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역사

Taiwan (orthographic projection).svg

대만은 중국 남동쪽에 위치한 섬으로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사이를 잇고 중국과 가까우면서도 떨어져있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은 온갖 열강이 대만을 눈여겨보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서 대만의 역사는 근세부터 현재까지 열강의 쟁탈전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근세[편집 | 원본 편집]

대만은 한족이 아닌 폴리네시아계 원주민이 원래부터 따로 살던 곳이었다. 원주민 중 일부는 배를 타고 태평양을 개척해 그곳에서 살기도 했으나, 나머지는 대만에서 남아 살았다. 원주민들은 대만 서쪽에 다두 왕국을 세워 살았으나, 대만을 통일하진 않았고 규모도 작았다.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에스파냐네덜란드는 태평양 지역을 개척했는데, 대만도 그곳중 하나였다. 남부를 차지한 네덜란드와 북부를 차지한 에스파냐는 천천히 대만을 점령했기에 처음에는 서로의 존재를 인지 못했으나, 얼마 안 가 서로 대치하게 되자 결국 전쟁이 발발했다. 네덜란드는 결국 에스파냐를 상대로 승리해 대만을 장악했고, 다두 왕국을 속국으로 삼았다.

명나라가 내부 혼란으로 쇠퇴하자 청나라의 반란으로 결국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명나라의 장수였던 정성공은 명나라가 예전에 자기 영토로 주장했지만 실제 지배는 하지 않았던 대만으로 이주해 중국 본토를 수복할 계획을 짰는데, 실제 지배를 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맞닥뜨리자 결국 전쟁으로 네덜란드를 완전히 몰아내고 정씨 왕국을 세웠다. 청나라는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고 결국 군대를 보내 정씨 왕국을 멸망시키고 대만을 지배했다. 즉, 대만이 중국의 역사에 편입된 시기는 막연한 인식과는 달리 17세기부터이다.

근대[편집 | 원본 편집]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청나라는 조선 왕실에 응해 군대를 보내 이들을 진압하려했다. 문제는 일본이 갑신정변 때 청나라와 맺었던 천진조약을 빌미로 같이 군대를 본내 조선을 무단으로 점령하면서 발발했다. 일본이 이내 조선에 간섭하자 청나라는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그대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청군은 나라의 내부 혼란으로 무능했으나, 일본군은 근대화가 끝나 있었기에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이후 청나라에 하관조약으로 대만과 요동반도 등을 할양할 것을 강요했는데, 대만인들은 이에 반발해 대만민주국이라는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국(대부분 중화민국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대만민주국은 중화민국보다 16년 일찍 건국됐다)을 세워 청나라로부터 독립했다. 청나라는 이미 대만을 포기했기에 대만민주국을 지원하지 않았고, 일본이 결국 군대를 보내 진압하면서 대만은 일본령이 되었다. 대만은 원래부터 정체성이 불분명했기에 일본에 비교적 쉽게 동화되었고, 때문에 통치도 한국비해서는 온건했다. 대만은 이후에 벌어지는 중일전쟁의 주요 거점 중 하나가 되었으나,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대만은 결국 중화민국에 할양되었다.

중화민국은 일본에 동화되어있던 대만인들을 탐탁치 않게 여겨 이들을 탄압했으며, 특히 2.28 사건 때에는 본성인 2만명이 학살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한편 중국 본토에서는 대만을 지배하던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는데, 국민정부가 부패 등으로 민심을 잃고 나라가 속수무책으로 공산당에 넘어가자 국민당의 장개석은 일단 수도를 대만으로 옮기고 중국 본토를 수복하려고 했다. 대만은 이후부터 급격한 경제성장을 겪으며 홍콩, 싱가포르, 대한민국과 함께 아시아의 네마리 용으로 급부상했고, 이후 민주화를 겪고 과거사를 반성함에 따라 비로소 정치적으로 안정됐다. 한편 중화민국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영향력을 잃자 자유주의 진영마저 중화민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도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하나의 중국을 내세워 대만을 다시 점령하려고 하고있는 추세이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