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드레이크

닉 드레이크
Nick Drake
Nick Drake (1971).png
인물 정보
본명 니콜라스 로드니 드레이크
(Nicholas Rodney Drake)
출생 1948년 6월 19일
버마 랭군
사망 1974년 11월 25일 (26세)
영국 버밍엄 탄워스-인-아든
국적 영국
활동기간 1967–1974
웹사이트 http://www.brytermusic.com/
음악 활동
장르 포크

니콜라스 로드니 "닉" 드레이크(Nicholas Rodney "Nick" Drake)는 영국포크 음악가이다. 살아 생전에 세 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했으나 당대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1974년 26세의 나이에 약물 과용으로 사망했으며, 죽음 이후 비평가와 대중에게 재평가되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데뷔 이전[편집 | 원본 편집]

닉 드레이크는 1948년 6월 19일 버마 랭군[1]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로드니 드레이크(Rodney Drake)는 무역 회사에 소속된 엔지니어였으며 어머니는 몰리 드레이크(Molly Drake)[2]이다. 4살 터울의 친누나 가브리엘 드레이크(Gabrielle Drake)는 배우로 활동해 나름대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닉 드레이크가 태어나고 2년 뒤인 1950년 경, 아버지 로드니의 심혈관질환으로 인해 드레이크 일가는 영국으로 귀향해 버밍엄 남쪽의 탄워스-인-아든(Tanworth-in-Arden)에 정착한다.

유년 시절의 닉은 내성적이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모가 모두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므로[3] 자연히 그 역시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접하며 성장했다. 그는 클래식 음반을 하루종일 들을 정도로 좋아했으며 어머니가 작사작곡한 노래 역시 좋아했다. 소년 시절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스스로 작사작곡한 노래를 릴테이프에 녹음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독서 역시 즐겼으며 주로 옛날 이야기나 전설, 신화 등에 관심을 보였다.

1957년 닉은 버크셔 지역에 위치한 기숙 학교 이글 하우스 스쿨(Eagle House School)에 진학하고, 5년 뒤 윌트셔 지역의 공립 학교 말보로 칼리지(Marlborough College)로 진학한다. 학창 시절 그는 스포츠에 맛을 들여 육상부에서 단거리 선수로 활동하기도 하고, 럭비 선수로도 활약해서 졸업 이전 마지막 2학기 동안은 팀의 주장을 맡기까지 했었다. 이글 하우스 시절 한동안 뒷전이었던 음악도 말보로 칼리지에 들어와 다시 시작해서 교내 악단에서 피아노를 쳤으며 색소폰, 클라리넷, 플루트를 배우기 시작해 금세 능숙한 솜씨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교내 악단과 별개로 친구들을 모아 스쿨 밴드를 조직해 당대에 유행하던 블루스, 재즈 등의 대중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 무렵 닉은 13파운드짜리 기타를 생애 최초로 구매한다. 학업 성적도 우수해 선생들에게 종종 '우등생(Headboy)'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모범적인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보여지나 그의 친구 중 몇몇은 그가 지나치게 말수가 적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닉의 아버지 로드니는 교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우리들 중 아무도 닉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훗날 닉 드레이크 본인 역시 자신의 학교 생활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한편 말보로에서의 마지막 일 년 무렵에 닉은 자신에게 고백한 여성과 짧은 연애 끝에 결별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닉 드레이크의 몇 안 되는 연애사 중 하나다.

1966년 닉 드레이크는 케임브리지 대학 영문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입학이 결정된 이후 닉은 남은 6개월간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보낸다. 이 즈음브터 그는 본격적으로 기타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기존에 익힌 악기들과는 달리 그는 기타를 스스로 독학했으며 밥 딜런이나 도노반의 곡을 귀로 따서 연주하며 실력을 키웠다.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는 과정에서 그의 특징적인 변칙적 튜닝과 스트로크 등이 확립된다. 마르세유에서 그는 카페나 하숙집을 전전하면서 히피음악가들과 어울려 놀다 돈이 필요하면 길거리 버스킹을 해 돈을 벌었으며, 봄에는 친구들과 몇 주간의 모로코 여행을 떠나는 등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마초, LSD 등의 마약을 접하게 된다.

