여주며 류현진의 자책점을 열심히 늘려주는 데 일조했다.[6] 거기다가 타자들은 득점권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설사 나가더라도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덕분에 4월의 경우 4경기 출장해 30이닝을 소화, 0.90이라는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음에도 1승 1패 2ND라는 좌절스러운 결과를 받아들이게 된다. 저 2번의 ND는 각각 8이닝 무실점, 9이닝 1실점이었다.9이닝 1실점해서 죄송합니다. 8월에는 더 심해서 5경기 출장해 2점대 평균자책점을 찍었음에도 1승 3패 1ND. 7이닝 2실점했는데도 패하면 뭐 답이 없다. 특히 8월 23일 SK 와이번스 전에선 5실점을 했는데 자책점은 2점에 불과했다.그 2자책도 솔직히 수비 실책을 실책으로 안잡아줘서...

결국 10월 4일 시즌 마지막 등판인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10이닝 1실점 12K라는 후덜덜한 투구를 보여주고도 ND를 달성했다.10이닝 1실점해도 미안해해야하나... 특히 10회 무사 2루 직후 번트에서 야수선택으로 무사 1,3루의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했는데 3루수 땅볼과 삼진 등으로 막아냈다. 최종적으로 커리어 최초로 10승 달성에 실패하며 9승에 그치고 말았다. 대신 평균자책점은 2.66을 기록했다. 정상적인 팀이었다면 15승 내외에 2점대 초반 평균자책점은 기록하였을 것이 중론이다.

메이저리그 진출 및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편집 | 원본 편집]

2012시즌 종료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미국 진출을 시도한 류현진은 25,737,737.33달러라는 포스팅비를 받아내고 6년 3,600만 달러의 계약과 함께 LA 다저스로 진출탈출했다.

개막 전 미국 현지에서는 류현진의 러닝, 흡연 등을 이유로 걱정하는 분위기가 많았으나 성공적으로 선발진에 안착하는데 성공, 특히 시즌 초 잭 그레인키가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는 동안 클레이튼 커쇼와 함께 강력한 1,2선발을 구축, 무너져가는 LA를 지켜냈다. 농담아니라 4~6월 다저스는 커류패패패 공식이 통용될 정도였다.그래도 류패패패패에 비하면 승률이 2할이나 높다! 이후 그레인키가 복귀하며 3선발로 밀려났지만 커쇼나 그레인키나 사이영 위너임을 감안하면 3선발로 밀려나는 건 당연한 거다. 애당초 류현진이 못해서가 아니라 그레인키가 잘해서 밀려난 것. 특히 5월 28일 LA 에인절스전에서 9이닝 2피안타 7삼진으로 미국 진출 첫해에 완봉승을 거둔다!! 하지만 6월에는 5경기 출장해 모두 QS를 찍고도 1패 4ND.(...)LA 이글스

미국 진출 첫해인 2013시즌 류현진은 192이닝을 소화하며 14승 8패, ERA 3.00을 기록한다. KBO와 ML의 수준 차이를 감안할 때 최소 방어율이 1점 이상은 올라갈 것이라는 예측은 이렇게 빗나갔다.[7] 이후 플레이오프 디비전 시리즈 3차전에선 3이닝 4실점으로 부진, 큰 경기에 약한 징크스가 재현된거 아니냐는 걱정이 많았으나 내셔럴리그 챔피언십시리즈 3차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전에서는 7이닝 3피안타 4삼진 무실점으로 모두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그리고 팀은 귀신같이 연패하며 카디널즈에게 NL 우승을 내주는데...

2014시즌에는 3~4월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으나 4월 27일콜로라도 로키스전에서 5이닝 6실점(5자책)의 부진한 피칭을 보여주고 DL에 이름을 올렸다. 메이저리그 국제화의 일환으로 3월에 치른 호주 개막전에 등판한 것이 악영향을 끼친 듯. 이후 5월 21일 복귀하여 전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위력적인 모습으로 팀의 3선발로서 위상을 공고히 다졌다.하지만 타격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으며 폭망했다.

5월9월 부상으로 이탈하며 소화이닝은 152이닝으로 줄었지만 14승 7패 ERA 3.38로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13시즌에 비해 무실점 경기는 늘었지만 대신 초반에 대량실점하고 강판되는 경기도 덩달아 늘어난 것이 방어율 상승의 주요 요인이었다.

