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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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러시아어: Русская революция, 영어: Russia Revolution)은 1905년부터 1917년 사이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모든 혁명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1] 전제정치 타도, 농노 해방, 민족차별 철폐를 주요 과제로 내세웠고, 부르주아 혁명에서 시작하여 사회주의 혁명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고,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건들 중 하나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당시 러시아 제국은 선왕인 알렉산드르 3세가 49세의 나이로 급사했고, 결국 장남인 니콜라이 2세가 26세의 나이로 차르가 되었다. 근데 이 사람은 심성이 나약하고 섬세한 성격에,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권력, 지적인 대화와 토론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정치인들의 권력 다툼과 공식적인 행사 나가는 것을 매우 질색하던 사람이었고, 성격 강한 사람들도 싫어해서 유하고 겸손한 사람들만 데리고 다녔다고. 그래서 왕위에 있으면서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황제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황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독일 출신이라서 국민들한테 독일 여자라고 불렸다. 거만하고 냉정한 성격 때문에 인기는 별로 없었고, 정신적으로 불안한데다 약과 미신에 집착한 사람이었다. 성격도 잘 맞고 서로에게 매우 헌신적이어서 부부금슬은 매우 좋았다고 한다. 황실 바깥 세상과 고립되어 있는 타입이었다. 천생연분이라 둘 다 똑같이 여론, 지식인이란 단어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진행[편집 | 원본 편집]

1차 혁명[편집 | 원본 편집]

1905년, 피의 일요일[2] 사건을 계기로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후 전국적으로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농민들도 들고 일어나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 때 처음으로 병사들도 반란을 일으켜서 6월에는 포템킨 호의 반란이 발생하게 된다.

10월에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총파업이 일어났고, 무려 노동자 200만 명이 파업에 참여해 공장, 전화, 철도 등이 전부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제, 민주 공화정 설립, 제헌 의회 소집 등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했고, 농민들 역시 반지주 운동을 일으켰고, 전문직 종사자, 학생들까지 전부 동참하여 시위에 가담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10월 선언을 통해 입헌군주제 비스무리한 공약을 걸면서 혁명이 점차 종식되었다.

하지만 혁명의 결과는 실패였는데, 왜냐면 니콜라이 2세는 말만 저렇게 해놓고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 투표권 역시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투표권이 없었고, 나중에 투표권이 주어지긴 했지만 지주 1명의 투표권이 노동자 45명의 투표권과 같을 정도로 심각한 불공정 선거였다. 또한 혁명을 일으킨 노동조합 역시 군대와 경찰에 의해 탄압되어 많은 이들이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스톨리핀이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워줄만한 정책들을 이것저것 마련한다. 아예 농민들을 부르주아 계급으로 만들어버리자는 계획으로, 토지 개혁, 의무교육 실시, 전국민 보건 계획, 보험 제도 등을 실시했다. 이렇게 혁명 세력에 대한 지지층을 와해시킨 다음, 혁명 세력들을 적극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10월 선언에 내세운 공약은 2년만에 흐지부지되었고, 이 과정에서 15,000 여명이 처형당했고, 25,000 여명은 부상, 45,000명은 망명을 가기도 했다.

2차 혁명[편집 | 원본 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던 1917년에 일어난 2차 혁명. 2월 혁명 또는 3월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3] 노동자, 학생, 시민들의 봉기로부터 시작했다가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규모가 급속도로 커졌다. 결국 제정이 무너지면서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국가 권력이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로 양분되면서 혼란이 잇따르게 되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러시아에는 혁명적 분위기가 감돌았다. 1905년 혁명이 실패하고 줄어들었던 파업 규모는 1912년부터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고, 1914년 상반기에는 105만 여명이 파업에 참여하면서 1905년 이후 최대 규모를 찍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애국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되었는데, 1914년 11월 볼셰비키파 두마 의원들이 반역죄로 체포되자 분위기가 싹 사라졌다. 또한 기존 공장 노동자들이 전선에 동원되고,[4] 그 자리를 농민, 여성, 어린이들로 채워지면서 기존 노동조직들이 무력화 되었다.

