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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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泰俊. 호는 신암(愼菴), 이명은 노아경(盧亞敬), 노화경(盧和敬), 이무웅(李武雄).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1년 2월 17일 서울 종로구 계동에서 노백린의 2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노백린은 대한제국 군대의 근대화와 자주화를 위해 노력했고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당하자 신민회에 가담하고 보성학교장과 해서교육총회장을 맡아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병합이 발표되자 서울에서 절치부심하며 해외 망명을 준비했고 1914년에 중국을 거쳐 하와이로 망명했다.

노태준은 아버지가 망명간 뒤 황해도 송화로 내려가 모친과 함께 어렵게 지냈다. 그러다가 1921년 2월 아버지가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부임한 뒤 가족들을 불러들이면서 그 또한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인성학교에 다니며 민족 교육을 받았다.

1926년 아버지가 병사한 뒤, 노태준은 귀국하여 매형 이원재 내외가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강릉에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이원재 내외의 보살핌을 받았고 1929년 강릉농업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박승만[1], 김화철 등과 함께 강릉농업학교에서 반일 학생시위를 추진했다. 그러나 도중에 격문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시위운동은 불발되었고, 박승만과 김화철 등은 체포되었다. 이후 수사망이 자신에게 좁혀오자, 노태준은 1930년 무렵에 상하이로 탈출했다.

1931년 3월 난징에서 한국독립당에 가입한 노태준은 이듬해 4월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교육 및 훈련을 받았으며, 1934년 2월 91명의 한인 청년들과 함께 낙양군관학교 한일특별반에 입교했다. 그러나 김구와 지청천 사이의 알력이 심해지자, 김구는 자신을 추종하던 학생들을 난징에 있던 중국중앙군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 노태준도 김구의 아들 김인, 안중근의 조카 안춘생 등과 함께 이 학교에 입학해 1936년에 졸업한 뒤 한국독립당 청년단을 조직해 단장에 취임했다.

1936년 6월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쑤이위안성(綏遠省)에 파견되어 지하공작에 참가했고, 1937년 2월 청년들을 규합하여 난징, 한커우, 창사, 광둥, 류저우, 충칭 등지를 돌며 일본군의 기밀 감지 및 선전공작 등을 전개했다. 또한 1939년 9월 조성환을 단장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의 단원으로 참가해 산시성 시안에 파견되어 광복군총사령부의 시안 진출을 위한 기초 공작을 맡았다.

1941년 1월 시안에 설립된 광복군 제1지대에 편성된 노태준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동창인 안춘생, 조인제 등과 함께 중국군을 나와 제1지대의 간부로 활동했다. 그는 지대장 이준식을 비롯한 제1지대 간부들과 함께 941년 3월 산서성 지역으로 가서 병력 확대를 위한 초모 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초모 활동은 1942년 4월 지대의 개편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1년 봄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김원봉을 필두로 광복군에 합류한 뒤, 노태준은 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산시성과 하남성, 하북성 일대에서 초모활동을 전개했고, 초모한 인원들을 중국군 제34집단군에서 운영하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의 한국청년훈련반과 중앙육군군고나학교 제7분교에서 훈련시켜 공작원으로 파견했다. 그리하여 1945년 5월 경 제2지대 병력은 250명으로 늘어났다.

노태준은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의 합동 작전에도 동참하였다. OSS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되어 정보수집․유격대활동․적후방교란 등을 임무로 하던 일종의 전략첩보기구로, 1944년 10월 웨드마이어 중장이 중국전구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운남성 곤명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OSS는 한반도가 일본과 중국대륙간의 수송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비밀첩보원들이 일본으로 침투할 때 중간기지로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한반도에서의 첩보 활동에 한국인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1945년, OSS는 독수리 작전을 수립, 중국 관내의 한인들, 그 중에서도 한국광복군을 활용하기로 했다. 광복군 또한 이에 적극 협력해 한반도 침투 작전을 준비했다. 제2지대장 이범석은 미군 제14항공대의 쉬노우더 장군에게 미군의 항공활동과 첩보 활동을 돕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광복군을 미군 내에 근무시키고 전략첩보 수집과 한국에서의 연합군 작전을 위해 훈련을 실시해줄 것을 요청했다. OSS는 이를 수락했고, 노태준을 비롯한 제2지대 대원 31명은 미군 기지로 가서 체계적인 침투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1주간 예비훈련을 받은 뒤 3개월간 정규훈련을 받았다. 미군 측은 노태준과 대원들의 기량에 만족해 하며 한반도 침투 계획을 확정지었다.

1945년 8월 5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총사령 지청천, 선전부장 엄항섭 등 19명은 시안에서 OSS 요원들과 만나 광복군 대원들의 국내 침투 문제를 협의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때 OSS 총책임자 도노반 소장은 "금일 금시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은 시작되었다"라고 하여 한미간에 공동작전이 실행된다는 것을 선언하였다고 한다. 대원들은 3개의 지구대로 나뉘었다. 제1지구대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를 맡았고, 제2지구대는 충청도, 전라도을 맡았으며, 제3지구대는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를 맡았다. 노태준은 제2지구대장을 맡아 국내 침투작전을 준비했다.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광복군 대원들은 미국 잠수함에 탑승해 국내로 침투하여 각자 맡은 구역으로 흩어진 뒤 전국에 거점을 마련하고 각종 공작을 실시하면서 민심을 선동하고, OSS 측과 연락해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적 후방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작전은 연속적으로 추진되어 일제의 한반도에서의 지배권에 타격을 입히고자 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국내 침투 작전은 실행되기 직전에 중단되었다.

노태준은 광복을 맞이한 후 1946년 6월 3일 500여 명의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인천에 도착했다. 그는 이범석, 안춘생한국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1946년 10월 조선민족청년단을 설립해 민족주의를 이념으로 내세우며 단일 통일국가를 수립하고자 노력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된 이범석의 비서실장을 맡아 국군 창설과 육성을 후원했다. 이후 <한국일보>의 전신인 <태양신문>을 창간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던 1970년 2월 26일 병사했다. 향년 60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노태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70년 3월 2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승만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