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존슨

로버트 존슨
Robert Johnson
Robert johnson.jpg
인물 정보
본명 로버트 리로이 존슨
(Robert Leroy Johnson)
출생 1911년 5월 8일
미국 미시시피주 헤이즐허스트
사망 1938년 8월 16일 (27세)
미국 미시시피주 그린우드
종교 부두교
활동기간 1932–1938
음악 활동
장르 블루스

로버트 리로이 존슨(Robert Leroy Johnson)은 20세기 초에 활동한 미국의 블루스 음악가이다. 블루스 사상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음악가로 불리며 후대의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불행하고 미스테리한 삶과 죽음으로 '악마와의 계약'등을 비롯한 다양한 소문에 휩싸였으며 27세에 요절함으로서 이른바 27 클럽이라는 도시전설의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로버트 존슨은 1911년 5월 8일 미시시피주 헤이즐허스트에서 어머니 줄리아 메이저 도즈(Julia Major Dodds)와 아버지 노아 존슨(Noah Johnson)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버트가 태어났을 당시 줄리아의 나이는 이미 30대 후반[1]이였으며, 로버트를 포함해 10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의 출산 이후 줄리아 도즈는 부유한 지주이자 가구장이였던 찰스 도즈(Charles Dodds)와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찰스 도즈와 백인 지주들간의 갈등이 격화되어 폭동으로까지 번지고, 찰스는 헤이즐허스트를 떠나 멤피스로 이주한다. 이때 찰스 도즈는 성을 스펜서(Spencer)로 바꾸며 이에 따라 로버트의 이름도 '로버트 리로이 스펜서'가 된다. 아내 줄리아와 자녀들은 헤이즐허스트에 남아 있었으나, 2년 뒤 자녀들도 아버지를 따라 멤피스로 이주하게 된다.

1919년 로버트는 멤피스에서 어머니가 거주하던 미시시피의 로빈슨빌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줄리아 도즈는 이 무렵 더스티 윌리스(Dusty Willis)와 재혼한 상태였다. 이 시기 주변에서는 주로 리틀 더스티(Little Dusty), 로버트 더스티(Robert Dusty)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2] 그는 당시 흑인으로서는 드물게도 인디안 크릭 스쿨(Indian Creek School)에 진학해 정규 교육을 받았다. 당시 그와 같이 수업을 듣던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로버트는 하모니카와 주즈하프[3]를 잘 연주하기로 유명했으며, 학교는 잘 안 나왔다고 한다.(...)