1915년 러시아 정부는 파업, 태업과 같은 노동쟁의는 독일을 이롭게 하는 반역이며 조국방위를 위해 헌신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혁명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전쟁이 다시 혁명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계속된 패배와 후퇴로 러시아군의 조직력이 약화되자 병사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그 와중에 제정러시아 정부는 병력이 부족해지자 사상범들까지 전선으로 보냈고, 이 병사들이 전선의 병사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후방에서는 식량부족으로 봉기가 일어났고, 전쟁으로 인해 노동조건이 악화되자 다시 파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15년 8월 10일에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지역에서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발포로 16명이 사망했다. 이 와중에 일부 병사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1916년 말이 되자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이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파업하는 공장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몇몇지역에서는 군대가 경찰을 공격하였다. 1917년 1월이 되자 봉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반란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1917년 2월 27일. 러시아군 총사령부는 전선의 병력을 빼내 페트로그라드[5]의 봉기를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볼린스키 연대의 병사들은 진압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볼린스키 연대는 리토프스키, 프레오브라진스키 연대에게 반란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정오가 되자 파블롭스크, 볼린스키, 리토프스키, 프레오브라진스키 연대가 반란에 참여한 것이 확인되었다. 장갑차부대가 반란에 참여하면서 반란에 저항하던 부대들도 항복했다.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던 하발로프 장군이 크론슈타트 요새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크론슈타트 요새는 반란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하발로프 장군이 차르를 호위하던 부대에 보낸 전신에 따르면 하발로프의 휘하에는 5개 카자크 대대, 2개 포병중대, 해군부 방위군 부대정도만이 남았으며 대부분의 부대가 혁명세력에 참여하거나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전화국을 접수해 다른 지구와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페트로그라드 내의 모든 포병대가 접수되었고, 병사들이 순회하며 장교들을 체포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쟁성 장관은 현재 통제가능한 부대들로는 반란을 진압할 수 없다고 내각에 보고했다. 밤이 되자 반란에 참여한 부대들이 타우리데 궁전을 접수했으며 타우리데 궁전을 방어하던 부대는 도망치거나 반란에 합류했다. 의외로 페트로그라드 방어를 책임진 하발로프 장군은 28일 아침에야 체포되었는데 이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하발로프를 아무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페트로그라드 밖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모스크바에 주둔중이던 모스크바 연대는 내부충돌 끝에 반란에 합류하였고, 크론슈타트에 주둔 중이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크론슈타트도 혁명세력에 함락되었다. 27일 밤이 되자 발트함대는 제독이 두마 임시위원회를 지지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1917년 2월 27일 밤 타브리다 궁전에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Петроградский совет рабочих и солдатских депутатов)"가 수립되었다.

3차 혁명[편집 | 원본 편집]

1917년 11월 블라디미르 레닌이 일으킨 혁명으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정부가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6]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10월 혁명으로 불리는데 이는 러시아제정이 쓰던 달력이 그레고리력이 아니라 율리우스력이었기 때문이다.[7] 소련 시기 공식명칭은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이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혁명으로 볼셰비키는 모스크바, 페트로그라드와 같은 주요 대도시와 혁명을 지지하던 러시아 군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농촌 지역과 극동, 시베리아, 우크라이나 등 제정 러시아의 변방은 장악하지 못했으며 당시 농민들의 지지를 받던 사회혁명당과 결별하면서 농촌 지역에 대한 장악력도 떨어졌다. 이 결과 러시아혁명은 적백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 정치경제적으로는 전시공산주의체제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한편 독일과 종전을 맺으며 러시아는 독일에게 대규모의 영토를 내주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발트해 국가들과 폴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러시아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라트비아는 라트비아 소총수 소비에트 사단이 창설되어 붉은군대에 합류하였고,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라트비아 군인들은 남러시아 백군에 합류하였다. 동시에 라트비아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 국가를 건국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에스토니아 탈린은 10월 혁명 당시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해당 혁명으로 퇴위한 니콜라이 2세는 남동생에게 차르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남동생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 1918년에 50세의 나이로 처형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또한 그의 아내와 자녀 역시 처형당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당시까지만해도 폴란드는 러시아의 영토였기 때문에 1905년 1차혁명에서는 바르샤바에서도 봉기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봉기에 호응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당의 당수이자 독일사회민주당의 주요한 사상가인 로자 룩셈부르크도 러시아로 넘어가 봉기에 참여하였다 체포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후 1917년 혁명을 지지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하지만 임팩트가 굉장했던 건 2·3차 혁명이라,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면 1917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알아듣는 경우도 많다.
  2. 당시 불평등하고 열악한 상황에 놓인 러시아 노동자들이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을 하기 위해 비폭력 행진을 벌였다. 근데 거기다 군대와 경찰들이 총을 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계기로 차르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떨어졌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3. 2월율리우스력을 기준으로 한 날짜.
  4. 이 때 투입된 노동자들이 전체 국민의 1%인 150만 명이었다.
  5.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이다.
  6.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정권은 파리 코뮌으로 보고 있다.
  7. 러시아에서 그레고리력은 혁명 다음해인 1918년 1월 31일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