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석기

董錫琪. 대한민국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그리스도의 교회 전도자. 199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1년 4월 6일 함경남도 북청군 이곡면 초리에서 동주홍과 김씨 부인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유림 집안에서 자라나 어렸을 때 서당을 다녔고 17살 때 김씨와 결혼했다. 이후 상경하여 하급 관료로서 일했지만 오래지 않아 사직하고 1903년 하와이 노동자로 이주했다. 그는 농장에서 매우 성실하게 일했고, 농장 주인은 그런 그를 높이 평가하고 소원이 뭔지를 물었다. 그러자 동석기는 "서양 학문을 공부하고 싶다"고 답했고, 주인은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9개월 만에 그를 노동자 생활에서 청산하게 해줬다.

동석기는 스물 다섯의 나이에 서양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1년만에 졸업하고 중학교도 1년만에 졸업하고 고등학교까지 1년만에 졸업했다. 농장주인은 그런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감리회 계통의 미국 노스웨스턴(Northwestern) 대학에 입학하게 해줬다. 그는 당초 법학을 공부했지만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기로 했다. 이후 감리회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는 게렛 신학교에 입학해 성실하게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미국감리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3년 12월에 귀국한 동석기는 원주지방 순행 목사로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14년에 인천 내리교회 목사를 맡았고 1917년 서울 마포교회 목사를 맡았으며, 1919년에 수원 남양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자신이 관할하는 사강, 비봉 등지를 순회하며 교인들의 신앙 생활을 고취시켰다. 그러는 한편, 그는 교인들이 민족의식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평소 박희도와 절친한 사이였고, 수원 지방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김세환과도 빈번하게 교류했다. 이 세 사람은 조선 독립에 관한 논의를 주로 했는데, 특히 동석기가 미국 유학을 다녀온 경험을 토대로 세계 정세에 밝아 모임을 이끌어가곤 했다고 한다.

1919년 1월 20일, 동석기는 박희도에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설명했다. 이에 관심을 품은 박희도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심하고 여러 인사들을 모아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준비를 갖췄다. 이때 동석기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했지만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 되지는 못했다. 그는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의 학생 대열에 참가했고 독립선언식을 마친 뒤에는 민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남대문으로부터 의주로, 정동 미국 영사관 앞, 대한문 앞, 광화문, 서대문을 거쳐 프랑스 영사관, 총독 관저 등을 다니며 시위를 주도했다. 그리고는 미국 총영사관을 찾아가 한민족의 민족자결운동의 정황을 파리 강화회의에 타전해줄 것을 의뢰했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된 동석기는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제의 압력으로 남양교회 목사직을 사임한 그는 충남 청양교회로 내려가 3년간 시무한 뒤 1922년 만주로 건너가 봉천의 영고탑교회에서 1년간 시무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영혼의 독립이 일본으로부터의 물리적인 독립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1927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주에 있는 신시내티 성경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곳은 미국 환원운동(還元運動)의 중심지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였다. 환원운동이란 사분오열된 오늘의 교회가 각자의 주장과 교리를 버리고 성경의 교훈과 교육 원리대로 돌아가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주님의 교회를 세우자는 운동이다.

동석기는 환원운동을 접하고 자신의 뜻이 그리스도의 교회와 일맥상통하다고 판단하고 침수세례를 받은 뒤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으로 입교했다. 이후 1929년 감리교 목사 자퇴원을 제출하고 그리스도의 교회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귀국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국 남부를 순회하던 중 알리바마 주에 있는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인 T.B. 톰프슨과 만났다. 그는 톰프슨으로부터 "예배 시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부당하다"는 말을 듣고 이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톰프슨의 지원을 받고 1930년 11월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함경도 북청군으로 가서 그리스도의 교회 교리를 따르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함전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1931년에 시흥리 교회를 세웠고 1932년에 수동리 교회, 1936년에 임자동교회를 세웠으며, 이외에도 맹경리교회, 진산리교회, 수서리교회 등을 설립했다.

8.15 광복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세워지면서 북쪽에 개척해뒀던 교회들을 모두 상실하게 되자, 동석기는 남한에서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 설립한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중심으로 환원운동과 그리스도의 교회 개척에 진력했다. 그는 서울에 4개의 교회를 세웠고 부산에 1개의 교회를 세웠다. 이후 1949년 선교비 모금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귀국할 수 없게 되자 조지아주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에 훈련받고 있는 한국인 장교들에게 전도했으며, 휴전 후에도 선교사 파송과 선교비 모금을 위해 노력했다. 1966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말년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내다가 1971년 12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동석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