1929년 2월 17일, 19세의 로버트는 당시 16살이던 버지니아 트래비스(Virginia Travis)와 결혼한다. 이때 혼인 증명서에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이라는 이름으로 서명하며 이 뒤로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그러나 버지니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출산 도중 사망한다. [4] 마침 이 시기는 존슨이 살던 미시시피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델타 블루스"라 불리는 초기 블루스의 기반이 되는 장르가 형성되던 무렵이었다. 그에 따라 그가 살던 로빈슨빌에 초기 블루스의 거장인 손 하우스윌리 브라운이 이사해 오고, 블루스 기타리스트 아이크 짐머만(Ike Zimmerman)[5] 역시 그 근방을 순회하고 있었다. 로버트 존슨은 이들의 어깨 너머로 기타와 노래를 배우며 실력을 쌓아 간다. 그렇게 한창 기타를 배우던 무렵, 존슨의 행적이 갑자기 뜸해진다.[6]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존슨은 얼마 뒤 로빈슨빌에 돌아오는데, 기타 연주력과 가창력이 엄청나게 상승해 있었다. 이전까지는 손 하우스의 회고에 따르면 "하모니카는 잘 부는데 기타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못 치던 젊은 친구"였는데, 돌아온 존슨은 다른 뮤지션들이 따라가지도 못할 정도로 경악스러운 실력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존슨에게 그 유명한 "악마와 계약해서 기타 솜씨를 손에 넣었다"는 소문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1932년부터 로버트 존슨은 그 시기 블루스맨이 흔히 그렇듯 정착지 없이 미국 전역을 떠돌아 다니며 길거리 공연을 벌였다. 가깝게는 미시시피아칸소, 멀게는 텍사스, 시카고, 인디애나, 뉴욕, 심지어 캐나다까지 유랑하고 다녔다.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주기적으로 들르는 도시체크포인트에는 꼭 한 사람씩 깊은 관계의 여성을 만들어 두었다.[7] 사교적인 성격으로 동료 블루스맨들과 교류도 많았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존슨은 "재치있고 예의바르며 자유분방한 성격이고, 질박하게 생활했지만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지역에 도착하면 일단 큰 이발소식당을 찾아서 그 앞에서 공연을 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주로 자작곡보다는 기존 유행가를 커버해 공연했으며, 처음 듣는 곡이라도 곧바로 코드를 따서 연주할 수 있었다. 블루스 뮤지션이었지만 재즈, 컨트리 음악도 자기 스타일로 소화해냈으며 무대 매너도 뛰어나 처음 가본 마을이나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마을에서도 금세 인기인이 되었다. 이 덕에 떠돌이 신세임에도 돈 문제로 고민하진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공연 내내 관중들에게서 뒤돌아 선 채 공연하거나[8] 한창 공연하다 말고 갑작스레 연주를 멈추고 그냥 나가버리는 등 각종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1936년 경, 미시시피 주 잭슨에서 음반 가게를 운영하던 헨리 콜럼버스 스페어(Henry Columbus Speir)[9]는 우연히 로버트 존슨의 공연을 보고 그와 접촉, 당대의 유명 음반 제작자 돈 로우(Don Law)를 소개시켜주게 된다. 존슨은 로우의 주선으로 1936년 11월 23일 샌안토니오의 군터 호텔과 1937년 6월 19일 댈러스의 스튜디오에서 두 차례에 걸쳐 총 29곡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것이 로버트 존슨의 유일한 녹음이다. 녹음된 모든 곡은 존슨의 자작곡이며, 음반에 수록할 수 있게 3분 이하의 길이로 편곡되었다. 대부분의 당대 블루스 음악가들이 자신의 음악을 3분 아래로 줄이는 데 반감을 표했던 것과 달리 존슨은 편곡에 적극적으로 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 첫 번째 녹음에서는 주로 대중들에게 어필할 경쾌한 분위기의 곡들을 녹음했고, 두 번째 녹음에서는 좀 더 우울하고 내밀한 곡들을 녹음했다. 로버트 존슨은 이 때에도 모든 곡들을 마이크를 등지고 벽을 마주본 상태에서 녹음했는데, 돈 로우는 이를 보고 그가 굉장히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1] 1937년 3월에 그의 첫 싱글 음반 'Terraplane Blues'이 발매되어 5000여장이 팔렸다.

