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윤

노정윤
Nojeongyoon.JPG
인물 정보
출생 1971년 3월 28일 (53세)
인천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신체 170cm, 74kg
프로선수 경력
종목 축구
포지션 미드필더
소속팀 산프레체 히로시마 (1993~1997)
NAC 브레다 (1998)
세레소 오사카 (1999~2001)
아비스파 후쿠오카 (2001~2002)
부산 아이파크 (2003~2004)
울산 현대 (2005~2006)

대한민국 의 전 축구선수이다.

선수 경력[편집 | 원본 편집]

아마추어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인천 출신으로 부평중학교, 부평고등학교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포지션은 미드필더. 별명은 마테우스에서 따온 노테우스. 빠른 드리블 돌파와 정교한 킥을 가진 재능이라고 평가 받았고, 축구명문 부평고에서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이를 바탕으로 청소년 대표팀에 차출되었다.

고려대에선 서정원과 호흡을 맞추었다.

프로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이런 유망주인 노정윤을 놓치고 싶은 프로팀은 없었다. 졸업이 다가옴에 따라 노정윤을 지목할 팀이 어디인지에 귀추가 주목되었지만, 노정윤은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 J리그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한 것이다. 산프레체 히로시마는 이전에 마쓰다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JFL(일본 실업축구 리그)에서 J리그로의 출범을 꾀하면서 한국 선수 수집에 열을 올렸는데, 이때 레이더망에 걸린게 노정윤[1]이었다.

정재권과 함께 드래프트를 거부한 노정윤은 드래프트 거부 문제와 함께 왜 하필 일본팀으로 갔냐는 비난에 직면했다. 이 문제는 완산 푸마의 문제로 넘어가는데, 당시 드래프트를 거부한 정재권은 완산 푸마가 가진 1차 지명권 때문에 지명이 확실시 되어서 협상에 들어갔으나, 해결이 되지 않자, 드래프트를 거부했으며, 노정윤은 차순위 지명이 자신이므로, 같은 이유로 거부했다고 한다.

이런 불안한 드래프트를 받기보단 외국무대에 대한 도전을 하기로한 노정윤은 일본으로 진출해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활약한다. 2번째 시즌에도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씹어먹고 10골을 기록하며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준우승에 기여했으며, 1995년, 1996년 2연속 천황배 준우승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이때의 활약으로 1994년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된다.

1997년에 12경기 출전에 그치면서 퇴단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는데, 그 팀이 무려 네덜란드 팀이었다. 1998년 1월 네덜란드NAC 브레다이적하는데 계약기간은 1년 6개월에, 연봉은 700만 마르크(약 6억 8천만 원)이었다. 허정무에 이은 두 번째 에레디비시에 한국인 선수였다. 데뷔전에서부터 골을 넣으며 활약을 기대하게 하는데, 여담으로 이 당시 같은 팀에 있던 선수가 라데였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뛰고 온 후 부상으로 인해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자, 계약을 해지하고 새로운 팀을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그 팀은 황선홍이 뛰고 있던 세레소 오사카였다. 이후엔 윤정환김도근과도 한솥밥을 먹게 된다. 2000년 올스타, 2001년 후기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맹활약 했지만, 리그 성적이 좋지 않아 감독이 외국인 선수 교체를 요구하고 김도근과 노정윤은 재계약을 하지 않게 되며, 노정윤은 새로운 팀을 알아보게 되었다.

당시 노정윤과 접촉한 팀은 울산 현대였다. 계약조건은 1년 임대에 이적료와 연봉 포함, 15만 달러로 구체적인 사항까지 언급될 정도로 이적을 앞두고 있었으나, 9년 전 드래프트 거부의 파동으로 인한 제약이 걸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울산 현대울산 현대미포조선입단하는 대체 방안을 내놓았지만, 노정윤 측에서 거절했고 결국 아비스파 후쿠오카이적했다.

하지만 아비스파 후쿠오카에서의 생활이 순탄치는 않았다. 잔여시즌을 뛰었지만, 약체였던 아비스파는 결국 J2리그로 강등되고 말았고, 노정윤은 2002년에도 계속 아비스파의 선수로 활약했지만 대표팀 유니폼 훼손 사건 등 서포터즈와의 충돌로 인해 시즌 종료 후 팀을 떠났다.

