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79년 7월 LAX에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은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의 보잉 747이 소련의 영공을 침범하여, 소비에트 연방 공군의 전투기에 의하여 격추된 사건이다. 당시 탑승 승객과 승원 269명 전원이 사망하였다.

KE007[편집 | 원본 편집]

당시 007편은 미국 뉴욕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알레스카앵커리지 국제공항을 경유, 대한민국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주 4회 운행의 정기편이었다. 이 운항편은 1979년 4월 개설되었다. 당시 사용된 기종은 보잉 747-230(등록번호 HL7442)로 퍼스트 클래스와 이코노미 클래스, 2개의 클래스가 있었다. 사고 당시 승객은 240명, 승조원은 천병일 기장을 포함하여 29명이었으며 승객의 국적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미국 일본 대만 필리핀
105명[1] 62명 28명 23명 16명
홍콩 캐나다 태국 영국 호주
12명 8명 5명 2명 2명
도미니카 공화국 베트남 스페인 이란 인도
1명 1명 1명 1명 1명
총 16개국 269명

전체 탑승자의 절반 이상이 발착지인 대한민국미국 국민이었고 그 외에도 주변국인 일본, 대만, 필리핀, (당시에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의 승객이 다수였다.

격추까지의 경과[편집 | 원본 편집]

※ 시간은 서울/동경 표준시(GMT+9)

8월 31일[편집 | 원본 편집]

  • 13시 05분 - KAL007편이 존.F.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했다.
  • 20시 30분 - 연료 보충을 위하여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 21시 20분 - 본래 앵커리지 국제공항 출발 예정 시각이었으나, 순풍으로 서울 개항 전에 도착 할 수 있어서[2] 출발을 보류했다.
  • 21시 50분 - 모든 승객이 탑승하고, 예정보다 30분 늦게 출발을 시작했다.
  • 22시 00분 - KAL007편이 앵커리지 국제공항에서 이륙했다.
  • 22시 02분 - 웨이포인트 Bethel로 항하기 위하여 방위 245도로 선회하였다. 그 후 관성항법장치(INS)를 켰어야 했으나 방위는 계속 245도로 고정되었다.
  • 22시 27분 - 카이룽산 전파국 부근을 통과하여 레이더 권외로 빠져나갔다. 이미 예정항로에서 북쪽으로 11km 이탈한 상황이었으나 관제사의 경고는 없었다.
  • 22시 49분 - 007편이 INS에 의거 앵커리지의 관제사에게 웨이포인트 Bethel을 통과하였다고 보고한다. 실제로는 웨이포인트 Bethel에서 북쪽으로 22km 떨어진 위치에 있었고, 그 곳은 미군의 레이더 기지 "King Salmon"의 권역이었지만, 레이더 기지는 관제권이 없었기 때문에 KAL007편에게 경고는 없었다. 그 후, KAL007편은 가장 북쪽에 있는 항로인 "R20(로미오 20)"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9월 1일[편집 | 원본 편집]