1938년 8월 16일, 로버트 존슨은 미시시피 주 그린우드에서 사망했다. 향년 27세. 사인은 불명. 그와 동행하면 블루스맨 써니 보이 윌리엄슨(Sonny Boy Williamson)의 주장에 따르면 존슨은 그린우드의 한 술집 여주인에게 추파를 던졌는데, 이에 분노한 여주인의 남편이 을 탄 위스키로 그를 독살했다고 한다. 윌리엄슨은 뭔가 수상쩍으니 위스키를 마시지 말라 조언했으나 존슨은 "내 위스키에 관심 꺼"라고 하고는 그대로 위스키를 병채로 들이켰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부터 고통을 호소하더니 3일간 그가 묵던 농장에서 심한 복통과 경련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고. 실제로 사망 당시 존슨과 같이 있던 사람의 주장이기에 일반적으로 이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12] 누가 독살했느냐부터 사고사, 병사, 총살 등 가설은 많지만 제대로 입증된 것은 없다. 일단 당시 카운티에서 판단한 존슨의 사인은 공식적으로 불명이다. 르플로어 카운티의 코넬리아 J. 조던(Cornelia J. Jordan)이 작성한 로버트 존슨의 사망진단서에 의하면 "대략 26세 가량의 흑인 남성이며, 2~3주 전에 밴조를 연주하기 위해 투니카 카운티에서 왔고, 다른 흑인들과 같이 농장에서 묵다가 3일 전부터 고통을 호소하다 사망했으며, 백인 농장주는 존슨이 자기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의사를 부르지 않았고, 농장주 본인은 개인적으로 매독에 걸려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등을 알 수 있다. 거창한 장례를 치를 형편이 아니었기에 카운티에서 자체적으로 시신을 매장했는데, 그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로버트 존슨은 델타 블루스의 최고봉으로 꼽히며 블루스 장르에 있어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살아생전에는 그저 흔하디 흔한 유랑 블루스맨 중 한 사람일 뿐이었지만, 사후 그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불어나 지금은 블루스를 논하는 데 있어 그를 빼놓으면 성립 자체가 안 되는 수준이다. 다만 이를 두고 그가 생전에는 완전히 듣보잡이었다가 죽은 뒤에야 유명해졌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큰 오해다. 존슨은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그를 두고 '악마와의 계약'같은 소문이 돌 정도로 유명했으며 유랑 블루스맨으로 수입원이 불안정했음에도 돈에 쪼들렸다는 기록이 없다.[13] 당대 유명 제작자와 만나서 2번씩이나 녹음 기회를 받고 싱글까지 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결코 평범한 무명 기타리스트는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Terraplane Blues'의 5000여장의 판매량도 결코 적은 게 아니라 1937년 당대의 음반 시장의 규모를 생각하면 생짜 신인으로서는 상당한 판매고라고 볼 수 있다. 1938년 로버트 존슨의 음반을 들은 컬럼비아 레코드 사의 관계자는 돈 로우와 접촉해서 존슨의 뉴욕 카네기 홀 공연을 추진했으나 존슨의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이 정도면 단순한 무명 가수가 아니라 당시 블루스맨으로서는 대단히 큰 성공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제대로 스타덤에 오르기 직전에, 지나치게 일찍 죽은 데다 그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블루스 자체의 인기가 쇠락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역시 빠르게 잊혀져 갔다.

존슨이 재발굴된 건 1960년대에 영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블루스 리바이벌 운동 때이다. 1961년 그의 곡 일부를 간추린 컴필레이션 'King of the Delta Blues Singers' 앨범이 발매되고 이 앨범이 서서히 입소문을 타며 유명해진 것. 기존의 블루스 곡들보다 한층 더 복잡하고 진보한 존슨의 곡들은 당대 블루스로부터 그 자양분을 흡수하던 신생 장르 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롤링 스톤즈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브라이언 존스와 함께 존슨의 음악을 듣다가 "이 사람은 누구랑 같이 기타를 치고 있는 거지?"라고 질문하자 존스가 "혼자 치는 거다."라고 답해 큰 충격을 받은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로버트 존슨의 기타 연주는 당시에는 물론이고 녹음된 지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꽤 인상적일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형태였다. 음악 잡지 롤링 스톤은 2008년의 '역대 최고의 기타리스트 100'에서 로버트 존슨을 5위로 선정했다. 미세한 음정 변화를 이용한 특유의 꺾기 창법 역시 소울 음악 양면으로 크게 영향을 끼쳤다. 앞서 언급된 키스 리처즈와 브라이언 존스를 포함해 에릭 클랩튼[14], 밥 딜런, 지미 헨드릭스 등 그를 추종하는 음악가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이러한 열광적인 반응에 힘입어 1970년 그의 남은 곡들이 King of the Delta Blues Singers Vol. 2 음반으로 발매되었으며, 1990년에는 로버트 존슨이 남긴 곡과 미발매 녹음들까지 모두 합쳐 현존하는 존슨의 모든 녹음물들을 집대성한 'The Complete Recordings'가 발매되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음원이 더 발견될 일은 없어 보이니 존슨의 음악은 이 음반으로 전부 들을 수 있다.'The Complete Recordings'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미국 의회도서관의 "National Recording Registry"에 선정되어 영구 보존되게 되었다. 현재는 로버트 존슨의 혈연들로 이루어진 재단이 그의 저작권을 관리하고 있다.

