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의 역전

Reversal of Alliances[1]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으로 슐레지엔 지방을 상실한 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프로이센에 대한 복수를 천명하며 내정개혁 및 군비강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얽히고 섥힌 유럽의 동맹관계에서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이긴다 하더라도 프로이센의 동맹국들, 특히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영원한 숙적 부르봉 프랑스와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18세기 중반 서부-중부 유럽의 대립은 부르봉家(프랑스를 중심으로 스페인 가세)-프로이센 동맹과 영국-합스부르크家(오스트리아 중심으로 이탈리아 북부 공국들 및 나폴리 왕국) 동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야 백년전쟁 이래 계속된 앙숙이자 세계패권을 다투는 라이벌이었으며, 동시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15세기 이래 서유럽과 이탈리아 패권을 놓고 거듭해서 충돌했던 적대국이었다.

이러한 전통적 외교관계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종결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각국의 상황[편집 | 원본 편집]

  • 오스트리아 : 마리아 테레지아는 지난 전쟁에서 동맹국 영국이 유럽의 전쟁에 대해 손가락만 빨던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영국이 유럽 대륙을 아주 방관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스트리아가 원하던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다.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 프랑스로 대표되는 부르봉 왕가만을 적으로 돌렸으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계기로 신흥강국 프로이센까지 상대하게 되면서 국력의 열세를 느끼게 되었다. 즉, 오스트리아에게 필요했던 건 대륙에서 자기들과 함께 싸워줄 동맹국이었다.
  • 영국 : 유럽의 전쟁에 깊숙히 관여하지 않고 해외 식민지 정책에서 프랑스와 충돌하던 영국이었지만 1714년 이래 하노버 왕조가 성립되면서 칼레 상실 이후 약 2세기만에 유럽 영토를 확보(정확히는 하노버 공국은 별개의 국가로 동군연합)하였다. 그러나 지난 전쟁을 통해 적대국 프랑스와 그 동맹국 프로이센 사이에 하노버 공국이 끼인 형태가 되면서 하노버 공국에 가해지는 위협을 어떻게든 경감시켜야 했다.
  • 프랑스 : 프랑스 역시 북미, 인도에서 영국과 식민지를 두고 충돌하고 있었지만 영국과 달리 대륙국가였기에 유럽의 전쟁에 개입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당시 프랑스의 유럽 동맹국이란게 오스트리아와 충돌하며 일만 벌리는 골치덩어리 프로이센, 그리고 옛날의 영광을 잃고 완전히 쇠락한 스페인뿐이었단 것이다. 스페인이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로 부르봉 왕가가 차지하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했지만 프로이센은 그러지 못했다.
  • 프로이센 :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지난 전쟁에서 슐레지엔을 획득한 이후로도 확장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전체적으로 동맹 파트너의 교체 필요성은 오스트리아가 가장 컸고, 영국과 프랑스가 그 뒤를 이었으며 프로이센은 상대적으로 그 필요성이 낮아서 외교적 격변기를 앞두고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편이었다.

동맹 교체[편집 | 원본 편집]

마리아 테레지아의 뜻을 전달받은 주 프랑스 대사 카우니츠 공작은 1756~57년에 걸쳐 프랑스 궁정에 접근하여 끈질기게 동맹을 권유했다. 그리고 프랑스 궁정의 실세였던 마담 드 퐁파두르 역시 카우니츠 공작이 제안한 동맹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루이 15세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이 과정에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에 반감을 가진 프랑스 내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오랜 기간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국이 되려는 찰나 태클을 걸며 좌절을 안긴 것이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아닌가? 그러나 곧 대규모 전쟁이 닥친다는 것은 필연이었고, 프랑스 정부와 왕실도 프로이센이 벌이는 불장난에 언제까지 휘말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가 오스트리아는 동맹 조건으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벨기에)를 넘겨주겠다고 제의했으니 그 진의는 분명했다.

결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1757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공수동맹을 체결, 수 세기에 걸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연대했다. 이로서 유럽대륙의 양대 강대국이 공동전선을 펼치게 된 것이다! 이는 유럽 내 수많은 군소세력들,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적대하고 있던 프로이센에게 실질적이며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제야 움직이며 영국과 접촉했다. 영국 역시 상술한 대로 하노버 공국이 프랑스의 전면적 위협에 노출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프로이센을 이용하려 했고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양국간 공수동맹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동맹교체로 모든 준비를 끝마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복수전을 천명하며 러시아까지 포섭한 후 프로이센에 대한 전쟁에 돌입했으며, 대륙 문제를 해결한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와 인도에서 자국의 운명을 건 결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7년 전쟁이었다.

후일담[편집 | 원본 편집]

7년 전쟁 기간동안,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동맹의 역전에 의해 새로 성립된 동맹관계는 철저히 지켜졌다. 그만큼 동맹의 교체는 그동안의 국가적 감정을 무시할 정도로 각국에게 꼭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한편, 전쟁기간 동맹을 보다 결속, 강화하기 위해 마리아 테레지아는 부르봉가와 적극적으로 왕실간 혼인을 추진하였다. 당장 1760년 황태자였던 요제프(후일의 요제프 2세)는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공주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였으며 5년 뒤에는 차남인 레오폴트([후일의 레오폴트 2세)는 부르봉-스페인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왕비가 2명 연속으로 부르봉 가문에서 배출된 것.

뒤이어 1768년~70년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공주들이 줄줄이 부르봉가로 시집을 갔다. 먼저 1768년 마리아 카톨리나가 스페인 페르난도 4세의 왕비가 되었고, 이듬해인 1769년에는 마리아 아말리아가 파르마의 페르디난도 1세와 결혼했다.

그리고 1770년,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아 안토니아가 결혼하여 프랑스의 왕세자비이자 차기 왕비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이 등극하게 되는 충공깽한 일이 벌어진다! 프랑스 역사상 오스트리아 출신이 왕비가 되는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루이 오귀스트는 이후 즉위하면서 루이 16세가 된다. 그렇다면 마리아 안토니아가 누군진 뻔하지 않는가? 그렇다. 마리 앙투아네트다.

  1. 원래 숙어였으나 이 사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