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라스 루만

Niklas Luhmann, (1927년 ~ 1998년)

독일사회학자로, 여러 사회학 이론들을 제창해냈으며, 사회 체계 이론과 소통, 위험과 신뢰 등등 여러 전 방위에 영향을 끼쳤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현대 중요 사회 이론가중 하나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27년 독일 뤼네부르크의 양조장집 아들로 태어나, 1943년 16살에 김나지움을 졸업하자마자, 방공부대 보조로 징집되어 들어갔으며, 덤으로 나치당 가입[1]도 했었다. 그후 1944년부터 45년까지 미군에게 전쟁 포로로 붙잡혔다.[2] 그후 1946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들어가 법학, 특히 로마법 쪽을 배웠으며, 49년도에 졸업하고 53년부터 고향인 뤼넨부르크의 지역 관청에서 근무하게 된다. 1954년부터 55년도에는 뤼네부르크 고등 행정법원장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는 와중에 다른 방면으로 유명해진 메모 상자(Zettelkasten)를 구상했다고 한다. 아래서도 나오지만 간단하게 상이한 텍스트들의 주제별 그물망을 이루는 색인 카드들에 의한 참고 체계라고 볼수 있다. 그냥 간단하게 개인 위키를 생각하면 된다.

그후, 하버드 교환학생을 뽑는 공고를 보고 1960~1961년 안식년에 탤컷 파슨스 밑에서 구조기능주의를 배운후, 그후 1962년부터는 슈파이어 행정대학의 담당자로 일을 하러 갔다. 거기서 메모상자에서 자신의 생각을 빼서 보냈더니, '새로 생기는 빌레펠트 대학 1호 교수는 너다!'란 편지를 받고(...) 66년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1968년 빌레펠트 대학에 교수로 초빙 되었다. 여기서 작업중인 연구계획을 말할때, 연구 대상: 사회이론, 연구기간 30년, 비용: 없음' 으로 대답했다. 덤으로, 교수 생활하고 은퇴기 다 해서 말 그대로 딱 30년을 사회 이론을 연구하는데 썼다. 사실 그의 이론의 집대성인 사회의 사회(Gesellschaft der Gesellschaft)는 자신이 혈액암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걸 알고 빨리 쓴 것이지만, 여하튼 자신의 이론을 마무리 하긴 했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자신의 상대란걸 깨닫고 같이 저술 활동을 하였으며, 학문적으로 논쟁이 붙었으며 이로 인해서 유명세를 얻기 시작하기도 하였다. 물론 위르겐 하버마스도 루만의 이론에서 얻어간 것이 있기도 하다. 물론 학문을 떠나서 사이도 좋아서 하버마스가 빌레펠트 대학교에 특강하러 왔다가 1학년 생에게 팩트폭력을 당한일도 있었다고 한다.

루만 동네에 사는 사람이 생각하던 루만은 자주 셰퍼드를 데리고 산책다니던 교수님이었고, 학생들이 본 루만은 '사채꾼' 스러웠다고 표현했다. 물론, 집 명패엔 Prof. Dr. Niklas Luhmann 이 떠억 붙어져 있었는... 그리고 루만의 비서는 루만의 생각을 묻기 위한 책들의 홍수로 인해 이것들 중에서 루만에게 줄 책을 골라내는 것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루만은 당연하게 아버지의 유산인 양조장에 딸려온 술집을 뤼네부르크에 갖고 있었다. 여튼 루만은 위에도 있지만 히틀러 유겐트를 억지로 한 탓으로 68 혁명때 강사였지만 어느 편에도 끼지 않았다. 이건 공직자 생활할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술도 별로 안 좋아하고 거기다가 무정당이었던 덕택에 경력 쌓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루만의 주요 이론은 이해 하는 것이 꽤나 어려워서, 루만에 대한 여러 입문서들이 나와 있는데, 정작 루만 본인은 자신의 책중 사회의 법에서 사회은 복잡하고, 이렇게 복잡한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이론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니까 쉬운건 리브레를 보자!