마침 노정윤을 묶었던 규정도 폐지되면서 다시 K리그 진출을 타진하던 노정윤은 이안 포터필드가 지휘봉을 잡은 아이파크로 이적하게 된다. 여기서 안양 LG 치타스와의 경기에서 23초 킥오프 슛을 넣으며 리그 최단기록을 갱신하기도 하고, 2004년에는 30경기 4득점 6도움을 올려 부산의 첫 FA컵 우승에도 이바지한다.

그리고 2005년, 김정남 감독이 지휘하는 울산 현대로 이적하게 된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풀타임 출전은 무리고, 후반 교체로만 35경기에 출전하면서 이천수최성국 등 크랙형 선수들의 교체 선수로 게임을 조율해 나가며 5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그리고 울산은 리그 우승을 하게 되며, 노정윤은 여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이후 2006년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4월 16일 리그 경기에서 K리그 통산 100경기를 달성한 뒤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면서 은퇴를 준비했다.

국가대표 경력[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 국가대표 A매치 통산 45경기 5골 기록. 1987년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1990 제11회 북경 아시안게임 축구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는데, 이 당시 감독이 빠따 박종환이었으며 팀에는 최순호, 황보관, 김주성. 변병주 등의 베테랑 선수들에 팀메이트 서정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별리그에서 파키스탄을 상대로 출전해 골을 성공시켰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차출되었다. 이 당시 정용환, 김도근 등이 대표팀에 있었다. 모로코와 파라과이, 스웨덴 전에 각각 출전했으며, 대표팀은 3무를 기록하며 짐을 쌌다.

1994 미국 월드컵 국가대표과 1994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축구 국가대표에도 발탁되었으나, 아시안 게임 이후 한동안 대표팀에 부름을 받지 못한다. 김호 감독은 체력이 부족한 노정윤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겨서 게임을 조율하는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윤정환이 수행토록 했다.

98frecnhworldcup.jpg

이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차범근이 부임하면서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준비하는 슬로바키아와의 친선경기에 다시 발탁되었다. 이후 1999년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2000년 LG컵 4개국 친선대회, 2000년 CONCACAF 골드컵에도 대표팀 선수로 활약하고 2000년 제12회 AFC 아시안컵에서 3·4위 결정전인 중국전을 끝으로 국가대표를 은퇴한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 원본 편집]

윤정환 이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플레이메이커 로타어 마테우스의 별명을 따서 노테우스라고 불렀을 정도로 기술적인 축구를 했다. 발도 빠른 편에, 몸싸움이 약한 것도 아니라서 밀리지 않고 공을 소유하면서 게임을 운영해나갔다.

이런 픒레이 스타일을 보고 활동량이 많고 체력 소모가 심해 체력이 약하다며 비효율적이라는 평을 내린 사람이 바로 김호 감독. 그래서 김호가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을 때 노정윤 대신 윤정환이 대표팀의 플레이메이킹을 담당했다. 반면 이런 면을 선호한 감독이 차범근이다.

은퇴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은퇴 준비와 동시에 지도자 과정을 준비했다. 3급 수료과정을 밟았다. 은퇴 후에 울산 현대로부터 코치직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2008년 대한축구협회 창립 75년 한일 OB 올스타전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지도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게임 사업가로 나타났다. 마에스티아 온라인은 CBT나 게임성 평가에서 괜찮은 평을 받았지만, 오토가 많고 캐릭터간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조용히 서버를 닫았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부산 아이파크 시절에 황선홍TV 해설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흔한 일이 됐지만, 당시 J리그로 개편되는 일본 프로 축구 리그에 처음 진출한 것이 노정윤이다.

아내인 유영옥 씨가 골프선수라고 한다. 그래서 미국 근황에서 취미로 골프를 친다고. SGTF(미국골프지도자협회)에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를 가지고 미국에서 프로 자격증을 땄다, 티칭 프로로 전향한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각주]

  1. 다만, 여기엔 약간의 비화가 있는데, 김병수가 원래는 91년부터 가계약이 되어있었으나 김병수의 재기가능성이 의심스럽자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새로 찾은 선수가 바로 노정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