1967년 영국으로 돌아온 닉은 누나 가브리엘이 살던 런던 햄스테드에 정착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피츠윌리엄 칼리지(Fitzwilliam College)에 들어간 닉 드레이크는 윌리엄 블레이크, 아르튀르 랭보, 샤를 보들레르 등을 공부하나 얼마 안되어 대학 생활에 흥미를 잃어버린다. 그의 성적은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강의를 빼먹는 일도 잦아졌으며 가입했던 럭비, 크리켓 동아리도 탈퇴했다. 그는 스포츠나 학업에 대한 열의를 완전히 잃었고 교우관계 역시 갈수록 나빠져 갔다. 대신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에 휩싸였고 하루 대부분을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대마초를 피우며 음악을 듣고 쓰는 데 투자했다. 음악 업계에도 관심을 가져 타 음악가의 세션으로 활동하거나 근처 카페나 술집에서 자작곡으로 공연을 하는 등 본격적으로 음악에 투신하기 시작한다.

활동[편집 | 원본 편집]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닉 드레이크는 음악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접근한 이는 로버트 커비(Robert Kirby)로, 같은 케임브리지 동문의 음악도였다. 로버트는 닉의 곡들을 바로크 형식으로 편곡하는 것을 제안했으며 닉 역시 그에 동의했다. 닉은 이미 클래식 음악에 익숙했기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1967년 겨울에는 그의 곡 대부분에 커비의 클래식 터치가 더해졌다.[4] 그 무렵 천재 포크 기타리스트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프로 뮤지션들 사이에까지 퍼져나갔고, 포크 록 그룹 페어포트 컨벤션베이시스트 애슐리 허칭스(Ashley Hutchings)는 소문의 정체를 알기 위해 그가 공연하는 클럽을 찾아갔다. 허칭스는 닉의 공연에 매우 큰 감명을 받았고, 닉 드레이크에게 아일랜드 레코드(Island Records) 소속 약관 25세의 미국인 프로듀서 조 보이드(Joe Boyd)를 연결시켜준다. 조 보이드는 닉의 데모 테이프를 들은 직후 그 자리에서 바로 앨범 제작을 결정하고 1969년 데뷔 음반 "Five Leaves Left"가 발매된다. "Five Leaves Left"는 발매 이후 평단의 찬사를 받았지만, 대중적으로는 전혀 어필하지 못해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비록 첫 음반이 상업적으로 실패했지만 닉 드레이크는 음악인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비평가들과 주위 음악가들의 호평을 받았고, 레코드사의 높으신 분들도 그의 잠재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에 집중하기 위해 졸업까지 9개월 남은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퇴한다. 기숙사를 나온 닉은 조 보이드가 구해준 단칸방에 몇 달동안 처박혀 2집에 수록될 곡들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새로운 앨범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의 지나친 완벽주의 탓에 앨범의 발매일은 연기를 거듭했다. 앨범 제작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 페어포트 컨벤션은 무명이던 드레이크를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자신들의 투어에 그를 오프닝 아티스트로 세웠다. 그동안 클럽이나 술집 등 소규모의 공연장을 위주로 활동하던 닉은 처음으로 많은 인파 앞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우울하고 조용한 음악에 청중들은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그의 복잡한 튜닝 탓에 곡 사이의 텀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짜증을 내었고, 본인도 적극적으로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기엔 너무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공연은 싸늘한 분위기로 끝났고, 닉 드레이크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1971년, 2집 "Bryter Layter"가 발매된다. 앨범의 완성 직후 조 보이드는 닉 드레이크가 스타덤에 오르리라 확신했지만, 외려 대중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평론가들은 찬사를 퍼부었지만 판매량은 15000여장이라는 초라한 수치를 기록했다. 전작에 비해서 조금 더 팔리기는 했지만[5] 앨범에 들인 공을 생각하면 처참한 수준의 실패였다.