한국엔 사회의 사회, 사회의 법, 사회적 체계들, 사회의 교육체계, 사회의 법, 열정으로서의 사랑, 체계이론 입문, 예술체계이론, 생태적 커뮤니케이션, 사회이론 입문, 대중매체의 현실, 복지국가의 정치 이론등등이 번역되어 나왔다. 물론, 루만 책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겐 검은건 글자요, 하얀건 종이이다. 이중 사회이론 입문, 체계이론 입문은 루만이 빌레펠드 대학교에서 한 강의를 녹음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신기한한국인 제자[편집 | 원본 편집]

니클라스 루만이 지도교수인 경북대학교 노진철 명예교수[3]가 있으며, 그분도 어쩌다보니 체계이론에 낚이셨다고 한다. 독일 와서 마르크스배우러 갔다가 루만을 배우게 되셨다고... 정확하겐 여러 이야기를 하셨는데, 루만이 대학생 수업을 안 여니까 빌레펠트 대학생들이 루만 보고 교수님하가 수업 안하니까 우리 수업 좀 해라라고 시위를 벌여서(...) 강의를 하기도 했는데, 이 강의는 루만은 낮에 연구하는 지라 밤중에 이뤄졌고, 다른 과 교수들도 좀 앉아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그리고 제자에겐 매 주마다 루만이 메모상자로 작성한 새로운 글이 던져졌고 그에 대해서 코멘트를 달아야 했는데, 이것에 대해 매우 한이 맺히신 듯...

여튼, 루만은 학회 만들기를 싫어했고, 제자에게 '난 한국에 대해서 몰라서 그거에 대해서는 지도해줄수 없고, 이론은 창시자 이름 붙인 건 자기 스승대로 끝났으니까 네가 이 이론의 연구자중 한사람이 된다면 지도해줄께' 라는 조건을 달아 제자로 받아줬다고 한다. 이래서 제자분도 '한국XX(창시자)학회' 라고 붙은 것에 대해 저런 과거가 있다보니 매우 디스를 날리신다. 잘 나오는 샌드백학회 이름은 한국 칸트나 헤겔학회(...) 여튼 노진철 교수가 정년 퇴임일이 다가오니 후배들이 은퇴하시기 전에 우리 학회 만들면 어떨까요? 했다가 결국 이름을 한국사회체계이론학회로 정하게 된다.

물론, 한국의 거진 모든 루만 관련 서적의 감사의 글에는 '이 제자분이 도와주셨습니다.' 라는 문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냥 없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루만의 사회학 이론[편집 | 원본 편집]

루만의 이론을 간단하게 알기 위해선 몇가지 도구들이 필요하다. 즉 어찌보면 이과들을 위한 사회학이라고 볼 수 있다.

  • 사이버네틱스, 그리고 사이버네틱스를 관찰하는 2차적 사이버네틱스(자기준거)
  • 복잡계
  • Autopoiesis, 자기생산
  • 수학자 조지 스펜서-브라운의 재돌입(Retry)

자기생산적 사회체계 이론[편집 | 원본 편집]

칠레의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자기 생산적 이론에다가 자신의 체계(System) 이론을 접목시킨 30년 동안 이 사람이 연구한 것. 사회는 전체보다 더 큰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사회는 이런 부분들로 이뤄진 체계들로 이뤄져 있으며, 이런 체계들은 오직 소통(Kommunikation)을 통하여 다른 체계들과 접근 가능하다. 즉,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체계와 체계가 주고받는 소통이 중심인 이론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AI가 서로 소통을 통해 체계를 이루고 있으면 AI 체계는 인간이라는 체계[4]와 같이 공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소통으로 인해서 이 체계들은 차츰차츰 새로운 모습, 즉 사회적으로 진화해 나간다고 보면 된다. 이 체계는 미생물과 같이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소통[5]을 환경으로 받아서 알아서 놀다가 필요하면 기능적 분화라는 이름으로 후속 체계를 자르고, 이런 환경과의 소통을 계속하다보면 언젠가 모르게 진화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루만이 사회학에 미친 영향으로 이 자기생산 요소를 가져왔다는걸 서술하고 있다.

복잡성[편집 | 원본 편집]

환경은 너무나 복잡성이 크기에 이런 복잡성을 줄여서 인간의 인지 능력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을 체계라고 보고, 체계는 복잡성을 줄이면서 덩달아 환경에 대한 정보도 인지능력의 부재로 인해 날려먹으면서 소통 매체를 만들어 낸다. 이과적으로 보자면 엔트로피에 대항하는 네겐트로피가 체계가 하는 행동이라고 볼수 있다. 또한 루만은 신뢰를 복잡성 축소 기제중 하나로 보기도 하였다. 덤으로 사회학에서 신뢰 연구가 본격화 된게 루만의 '신뢰' 란 책이 영어로 번역되서 나왔을때부터 였다.