  • 00시 51분 - 소련의 방공 레이더가 캄차카 반도 동북쪽을 비행하고 있던 항적을 포착했다. 소련측에서는 그것을 미국의 군용기라고 판단했다.
  • 01시 30분 - 007편이 소련의 영공을 침범했다. 소련의 군용기는 요격을 시도하려 접촉하려 하나 접촉하지 못하고 귀환한다.
  • 02시 28분 - 007편이 캄차카 반도를 통과했다. 그러고는 소련의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 02시 26분 - 007편이 사할린에 접근하여 소련군은 경게태세에 들어갔다.
  • 02시 54분 - 이 시각부터 007편의 조종실 음성기록(CVR)이 남아있다. 조종사들은 잡담을 하고 있었다.
  • 03시 05분 - 007편이 같은 항로를 2분 정도 늦게 비행하던 KAL015편과 통신하고, 상호간의 풍향과 풍속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비행계획을 보고 오차 범위 이내라고 판단했고, 항로에서 벗어난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 03시 08분 - 소련 공군 Su-15TM 요격기가 007편을 실제로 확인하였으나 어두워서 기종 판별이 나오지 않았다. 항법등과 충돌 방지 장치들이 점등하고 있는 것을 보고한다.
  • 03시 20분 - 도쿄 컨트롤(도쿄항로관제소)은 007편에게 3만 5000피트로의 고도변경을 허가한다.
  • 03시 21분 - 소련 공군 MiG-23P 요격기가 경고사격을 한다. 그러나 빛나는 예광탄이 없어 일반 철갑탄으로 실시했다. 007편도 이를 눈치챘다.
  • 03시 23분 - 007편이 고도를 상승하여 3만 5000피트에 도착했다. 이것으로 인한 속도저하로, 소련 군용기는 007편의 바로 옆까지 따라 붙었으나, 군용기와 민간기의 기술 규격이 다른고로 TCAS의 접근 경고는 없었다.
  • 03시 23분 - 공격 명령이 발령되었다.
  • 03시 25분 - 겐나디 오시포비치(러 : Генарий Осипович, 영 : Gennady Osipovich) 중좌가 조종하는 Su-15TM이 미사일을 발사했다. 통상의 수순에 따른, 적외선 유도식과 레이더 유도식 두 발이었다. 30초 후(03:26:02), 007편의 꼬리 날개 부분에 적외선 유도식이 명중했다. 그 결과, 방향타제어 케이블 부근과 유압 계통의 3/4이 손상되었고(ICAO의 최종보고서에 의한 추측), 약 1.75평방피트 크기의 구멍이 생겨 급강압이 발생했다. 기체는 일시 상승했으나, 엔진출력을 내리고, 착륙 장치를 전개하여 강하를 시작했다. 조종은 어려워졌다. 보이스 레코더의 기록에 의하면, 착탄하기 꽤 전부터 대부분의 승객은 잠에서 깨어나 아침을 먹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03시 26분 - 천 기장이 도쿄 컨트롤의 관제사에"급강압의 발생"과"고도 1만 피트로 강하한다"라는 교신을 하나, 잡음이 심했고 도중에 교신이 두절되었다. 이 이후, 셀콜 호출을 포함하여 수회 호출했으나 응답은 없었다. 한편 조종실에서는 조종 기능을 잃은 상태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좌우의 엔진 출력의 차를 이용한 방향전환 등). 객석에서의 비명으로 판명되는 것이 2번 정도 기록되었다. 보이스 레코더의 음질이 차츰 악화된다.
  • 03시 27분 - 착탄부터 1분 44초 후(03:27:46), 음성기록이 끊겼다.[3] 최후의 소리는 긴급 하강을 알리는 자동 방송이었다. 그 후, 007편은 왼쪽으로 선회하면서, 상승과 하강을 하면서 낙하를 계속하였다.
  • 03시 38분 - 소련 및 왓카나이의 항공자위대 레이더 기지에서 007편의 기영이 사라졌다. 소련의 레이더 기록과 공개된 기체의 잔해와 시체의 상황으로 미루어, 007편은 기수를 아래로 향한 상태에서 고속으로 해면에 격돌앴다고 추측된다. 가까운 곳에서 조업하던 일본의 오징어잡이 어선"第五十八千鳥丸"의 승조원은 모네론섬부터 북쪽으로 18.5해리 쯤에서 비행기의 폭음과 해상에서의 폭박을 목격했고, 항공기의 연료에 이용되는 케로신의 냄새가 났다고 진술했다.

일본의 사건 감지[편집 | 원본 편집]

항로를 벗어난 007편은 항공자위대의 왓카나이 레이더 기지에 포착되었다. 그러나 당시 해상을 비행하고 있던 007편은 ATC 트랜스폰더에서 식별신호를 보내지 않았고, 항공자위대는 007편을 '소련 국내를 비행하는 소속 불명의 대형기'라고 판단하고, 그 주위를 비행하던 소련군 전투기는 '요격훈련 중인 전투기'라고 생각했다.

이와는 별개로 육상막료감부 제2조사실(전파감청을 주임무로 하는 부대)은 소련의 전투기가 지상과 교신하는 소리를 감청했다. '미사일 발사'라는 메세지를 확인했지만, 이 시점에는 소련 영토 안의 영공침범기에 대한 통상의 요격훈련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민항기가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다. 이 녹음 테이프는 나중에 미국이 소련에 대하여 요격의 사실을 추긍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으나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서 미국으로 인도된 기록은 없으며, 어떤 경위로 들어갔는지는 불명이다.

요격 직후, 왓카나이 레이더 기지는 소속 불명기가 레이더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을 포착했다. 행방불명기가 없는지 일본, 한국(대구)[4], 미국(엘멘돌프), 소련(블라디보스토크)의 각 항공당국에 조회하였더니, 3국에서는 '그러한 기체는 없다'라는 대답을 받고 소련의 대답은 없었다.

미사일이 명중하고 30초 후, 그때까지 007편을 통신관제하던 도쿄 컨트롤에 잡음이 섞인 007편에서의 호출[5]이 들어왔고, 그대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부근의 비행기(015편)에서도 007편과 연락이 끊겼고, 30분 후에는, "조난의 가능성이 있음"이라고 당국에 통보하며 수색을 요청했다.

