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무지덧널무덤

  • 積石木槨墳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관 위에 나무로 된 덧널을 씌우고, 그 위에 돌무지와 흙(봉토)를 덮어 봉분을 만든 무덤 양식을 의미한다. 다른 별칭으로는 적석목곽분이나 적석봉토분 등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의 돌무지덧널무덤[편집 | 원본 편집]

신라 전기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경주 일대에서 오릉이나 대릉원 일대에 있는 무덤들, 그리고 계림월성 사이에 있는 대형 고분들의 양식이 죄다 이 양식으로 되어 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이다.

다음은 발굴이 이루어진 돌무지덧널무덤들의 목록

  • 금관총
  • 금령총
  • 서봉총
  • 식리총 : 여기까지는 해방 이전에 발굴된 고분들이다.
  • 천마총
  • 황남대총
  • 인왕동 고분군
  • 경주 쪽샘지구
  • 황남동 120-2호분 : 2020년 5월 15일, 피장자가 금은 장신구 일체를 착용한 채로 발굴되어 주목을 받았다. 금동신발 한 쌍과 함께 금동관과 금드리개, 금귀걸이, 가슴걸이, 은허리띠, 은팔찌, 구슬팔찌, 은반지 등이 함께 나왔다. 고대 삼국시대로선 이례적으로 170cm의 큰 키를 지닌 여성으로 추정된다 한다.일각에서는 지증왕의 부인 연제부인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금동관과 귀걸이, 가슴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신발 등 장신구를 모두 갖춘 형태로 출토된 것은 1973∼1975년 발굴 조사한 황남대총 이후 처음이다. 특히 그간 머리에 착용하는 형태로만 추정했던 금동관이 피장 상태로 볼때 망자의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1]

특성[편집 | 원본 편집]

  • 땅을 파고 관을 안치한 뒤, 부장품을 넣은 덧널을 추가로 둔 다음 위에 돌무더기를 올려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흙으로 봉토를 덮는 것이 기본적인 양식이다. 여기서 덧널의 깊이에 따라 지상식, 반지하식, 지하식으로 구분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덤의 크기가 작아서 별도의 덧널이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그냥 단순돌무지식이라는 별도의 분류를 쓴다. 이외에 덧널의 갯수에 따라 다시 세부적인 분류가 나뉘는데 1개인 외덧널식, 독곽식, 바깥덧널식의 양식이 존재하며, 2개인 겹덧널식, 양곽식, 쌍곽식으로 구분된다. 이 외에 3개 이상인 여러덧널식이 존재하기도 한다.
  • 한번 무덤을 만들게 되면 추가로 합장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돌무지덧널무덤은 홀무덤을 원칙으로 한다.(물론 따라 죽어서 셀프 순장하는 경우라면 합장이 가능하기는 하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도굴이 사실상 불가능하여(도굴을 하려면 중장비가 필요하다. 아니면 대규모 인력동원을 하거나) 발굴 시 유물이 상당히 잘 보존된 경우가 많다. 대신 굴식돌방무덤과 같이 내부에 벽화를 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 한국의 돌무지무덤의 경우 상당히 큰 돌무지를 가진다. 거기에 봉토를 씌우는데, 이 봉토의 여부가 고구려돌무지무덤 양식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쿠르간[편집 | 원본 편집]

  • Kurgan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발견되는 스키타이계 유목민의 무덤 양식. 카자흐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 일대에서 주로 발굴된다. 지하에 묘실을 만들고 위에 원형의 돌과 봉토를 쌓는 방식으로 봉분을 만든다. 그리고 맨 위에 돌로 된 비석을 세우는 특징이 있다.

특이점[편집 | 원본 편집]

  • 지하에 묘실(구덩이)을 만들고 오두막 형태의 목조 구조물을 만들고 위에 원형의 돌과 봉토를 쌓는 방식으로 봉분을 만든다. 구덩이의 깊이는 4~6m로 꽤 깊은 편이며, 목조 구조물 아래 관(널)과 부장품이 안치된다. 봉분의 위에 돌로 된 비석(돌막대, 혹은 석상)을 세우기도 한다.
  • 오래 전부터 도굴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발굴을 해 보면 상당히 많은 껴묻거리들이 발견된다. 이는 내부의 목조 구조물이 붕괴하면서 봉분 자체가 붕괴하여 지속적으로 빈 틈을 메꾸어 주고, 추운 겨울의 특성상 땅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진흙과 같은 미세한 입자들까지 무덤 속으로 유입되면서 꽤나 치밀한 지질을 형성하기 때문. 유물들의 경우 대체로 황금으로 된 부장품들이 많으며 유목민족답게 상당히 많은 말의 뼈가 발견되는 편이다. 또한 인골이 여럿 함께 발견되어서 순장의 풍습이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신라 무덤양식의 차이[편집 | 원본 편집]

흔히 신라왕족 흉노설을 주장하는 경우 이 무덤의 형태가 동일한 양식이라는 이유로 신라의 무덤양식이 북방의 유목민족에게서 기원하였고, 더 나아가 신라왕족의 기원이 흉노라는 말까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과 구르칸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주요한 차이를 보여준다.

  •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널과 덧널 모두 지상에 널을 안치한 뒤 그 위에 돌과 흙을 쌓는 지상식이 주류지만 구르칸은 구덩이를 꽤 깊게 판 뒤 그 안에 묘곽을 축조하여 돌과 흙을 쌓는 지하식이다.
  • 덧널의 축조 양식에서도 차이가 꽤 큰데 스키타이 방식은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통나무의 네 귀퉁이를 엇갈리게 짜맞추는 방식으로 축조되지만 신라의 경우는 각목이나 판자를 큰 상자처럼 조립한 뒤 그 안에 같은 방식으로 다시 널을 짜서 넣는 방식으로 시베리아나 스키타이 양식과는 차이가 크다.

이러한 이유로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스키타이의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신라 자체적으로 발전시킨 신라만의 독특한 무덤양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히려 한반도 북방과 만주 지역에서 자주 발견되는 돌무지무덤 양식이 신라에서 자체적으로 발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