악마와의 계약[편집 | 원본 편집]

미시시피의 농장에서 일하던 청년 로버트 존슨은 위대한 블루스맨이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같지 않게 그의 기타 실력은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존슨은 실력부족을 이유로 공연장에서 쫓겨나 인적 없는 교차로를 쓸쓸히 건너고 있었다. 그는 다음 공연 연습을 위해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건너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뒤에서 누군가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놀란 존슨이 뒤돌아 보자 거기에는 커다란 몸집을 지닌 험상궃은 흑인이 있었다. 그는 존슨의 기타를 빼앗아 블루스 몇 곡을 가볍게 연주했는데, 마치 인간이 아닌 듯한 어마어마한 솜씨였다. 그 연주에 매료된 존슨은 흑인에게 자신에게 기타를 가르쳐 달라 부탁한다. 그 흑인은 존슨과 어떠한 계약을 맺은 뒤, 존슨의 기타를 조율하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 뒤 존슨은 거짓말처럼 최고의 기타 실력을 손에 넣는다.

수 년 뒤, 존슨은 당대 최고의 블루스맨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다른 블루스맨들은 따라올 수 없는 현란한 연주와 작곡 실력으로 동료들의 경외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묘한 소문도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는 사거리에서 악마와 계약해서 기타 실력을 손에 넣었고, 그 대가로 스스로의 영혼을 악마에게 저당잡혔다는 것이다. 실제로 존슨은 연주할 때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관객을 등지고 연주했고, 공연 도중 갑작스레 사라져 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의심은 점점 커져갔지만 존슨은 이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1938년,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 존슨과 동료 블루스맨들은 술집에서 진탕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자정 무렵, 그는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향하던 곳은 자신이 악마와 계약했던 바로 그 교차로였다. 교차로에 도착한 로버트 존슨은 순간 연기처럼 사라졌고, 그 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나이 향년 27세였다.

로버트 존슨은 그 음악적 업적 뿐만이 아니라 그 전설적 일화로도 유명한데, 교차로에서 악마와 계약해서 기타 솜씨를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15] 이 일화는 그의 생전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점점 살이 붙어 60년대가 되어서는 그 음악보다 "악마와 계약해서 기타 실력을 손에 넣었으나, 그 댓가로 영혼을 빼앗겼다."는 도시 전설로 흑인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존슨도 이 소문을 알고 있었으며, Crossroad Blues, Me and the Devil Blues등의 곡에서 이를 암시하는 가사를 썼다. 당시의 백인 사회에서는 흑인들의 문화가 자신들에게 유입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이런 흑인 문화에 기독교적 악마의 이미지를 씌워 당시 백인 청소년들이 이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막고자 했다.[16] 특이한 점은 흑인 사회에서는 이러한 악마 이미지를 대체로 고깝지 않게 여겨 부정하거나 무시했는데, 존슨의 경우에는 오히려 흑인 사회를 기반으로 확산된 전설이라는 것.