"Bryter Layter"의 실패로 닉 드레이크는 정신적으로 서서히 궁지에 몰려갔다. 레코드사의 중역들은 그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로듀서 조 보이드가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의 러브콜으로 미국 LA로 떠났다. 물론 조 보이드의 이직은 어떠한 사적 이유도 없는 음악 프로듀서로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닉 드레이크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커다란 배신으로 여겼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불안정해져갔고, 점차 라이브 공연을 겁내게 되었다. 6월 25일, 공연 시작 전부터 극도의 불안증세를 보이던 닉 드레이크는 첫 곡 'Fruit Tree'를 부르던 도중 갑작스럽게 무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닉 드레이크는 런던의 삶에서 큰 외로움과 상실감을 느꼈고,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들을 걱정한 드레이크 부부는 LA에 거주하던 조 보이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보이드는 전화로 닉을 설득해 정신과 진료를 받게 한다. 정신과에선 닉에게 심각한 우울증 진단을 내리고, 각종 항우울제를 처방한다. 닉은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것에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는 되도록이면 타인에게 자신이 항우울제를 복용한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고, 나중에는 아예 항우울제 대신 마약에 의존했다.

고향에 돌아온 닉 드레이크는 타인과 거의 소통을 끊고 방 안에 틀어박혀 대마초만 줄창 피웠다. 집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았으며 누군가 말을 걸어와도 "Yes" 아니면 "No"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다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은 대체로 마약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가끔씩 아무런 조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불쑥 돌아오기도 했는데, 이럴 때마다 가족들은 자신들이 아는 모든 연락처마다 닉의 안부를 물어야 했다. 친지와 레코드사들을 포함해 아무도 그가 새로운 음반을 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평소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아일랜드 레코드의 크리스 블랙웰(Chris Blackwell)은 그의 요양을 위해 자신의 스페인 별장을 그에게 빌려준다. 한동안 스페인에서 지내던 닉 드레이크는 1971년 10월 영국으로 귀국한 뒤 자신의 전작들에 참여한 엔지니어 존 우드(John Wood)에게 세 번째 음반을 녹음해줄 것을 부탁한다. 녹음실에서 닉 드레이크와 존 우드는 다른 스태프 없이 둘이서 단 이틀만에[6] 앨범을 완성한다. 닉은 앨범의 마스터 테이프를 회사 사무소에 내버려 두고 고향 탄워스-인-아든으로 돌아간다. 레코드사 비서가 발견한 마스터 테이프는 1972년 3집 "Pink Moon"으로 발매된다.

죽음[편집 | 원본 편집]

크리스 블랙웰은 "Pink Moon"의 완성도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으며 그전까지의 닉 드레이크 음반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로 했다. 그러나 닉 드레이크는 인터뷰, 프로모션용 사진 촬영, 콘서트, 쇼케이스 등 일체의 홍보 활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앨범의 이름 "Pink Moon"을 정한 것 외에는 앨범 디자인, 광고 계획, 발매일 등 음반의 거의 모든 것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7] 3집이 발매될 무렵 그는 주 5회의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으며, 일정이 없는 날에는 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마약을 하거나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들었다. 그는 그의 가족과 종종 충돌했다. 그는 수 차례 자신의 어머니에게 집 안에만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호소했지만 동시에 집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무척 괴로워했다. 가끔씩 친지의 집에 예고 없이 방문해 2~3일씩 지내다가 마찬가지로 아무런 예고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한 번 우울해지면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며칠씩 씻지 않거나 손톱을 자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차를 빌린 뒤 연료가 바닥날 때까지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기도 했다. 1972년 10월, 닉 드레이크는 신경 과민 증상으로 5주간 입원했다.

조금씩 정신 건강이 회복된 이후로는 그도 재기의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세션이나 작곡가로서 일해 보려고도 하고, 군대에 입대하려고도 했으나 면접 과정에서 떨어졌다. 당시로서는 신종 직업이었던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관심을 가져 아버지의 주선을 받아 일해 보기도 했으나 며칠 못가 그만두었다. 1974년 2월 닉 드레이크는 존 우드에게 접촉해 네 번째 음반을 제작하는 것을 도와달라 부탁한다. 조 보이드 역시 작업에 동참했다. 첫 녹음 이후 7월에 재녹음에 들어갔는데, 워낙 그간 고생을 한 터라 기타 연주와 가창 모두 완벽하지 않았지만 우드와 보이드 모두 "드레이크의 재능이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고 평했다. 녹음 이후 드레이크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는 명확치 않은데, 그가 재기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정규 4집을 내려고 작업에 들어갔다는 설과 기량의 쇠퇴를 느끼고 음악계에서 은퇴를 결심했다는 설이 있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닉이 녹음 이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꽤나 행복해 보였다는 것이다. 닉의 어머니 몰리 역시 "닉이 몇 년 만에 행복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이 당시 그는 알베르 카뮈의 저서 시지프 신화에 탐닉했다고 한다.

