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

노량해전(露梁海戰)은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이다.

선조 31년(1589년 12월 26일)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 앞바다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크게 파한 해전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명량해전의 대패 이후 조선 수군이 재해권을 회복하면서 수군과 지상군의 협공으로 한양을 점령한다는 일본군의 수륙 병진작전 자체가 분쇄되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내륙을 통해 진격하던 지상군 역시 여파로 공세 여력을 상실한 채 수세에 몰리자, 일본군은 후방으로 퇴각해 남해 일대에 왜성을 쌓고 지연전으로 조명 연합군의 공세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597년 이후 후반기 남해안 수복을 위해 공세를 가하는 조명연합군과 방어에 급급한 일본군이라는 판도가 형성되었고 보급로가 차단당한 일본군은 전쟁 수행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98년 8월 고니시에게 도요토미가 병사하였다는 급보가 날아들었고 마침내 철수할 명분이 생긴 일본군은 철수작전을 위해 순천의 왜교성으로 집결하였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철수하는 일본군[편집 | 원본 편집]

철수 준비를 서두르는 일본군의 동태를 알아차린 이순신은 일본군을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기에 왜교성으로 들어간 고니시의 일본군을 격멸하고자 (음력)11월 9일 전라좌수영이 있던 고금도 진영에서 출병해 왜교성 앞 바다를 봉쇄한다. 이순신은 유정(劉綎)이 이끄는 명나라 지상군과 협동해 왜교를 공략하고 일본군을 섬멸할 계획이었으며 왜교 앞바다에서 유인과 무력시위를 지속하였다.

궁지에 몰린 고니시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시마즈는 남해(현 남해군)의 소 요시토시와 고성의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연락해 일본군을 집결시켰다.

일본군의 목적은 왜교 앞에 집결해있는 조명 연합군을 고니시군과 협력해 포위 격파하고 고니시의 주력군을 구출해 일본으로 철수하는 것으로, 전선 300척을 편성해 출병하였고 18일 밤까지 500여 척의 일본 함대가 왜교 앞바다로 향했다.

노량의 격전[편집 | 원본 편집]

일본군의 이동 소식을 확인한 이순신은, 고니시의 주력군과 구원군을 일거에 격멸하고자 해상 봉쇄를 열어주었다. 연합함대는 노량 앞바다로 이동해 진을 쳤고 명 수군은 죽도에, 본 함대인 조선 수군은 관음포 일대에 병력을 매복하여 노량을 통과할 일본군을 기다렸다.

다음날 새벽 500여 척의 일본 함대가 노량 해협을 넘어 관음포 앞바다로 진출을 시작했을 때 노량 해협 너머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것은 조선군의 판옥선 85척과 50척의 명군 선단들로 이루어진 연합함대였다.

해협의 출구 포진한 조명연합군 함대는 포격을 가해 해협을 나오는 다수의 일본 함선을 격침시켰지만 일본군은 선제공격을 받아 선두 선단을 손실하는 피해에도 재정비를 마치곤 선제공격을 가한 함대를 포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인근 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명 함대가 공격을 개시하며 일본군은 관음포 앞바다까지 밀려났고 이 여세를 몰아 관음포 앞바다에서 진영을 펴고 있던 이순신의 본함대가 전투에 참가하며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3면이 포위된 형국이 된 일본군은 중앙을 노출하는 피해를 입으며 선두 진영이 와해되어 궤멸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필사적으로 조명연합군의 포위진을 뚫기 위해 역공을 가하며 전투는 격화되었다.

그 결과 중앙을 맡은 진린의 기함이 일본군에게 포위되면서 위기를 맞았고 등자룡의 함대가 구원을 위해 접근하면서 뒤엉킨 양측의 치열한 접현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혈전 속에서 진린은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고 접현전 중 등자룡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우익 본함대는 위기에 처한 진린의 기함을 구하기 위해 진린을 포위한 일본 함대에 포격을 가하며 포위망을 펼쳤고 이어진 근접전 속에서 이순신의 기함은 상당수의 적선들을 파괴하며 적의 기함을 불태우는 전과를 냈고 진린의 기함을 포위하던 일본군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전황은 점차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포위망 돌파 시도도 무위로 돌아가면서 관음포 앞바다에 갇친 일본군은 포위섬멸을 면치 못했고 조명연합군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적하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충무공의 마지막[편집 | 원본 편집]

관음포는 언뜻 보기엔 넓은 바다로 보이기에 관음포 안쪽까지 몰린 일본군은 막다른 포구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추격하는 조명연합군에게 최후의 발악을 시도한다. 선두에서 전투를 독려하던 이순신의 기함은 일본군의 공격에 둘러싸였지만 진린의 기함이 포위망을 뚫으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추격을 계속하던 도중, 급작스럽게 날아든 총탄에 의해 이순신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고 마지막 순간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 채 전사하였다.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에 아들 회와 조카 완은 이순신의 전사를 알리지 않은 채 깃발과 북으로 전투를 독려하여 정오 전까지 살아남은 일본군을 격멸하였다.

종결[편집 | 원본 편집]

전투 결과[편집 | 원본 편집]

조명연합군의 대승, 일본군의 참패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일본군은 500여 척의 함선 중 50척만 간신히 살아남아 일본으로 철수하였고 나포된 100여 척을 제외한 나머지는 침몰하거나 파괴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