각국정부의 대응[편집 | 원본 편집]

9월 1일[편집 | 원본 편집]

9월1일 새벽에 일본정부가 대한항공기가 '사할린 해상'에서 행방불명된것을 공식발표하였고, 오전 7시 전후 일본의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는 '뉴스 속보'로 "대한항공기가 행방불명되었다"라는 것을 보도했고, 각국의 통신사가 도쿄발 정보로 대한항공기의 행방불명을 보도하였다.

또 그 후에, "소련 군용기에 의하여 사할린에서 강제착탄을 당하였다"와 "승객은 전원무사" 등의 출처 불분명의 오보도 난무하였고, 일본의 각 매스컴은 이런 오보를 아침부터 밤에 걸쳐서 뉴스방송에 내보내고, 석간에 연재해버린 신문사도 있었다. 더욱이 기자들이 가족들에개 이런 소식을 직접 전하기까지 해서, 대한항공과 가족 등의 관계자가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일본과 한국, 미국 등의 서방의 보도에 대응하여 소련은 "해당하는 항공기는 국내에 없다", "영공침범기는 동해로 날아갔다"라면서 사진과의 관계를 부정하였다. 이에 미국은 "소련 군용기가 007편을 격추했다"라고 반격하며 일본 당국에서 입수한 소련 군용기의 감청 테이프와 잡음을 소거한 러시아어의 텔롭을 첨부하여 일부 방영하였다.

미국 정부에 의한 정식발표를 접한 사건의 당사국인 한국과 일본, 미국 등의 서방의 소련에 대한 비난이 일었고, 소련정부에게 사실의 공표를 요구하였다.

당일, 소련의 정치국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의제가 되지 않았다(유리 안드로포브 서기장에게는 회의직전에 보고가 들어갔다.). 다음날에는 사건의 반향에 따른 임시 정치국 회의가 건강상의 이유로 안드로포브 서기장 대신 체르넨코의 주최로 진행되었고, "영공침범을 계획적인 도발 행위라고 비난한다"라는 결정에 그쳤다.

또 이날에는, 홋카이도 해상에서 조업을 하던 일본 국적의 어선이 기체의 파편과 유품을 발견했다. 이것을 전후하여, 해상보안청과 미국 해군의 선정이 기체가 추락하였다고 생각되는 부근을 항하여 수색을 하였다.

9월 2일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소련의 니콜라이 오칼코프 참모총장이 "영공 침범기는 항법등을 점등하지 않았다", "정식 절차의 경고에 응답하지 않았다", "동해 방면으로 날아갔다."라고 발표하였다[6]. 이에 대하여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 정부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고, 당사자인 대한민국의 전두환 대통령도 소련을 성토하였다. 또 여러 서방 국가도 소련을 비난하였다.

9월 6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육상 막료감부 조사 제 2부 별실이 감청한 소련의 군용기의 도청 테이프로 영어와 러시아어의 자막을 붙인 비디오가 미국에 의하여 각국 유엔 대사에게 공개되면서 소련군기에 대한 격추 사실을 다시 한번 세계에 알렸다. 이에 대하서 소련의 대사는 비디오 공개 중 일관되게 화면을 외면하였지만, 이 후, 소련의 안드레이 그롬이크 외무대신은 격추를 인정하는 성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9월 9일에는 소련의 오칼코프 참모총장이 "대한항공기는 '민항기를 위장한 스파이기'였다."라는 성명을 발표, 13일에는 긴급 안보 이사회에서 소련에 대한 비난 결의안이 상정되나 상임이사국 소련에 의하여 부결된다.

또한 당사국인 대한민국은 당시 소련과 국교를 맺지 않았고, 유엔에 가입하지 않은 것도 있어서[7], 항의는 주로 일본(사건 시 해당기의 관제를 담당하고 많은 수의 승객이 피해를 입음)이나 미국(사고기의 출발국이고 많은 승객이 피해를 입음)에 의하여 주로 이루어졌다.

기체의 수색[편집 | 원본 편집]

사고 후 , 일본과 미국, 소련의 선박과 항공기가 사할린의 서쪽 모네론섬 주위를 수색하였지만, 소련은 영해 내로의 미국과 일본의 함정의 출입을 인정하지 않고, 공해상에서의 수색에 대해서도 미국과 일본의 함정의 진로를 방해하였다.