그리고 1974년 11월 25일, 닉 드레이크는 자신의 고향집 침대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항우울제의 일종인 '아미트리프틸린(Amitriptyline)' 과다 복용이었다. 사망 시각은 25일 밤 0시~1시 사이로 추정되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일주일 전 결별한 연인 소피아 라이드를 향한 편지가 발견되었다. 영국 경찰은 위와 같은 정황과 그가 평소 앓던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 질환을 토대로 사인을 자살으로 결론내리고 수사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의 지인 일부는 경찰 발표를 부정하고 사고사나 타살 의혹을 주장하고 있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닉 드레이크는 당대의 평론가들에게는 좋은 평을 들었지만[8] 대중들에게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의 죽음 이후로도 한동안 그런 상황은 바뀌지 않았으나, 80년대 들어 그의 영향을 받은 후배 음악가들이 등장하고 언론의 재조명이 이어지면서 재평가받아 현재는 불우한 천재의 대명사격 인물이자 포크 음악을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전설적인 아티스트로 자리잡았다. 그의 음반들 역시 대중음악 역사에 손꼽히는 명반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음악의 특징은 독특한 기타 사운드이다. 기존의 포크 싱어들이 노래의 반주 역할로만 기타를 사용했던 것에 비해 그는 기타를 보다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특유의 기타 사운드는 3집 "Pink Moon"에 들어서는 보컬과 거의 동등한 비중을 부여받기도 한다. 드레이크 특유의 기묘한 튜닝과 코드 진행 탓에 당대의 다른 포크송이 기타로 비교적 쉽게 따라 칠 수 있는 반면에 그의 기타는 현재도 카피하기가 쉽지 않다. 1, 2집까지는 스튜디오에서 동료 뮤지션과 협력하여 풍성한 소리와 현악과 재즈 등을 도입한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으나 3집에 들어서는 이와 반대되는 극도로 미니멀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가사 역시 당대의 다른 포크 뮤지션들처럼 사랑 노래나 사회참여적인 가사가 아닌[9] 자기 고백적이고 성찰적인 가사를 썼다. 이런 음악적 성향은 활동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영향이 커져 90년대 이후 포크 음악은 어떤 형태로는 닉 드레이크의 그늘 아래 있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닉 드레이크 본인도 밥 딜런이나 도노반 등 당대 포크 뮤지션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밴 모리슨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 외에 어머니 몰리 드레이크의 영향을 받은 곡도 있다.[10]

대중적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주목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상업적으로 이렇다 할 히트곡은 없지만 마니악한 팬층이 있었으며, 80년대 들어 재조명되자 인지도도 그럭저럭 높아졌다. 1999년 폭스바겐 TV 광고에 그에 음악이 실려 반짝 판매량 상승를 기록한 적도 있다. 한국에는 90년대 들어서 소개되어 알 사람만 아는 뮤지션이 되었다.

디스코그래피[편집 | 원본 편집]

Five Leaves Left[편집 | 원본 편집]

1. Time Has Told Me

2. River Man

3. Three Hours

4. Way To Blue

5. Day Is Done

6. Cello Song

7. The Thoughts Of Mary Jane

8. Man In A Shed

9. Fruit Tree

10. Saturday Sun

1969년 7월 3일 발매된 닉 드레이크의 데뷔 앨범. 대학 강의를 땡땡이치며 만들었다. 이름은 닉이 즐겨 피우던 리즐라 담배곽에 적혀있던 문구에서 따왔다는 것이 정설이나,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다.[11] 페어포크 컨벤션, 펜탕글 등 타 가수들의 녹음 후 남는 시간에 짬짬이 녹음했으며 그 가수들이 녹음을 도와주기도 했다. 프로듀서 조 보이드는 좀 더 대중적 취향에 맞는 음악으로 만들고자 편곡자로 리차드 휴슨(Richard Hewson)을 참여시켰으나 닉 드레이크와 음악적 마찰을 일으키고 쫓겨난다. 그 자리에는 닉과 무명 시절 함께했던 로버트 커비가 들어온다. 음반은 전반적으로 호평이었으나 상업적으로 참패했다.