이런 전설과는 별개로 로버트 존슨은 그 유명세에 비해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아무리 당대 흑인에 떠돌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20세기 미국인 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정보가 없다. 동시대의 다른 블루스 뮤지션들과 비교해도 존슨의 삶은 알려진 것이 적다. 그래서 음악 연구자들을 상당히 고생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거주지를 계속 옮기고 이름도 계속 바뀌는 덕에 어린 시절을 확인하는 것도 꽤 시간이 걸렸으며, 블루스맨으로서 방랑을 시작한 이후에는 상세한 행적을 추적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로버트 존슨이라는 흔한 이름 덕에 동명이인과 혼동되는 건 덤. 확실하다고 할 만한 건 인구조사, 사망진단서 등의 공식 서류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 정도인데, 이 증인들도 완전히 믿기엔 무리가 있으며[17] 그나마도 현재는 다 죽고 없다. 심지어 공식 서류들 사이에서도 상호 모순이 있다.(...) 이쯤되면 그에 대한 온갖 전설들이 떠도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존슨의 이른 죽음은 훗날 생겨난 "뛰어난 뮤지션들은 27세에 죽는다"는 27 클럽이라는 또다른 전설의 모티브가 되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사용 기타는 깁슨 L-1. 현존하는 로버트 존슨의 모든 음원들은 다 이 기타로 녹음되었다. 깁슨은 1990년대부터 이 기타를 로버트 존슨 헌정 모델으로 제작, 판매하고 있다. 이외에 보유한 다른 기타가 있었는지는 불명.
  • 로버트 존슨이 매장된 위치는 불명이지만, 후대의 음악가들이 그가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들에 묘비를 세웠다. 총 3개 세워졌는데 모두 위치가 다르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존슨이 매장된 곳은 셋 중 어느 곳도 아닐 확률이 높다고 한다.(...)
  • 공식적으로 로버트 존슨이라고 확인된 사진은 2장으로,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세간에 공개되었다. 이외에도 존슨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찍힌 사진이 더 있으나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 로버트 존슨이 악마와 계약했다는 전설이 있는 교차로는 멤피스클락스데일 두 곳에 있으며, 서로 자기 교차로가 진짜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중적으로는 클락스데일의 교차로가 더 잘 알려져 있다.
  • 1986년 영화 "Crossroad"는 존슨의 관련 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라이 쿠더가 음악을 담당했고, 스티브 바이가 출연해 기타를 연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 법적으로 인정된 자손이 있다. 1992년에야 밝혀졌는데 존슨의 여자 관계가 워낙에 복잡한데다 유해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증명에 온갖 소동이 있었지만 결국 친자로 확인되었다.

각주

  1. 1874년 출생
  2. 그러나 1920년의 인구 조사와 학교의 인적증명서에는 여전히 로버트 스펜서로 기록되어 있다.
  3. 입에 물고 튕겨 소리를 내는 편자 형태의 원시적인 현악기.
  4. 많은 연구자들은 버지니아의 죽음이 존슨이 전업 뮤지션으로 살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라고 추측한다.
  5. 주로 자정 이후 공동묘지에서 기타를 연습해 유령에게서 기타를 배운다는 소문이 난 인물.
  6. 몇몇 연구자들은 이 시기 존슨의 얼마 안 되는 기록과 언행 등을 고려해 봤을 때, 헤이즐허스트로 돌아가 자신의 친부를 만나려 했을 확률이 높다고 주장한다.
  7.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존슨은 확인된 것만 8개 이상의 가명을 쓰고 다녔다.
  8. 본인은 남들이 자신의 기타 테크닉을 베껴가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9. 로버트 존슨 외에도 많은 블루스 뮤지션들을 발굴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블루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0. 당시 주류였던 78rpm 음반은 한 면에 3분 이상은 담을 수 없었다. LP가 대중화된건 존슨이 죽고 나서도 약 20년 정도 뒤이다.
  11. 기타리스트 라이 쿠더는 이에 대해 존슨이 벽에 기타 소리를 반사시켜서 더 나은 음향을 얻으려 했다는 가설을 세웠다.
  12. 존슨이 대략 3일동안 복통과 경련에 시달리다 죽은 것은 주변의 증언이나 당시 사망진단서 등을 보았을 때 사실로 추정된다. 그러나 술집 주인이 독살했다는 등의 내용은 윌리엄스의 주장 외에는 별 근거가 없다.
  13. 물론 본인이 사치와는 거리가 먼 소박한 생활을 했던 것도 무시할 수 없다.
  14. 클랩튼은 아예 2004년 Me and Mr. Johnson이라는 로버트 존슨의 커버곡으로만 이루어진 음반을 낼 정도로 존슨의 열광적인 팬이며, 연주 스타일도 존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5. 당시 미시시피의 흑인들 사이에서는 자정 즈음에 교차로에 가면 악마와 만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16. 로버트 존슨 본인의 종교는 부두교로 알려져 있다.
  17. 예를 들어 로버트 존슨의 경력 초창기를 직접 목격하고 이후에도 블루스맨으로서 종종 교류한 손 하우스는 존슨이 악마와 계약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