체계의 자기준거[편집 | 원본 편집]

위에서 말했지만, 소통은 단순한게 아니다. 체계는 소통을 거치면서 자기준거를 하게 된다. 즉, 소통을 하면서 관찰에 대한 관찰을 하는 2차적 질서 관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리고 이런 2차적인 질서 관계에서 소통은 체계로 재진입하게 되며, 특정한 유형의 작동이 시작되고 그것을 뒤따르는 다음 작동이 있으면, 다시 말해 작동이 연결 가능성을 갖고 동일한 유형의 작동이 뒤따르는 결과를 낳으면 체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런 작동은 소통을 통해서 이뤄진다. 즉 소통이 없으면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메모 상자[편집 | 원본 편집]

루만은 공무원 재직시절 때부터 메모상자를 만들었는데, 종종 그는 자신보다 이 메모상자가 더 머리가 좋다고 말하기도 하기도 하였으며, 이 메모상자로 인해 어마어마한 다작을 지어낼수 있었다. 덤으로, 루만 사후에 이 메모상자의 소유권을 갖고 소송도 벌어지기도 했다. 당연하게 루만의 업적이 모두 이 메모상자로 인해 만들어졌기 때문... 결국 대학교가 승리하여 모두 디지털화 되었다.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 A4지를 반으로 갈라 메모지로 삼는다. 정 자르기 귀찮으면 A5지로 가도 무방
  • 메모지에 생각나는 것, 흥미로워 보이는 것, 혹은 듣거나 읽은 것 중 인상적인 것을 적는다.
  • 한면에만 쓰도록 한다. 메모 상자가 좀 더 빨리 차오를수 있겠지만, 메모지를 상자에서 끄집어내지 않고 그대로 넘겨가며 읽을수 있기 때문.
  • 같은 테마에 속하는 메모지끼리 분류하여 한칸에 모아둔다.
  • 그렇게 만들어진 칸에 해당 테마를 떠올릴수 있는 철자로 표기한다. 그 표시용 철자는 그 칸에 있는 메모지 모두에 써놓는다.
  • 그리고 같은 칸에 있는 메모지에 일련 번호를 매긴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메모지를 쉽게 찾아낼수 없다.
  • 각 메모지마다 그와 관계있는 다른 메모지들의 번호를 적어놓는다. 그렇게 하면 각 메모지들은 제자리에 있으면서도 방향을 지시할 수 있다.
  • 책에서 발췌한 인용문구를 적은 메모지를 관리할 때는 작가 이름순으로 정리한 메모상자를 따로 두는게 좋다.

각주

  1. 그러니까 히틀러 유겐트. 그 당시를 살아온 독일 지식인층의 한계였다. 그러나 루만은 그런 환경을 매우 싫어했다. 인터뷰에서 루만은 히틀러 유겐트에 억지로 가입해야 했고, 반갑잖은 행진, 인사법 그리고 정권의 끔찍한 자기홍보들을 들먹이면서 나치 정권하의 일을 깠다. 거기다가 루만은 어머니가 스위스 쪽이라 스위스도 자주 갔다와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고 있었고, 루만의 아버지도 이에 대해서 반발하기도 했었다.
  2. 그러다가 루만은 자기와 같은 포로들이 루르 지방으로 강제 근로를 나가기도 하고, 자신도 구타를 당한터라, 제네바 협약좀 지키라는 말을 미군보고 하게 된다.
  3. 사회이론 입문에서 '한 한국인 제자'라는 운을 떼면서 이 한국인 제자를 인용한다.
  4. 사실 여기서는 인간이라고 하지만 인간도 여러 체계로 구성된 산물이다. 그래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체계와 소통만 존재할뿐이다'
  5. 정보, 통지, 이해 3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어야 소통으로 본다. 예를 들자면 경제 체계의 경우 화폐를 소통매체로 사용하는데, 화폐가 있다/없다란 양가적인 것이 정보가 되고, 그리고 그 정보가 알려지고(통지), 다른 체계나 같은 체계에 받아들여짐(이해)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무시하는 것도 이해의 한 종류로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