이후 2015시즌을 준비했지만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DL에 이름을 올렸고, 결국 어깨 수술을 받게 되며 시즌 아웃이 유력해졌다. 이후 2년간의 재활을 거쳐 2017년에 시범경기부터 컨디션 점검 차 마운드에 오르는 등 부활의 날갯짓을 펼 준비를 하고 있다.

2017년[편집 | 원본 편집]

2017년 3월 21일,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시범경기에서 NC 다이노스의 외국인 선수로 3년간 뛰면서 KBO 리그를 지배하고 돌아온 에릭 테임즈 상대로 2회에 루킹 삼진, 4회에 유격수 땅볼, 6회 무사 2루 상황에서 삼진으로 틀어막으며 테임즈 상대 3타수 무안타로 맥을 못 추게 만들어 버렸다.[8]

이후 정규시즌에 다저스 선발진에 이름을 올렸지만, 딱히 잘 던졌는데도 번번히 패배만 기록하였다. 타선이 제 때에 타점을 따내지 못 한게 원인이었다. 그래서 류현진의 첫 승을 염원하는 대한민국 스포츠 언론들과 야구팬의 속을 타들어가게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정도냐면, 2017년 4월 30일(한국시간) 현재 류현진의 9이닝 당 득점지원이 0.84점에 불과해서, 20이닝 이상 소화한 투수만을 놓고 봤을 때, 보스턴 레드삭스크리스 세일이 류현진보다 더 불운한 유일한 투수로 기록될 정도였다.[9]

하지만, 2017년 5월 1일(한국시간)에 열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홈 경기에 선발등판해 5⅓이닝 9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하면서 시즌 첫 승을 거두었다. 그 동안 침묵했던 팀 타선 역시 6회초에 2사 1,2루 상황에서 톨스가 가운데 담장을 넘지는 3점 홈런으로 5-1로 점수차를 벌리는 등 오랜만에 화력쇼를 선보이며 류현진의 승리를 도왔다.[10][9]

토론토 블루제이스 시절[편집 | 원본 편집]

트리비아[편집 | 원본 편집]

  • 팬서비스가 별로 좋지 않은 선수로 알려져 있다. 사진이나 싸인에 상당히 인색하다고 한다.
  • 김태균만큼은 아니지만 별명이 꽤 많다.
    • 류뚱 : 기본형 별명 1. 뚱뚱해서.
    • 류딸, 딸레기 : 기본형 별명 2.
    • 류택배 : 도하 참사 당시 루머와 연관된 별명.
    • C급 좌완 : 2011시즌 부상으로 일시 부진해서.
    • 류아무개, 류듣보 : 11시즌 류현진이 등판, 승리한 경기의 기록이 모 신문에 요약으로 실리면서 승리투수 아무개로 기재되었다.
    • 베이브 류스, 켄 그리피 류니어 : 2013시즌 이안 케네디를 상대로 3안타를 치자 미국 언론에서 붙였다.

각주

  1. 비운의 투수 나승현 끝내 방출…"그래도 포기하기엔 너무 젊다", 국제신문, 2015.12.03
  2. 롯데 유니폼 벗는 나승현…칼바람 맞은 6인, OSEN, 2015.12.01
  3. 3.0 3.1 3.2 3.3 ‘19세 괴물’2006년 삼키다…류현진 프로야구 최초 MVP-신인왕 석권, 동아일보, 2006.11.03
  4. 4.0 4.1 ‘볼 수 있을까’ 염종석 류현진 뛰어넘을 루키, 데일리안, 2017.04.05
  5. 류현진 ‘완봉투’ 캐나다 잠재웠다, 한겨레, 2008.08.15
  6. 실책으로 인한 실점은 자책점으로 기록되지 않지만 한화의 수비 중 실책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명백히 실책인 플레이들이 매우 많아서 류현진의 기록에 안 좋게 반영되었다.
  7. 류현진이 한화에서 손해본 ERA를 감안하면 1점 이상 올라간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니라는 말도 있다.(...)
  8. 류현진에 당한 테임즈, 연속안타 행진 마감, OSEN, 2017.03.22
  9. 9.0 9.1 힘낸 LAD 타선-불펜, 류현진 첫 승 지켰다, OSEN, 2017.05.01
  10. 류현진, 973일 만에 시즌 첫승…추신수 시즌 3호포, 연합뉴스, 2017.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