Bryter Layter[편집 | 원본 편집]

1. Introduction

2. Hazey Jane II

3. At The Chime Of A City Clock

4. One Of These Things First

5. Hazey Jane I

6. Bryter Layter

7. Fly

8. Poor Boy

9. Northern Sky

10. Sunday

1971년 3월 6일 발매된 닉 드레이크의 2집 음반. 제목은 'Brighter Later'의 영국식 발음을 표현한 것으로, 당시 BBC 기상 캐스터가 이 단어를 발음하는 것에서 따왔다고 한다. 전작의 상업적 실패를 겪은 그는 조 보이드의 의견을 받아들여 좀 더 대중적인 노선으로 나가기로 한다. 본격적으로 세션들을 고용했고[12] 비치 보이즈의 "Pet Sounds"를 본보기로 삼아 세련된 편곡을 적용했다. 그의 음반 중에는 가장 밝은 분위기를 띄고 있다. 닉 드레이크는 대학도 중퇴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수십 곡을 쓰는 등 심혈을 기울였으나 이 앨범 역시 상업적으로 참패했다.

Pink Moon[편집 | 원본 편집]

1. Pink Moon

2. Place To Be

3. Road

4. Which Will

5. Horn

6. Things Behind The Sun

7. Know

8. Parasite

9. Ride

10. Harvest Breed

11. From The Morning

1972년 2월 25일 발매된 닉 드레이크의 3집이자 마지막 앨범. 전반적으로 그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다. 프로듀서 존 우드와 단 둘이서 작업했으며 녹음은 매우 빠르게 끝났다. 닉은 전작 "Bryter Layter"의 풍성한 사운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이 앨범에서는 최대한 간단한 소리를 녹음하고자 했다. 따라서 곡들은 전반적으로 매우 짧고 간결하며 첫 트랙을 제외하고는 오버더빙이 되어있지 않아 거의 라이브에 가깝다. 가사 역시 그의 심정을 반영해 어둡고 가라앉아 있다. 닉은 녹음을 마친 뒤 앨범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앨범에 관한 어떤 작업도 관여하지 않았다. 재생 시간은 총 28분 22초로 그의 앨범 중 가장 짧다. 이 앨범 역시 상업적으로 참패했다.

각주

  1. 현재의 미얀마 양곤
  2. 결혼 전의 성은 로이드(Lloyd)
  3. 특히 어머니 몰리는 2차 대전 당시 인도 델리에 거주하며 지역 라디오의 진행을 맡아 여러 곡을 작사작곡하고 공연한 아마추어 싱어송라이터로 알려져 있다.
  4. 로버트 커비는 이후 3집 "Pink Moon"을 제외한 닉 드레이크의 음반에 모두 관여한다.
  5. 3000장 정도 더 팔렸다고 한다.
  6. 이틀이 아니라 2시간이라는 설도 있다. 뭐가 되었든 엄청나게 빨리 녹음된 음반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7. 이런 홍보에도 불구하고, "Pink Moon"은 닉 드레이크의 정규 음반 중 가장 낮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8. 당시 그의 음악이 평론적으로도 혹평받았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와전된 것으로, 그는 음악적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좋은 평가를 받았다.
  9. 영국 포크 자체가 미국에 비해 정치적 성향이 옅은 것도 있다.
  10. 그 때문에 후일 팬들에 의해 몰리 드레이크의 음악이 발굴되기도 했다.
  11. 우연하게도 닉 드레이크는 이 음반을 발표하고 5년 뒤 사망한다.
  12. 이 중에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멤버 존 케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