그 후, 소련은 회수한 기체의 일부과 유품 등을 일본 측에 제공하였지만, 한편으로 소련은 '이 이외의 시체는 있지 않다.', '블랙박스는 회수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체의 파편과 시체의 일부가 사고 직후부터 차례차례 홋카이도의 연안으로 내려왔고, 부근에서 조업 중인 일본의 어선 등에 의하여도 회수되었기 때문에, 이런 내용의 소련의 주장은 당시부터 의문시되어왔다.

소련의 붕괴 후에 이루어진 이즈페스티아(Известия)지의 취재에서는, 많은 수의 유체와 일부의 유품이 소련에 의하여 회수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나 증겨인멸을 위해 소각되었음이 밝혀졌다. 일본 측이 수거한 유류품은 신원 확인을 하지않고 그대로 2003년, 충령제에 보내져 유족회의 요청으로 소각처분되었다.

또, 미국과 일본, 소련이 필사적으로 찾던 블랙박스는 사고 직후 소련이 회수했었다. 소련 당국은 음성녹음기와 비행기록장치의 분석을 즉시 끝냈다. 83년 11월 28일에 펴낸 극비보고서에 스파이 행위설은 부정되었으나 실제로는 '"스파이 행위설"의 반증이 될 수 있다'라고 기재하여, 모스크바에서는 '블랙박스의 회수를 실패하였다'라고 공표하였다. 미국・일본은 그런 사실은 까맣게 모른채 블랙박스의 수색을 반년 이상이나 더 하였다.

또, '극비'의 블랙박스 회수지시서가 왓카나이의 현지 주민에게 전달된 것과, 현지 주민이 이 지시서와 같은 것을 실제로 바닷속에서 건져낸 것, 그리고, 주민이 비밀스럽게 가지고 돌아간 물체가 요격된 007편의 것인 것이 니혼테레비의 '타이츠이세키(보도 프로그램)'의 취재에 의하여 소련 붕괴 직후인 1991년에 판명되었다 . 이 방송에서는 러시아 국방성의 허가 아래에서 잠수정을 사용하여 사고 현장을 촬영하고, 기체의 잔해와 희생자의 의복, 그리고 유골의 일부를 촬영했다.

그 후[편집 | 원본 편집]

한국에서는 소련이 사죄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자, 정부에서 소련 정부에 대하여 정식으로 항의를 하였고, 소련 제품의 불매운동과 소련 국기를 불로 태우는 등, 다수의 시민들에 의하여 소련에게 항의하는 운동이 열화와 같이 일어났으나, 소련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미국은 소련의 아에로플로트의 비행기의 미국 취항을 무기한 정지하였으며, 자국 항공사인 팬암의 소련 취항을 금지시켰다. 이 조치는 1986년 4월 29일까지 계속 되었다. 한편으로 군용이었던 GPS를 민간개방하여 위치정보 가공산업이 발달하는 결과를 낳았다.

블랙박스는 소련에서 보관하다가 소련 붕괴 이후 1992년 러시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방한하면서 조종실 음성 기록 장치(CVR)이 대한민국 정부에게 전달되었다.{{ㅈ|“[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 }LSD&mid=sec&sid1=100&oid=001&aid=0003659111 |뉴스=연합뉴스 |출판사= |위치= |확인날짜=2016년 1월 5일 (화) 13:37:21 (KST) }} 옐친 KAL기 블랙박스본체 인도]”, 1992년 11월 19일 작성. 비행 기록 장치(FDR)은 1993년에 러시아가 직접 ICAO에 전달하여, 영공 침범 원인이 수수께끼로 남았었던 사고의 재조사가 실시되었다.[8]

각주

  1. 승객 76명, 승무원 23명, 합승 승무원(데드헤드) 6명
  2. 당시 인천공항은 없었으며, 김포공항은 소음의 문제로 밤 ~ 새벽 시간대의 이착륙이 금지되어 있다.
  3. 착탄의 충격과 외부 공기의 유입에 의한 단선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4. 당시 한국 영공에서 민항기를 감시하는 관제소는 대구국제공항에 소재하는 대구 컨트롤이었다. 인천으로 이전한 것은 인천국제공항 개항 이후의 일이다.
  5. "급강압에 의한 긴급강하"라는 교신의 내용은, 스즈키 마츠미의 음성분석에 의하여 판명
  6. '후에 007편의 항법등은 점등되어었었으며, 충분한 경고는 없었다.'라는 조종사의 증언이 있었다.
  7. 가입 신청은 1948부터 하였으나 소련의 반대로 40~50년 만인 1991년에 와서야 가입이 되었다.
  8. ICAO, KAL機 블랙박스원본 인수 조사착수”, 《연합뉴스》, 1993년 1월 8일 작성. 2016년 1월 5일 (화) 13:37:21 (KST)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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