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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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廷珏. 호는 오산(午山), 이명은 남영득(南永得, 南寧得).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7년 12월 22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숙종 대의 문신 남구만의 직계 후손이었다. 16세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이후 상경하여 서울기독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는 동시에 이상재, 이필주 등과 교류하면서 그들로부터 애국의식을 배양받았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남정각은 수원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고,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용인, 수원, 안성 등지에 배포해 자주 독립사상을 전파했다. 이후 경찰의 추적을 피해 1919년 8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 중국청년회 어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그해 12월 학교를 중퇴했고, 천진, 상하이 등지를 돌며 망명 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향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장춘에서 한 살 아래의 김원봉을 만난 그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면서 동지가 되었고, 1921년 겨울 베이징에서 김원봉을 다시 만났을 때 김원봉이 의열단의 취지와 투쟁방식을 들려주고 가입을 권유하자 흔쾌히 받아들이고 단원으로 가입했다. 의열단은 1922년 3월 28일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김익상, 오성륜(吳成崙), 양건호(梁健浩) 등으로 하여금 암살하게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의열단은 독립투쟁 의지를 제고하기 위해 국내에서의 대규모 암살, 파괴 투쟁을 계획했다.

1922년 6월, 남정각은 김원봉으로부터 천진에서 국내로 들어가 조선청년연합회 집행위원 김한(金翰)을 만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즉시 출발해 국내에 잠입하여 서울 수창동(需昌洞)에서 김한을 만나 의열단의 대규모 암살·파괴 계획을 설명하고, 동참을 부탁했다. 김한은 거사 계획에 적극 찬성하면서 폭탄을 중국 안동(安東)까지만 운반해 주면 자기의 부하들을 시켜 국내로 반입한 뒤, 조선총독부·조선은행·경성전기회사·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투척하겠다고 밝혔다.

김한의 거사 의지를 확인한 남정각은 즉시 귀환하여 상하이 영국 조계에 소재한 신려사(新旅社)에서 김원봉을 다시 만나 김한의 의중을 전달했다. 이에 김원봉은 남정각에게 거사 자금으로 2천원을 주면서 김한에게 전달할 것을 부탁했다. 1922년 8월, 남정각은 재차 국내로 잠입하여 김한을 만나 거사 자금을 전달했고 구체적인 폭탄 반입 및 투탄 계획을 확정했다. 이때 끄는 상하이에서 폭탄을 안전하고 원활하게 운반하기 위해서는 중계 거점이 필요하다면서 자신이 중국 안동으로 건너가 약종상을 가장하고 중계거점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중국 안동에서 적당한 중계 거점 확보에 실패했고, 할 수 없이 귀국해 김한에게 그동안의 경과를 통보한 뒤 다시 천진을 거쳐 상하이로 가서 김원봉과 폭탄 전달 문제를 협의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그해 10월 20일, 김원봉은 선생을 찾아와 폭탄을 전달할 준비가 끝났다고 하면서 국내로 들어가 직접 폭탄을 투척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선생은 흔쾌히 승낙하면서 결행 의지를 밝히고,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투척방법을 배워 여러 차례 연습까지 마쳤다. 그런 다음 선생은 같은 해 12월 28일 동지 이현준(李賢俊)과 같이 서울에 도착하여 운니동(雲泥洞) 박완명(朴完明)의 집에 머물면서 폭탄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바로 그때 의열단 동지인 김상옥이 종로 경찰서를 폭파하고 10여 일 동안 일본 경찰 수명을 사살하며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결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와 경계가 한층 강화되면서 폭탄 운송이 어렵게 되었고 김한 마저 김상옥의 의거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남정작은 김원봉을 만나 향후 대책을 논의하기로 결심하고 1923년 2월 1일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서울을 빠져나와 베이징을 거쳐 천진에 도착했다. 천진에서 김원봉을 만난 그는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김한이 피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의 대규모 암살·파괴 작전이 계속 추진 중이며, 그것은 김시현(金始顯)과 유석현(劉錫鉉)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운동자금이 부족하여 동지들이 몹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정각은 2월 14일 서울로 돌아온 뒤 폭탄이 도착하길 기다리면서 거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라서 거사 준비가 힘들어지자, 그는 자금을 자체 조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을지로 부근 정목여관(正木旅館)에서 동지 권동산(權東山), 권정필, 유병하, 유시태(柳時泰) 등과 협의하여 내자동(內資洞)에 살던 부호 이인희(李麟熙)로부터 거사 자금을 거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남정각은 유시태와 함께 2월 21일과 24일 이인희를 방문하여 거사 자금을 요구했다. 이인희는 기꺼이 드려야겠지만 지금은 음력 정월이라 자금 조달이 어려우니 며칠간 미뤄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그는 3월 3일에 자금을 인계받기로 약속하고 돌아갔다.

1923년 3월 3일, 남정각이 홀로 이인희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잠복하고 있던 10여 명의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유시태도 체포되었고, 3월 15일에 김시현, 유석현 등 동지들이 일제히 체포되었다. 이때 일본 경찰에 압수된 거사 물품은 건물 파괴용 폭탄 6개, 방화용 폭탄 17개, 암살용 폭탄 13개 등폭탄 36개, 권총 5정과 실탄 155발, 신채호가 집필한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 361부, <조선총독부 소속 관공리에게>라는 협박문 548매 등이었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며 의열단의 강령을 기사형식으로 일부 소개했다.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에는 4개 조건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1. 민중은 우리들의 혁명운동의 대본영이다. 2. 폭력은 우리들의 혁명에 유일한 무기이다. 3. 우리들은 민중으로 더불어 손을 잡고 천만년이 지날지라도 이 강도 일본의 세력을 파괴하기 위하여 폭력에 의한 암살·파괴·폭동 등을 끊이지 아니할 일. 4. 우리들의 생활에 적합하지 못한 제도를 벗어나서 인류가 인류를 압박하고 권력이 인류를 압박하는 등의 일이 없는 이상적 조선을 세울 일 등이다.

이후 남정각은 김시현, 유석현 등 의열단 동지 12명과 함께 1923년 8월 7일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재판에서 다음과 같은 최후 진술을 했다.

나는 의열단원이오. 나는 경술국치에 불평과 불만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소. 나는 우리 민족에게 각성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살았으므로 사형도 좋소이다.

남정각은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1] 이후 1929년 출옥한 그는 중국 천진으로 망명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진교민회(天津僑民會)를 조직하여 이주 한인동포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힘썼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면서 한국이 독립했다. 남정각은 천진에서 동분서주하며 동포들의 귀국 배편을 마련했고, 일본인들의 재산을 몰수해 동포들의 여비와 이사 비용에 충당하는 등 한인 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귀국한 그는 1946년 50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고려동지회(高麗同志會)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고려동지회의 실천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전민족의 총의에 기반하여 수립된 정부를 지원하고, 실천적 활동으로 건국 대업에 기여하며, 가장 진보적인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산업의 진흥을 도모하고, 특히 농민대중을 지도하여 그들의 질적 향상과 농업기술의 발전을 도모하며, 건실한 사회의 기초가 될 건전한 인격의 수련을 도모함이다.

남정각은 고려동지회 동지들을 농촌으로 파견해 농민들의 의식개혁과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 계몽운동을 벌였고, 일본에서 전쟁 피해를 입은 동포들의 구호사업을 벌였다. 한편, 그는 1948년에 출범한 반민특위가 이인희를 체포하여 법정에 회부했을 때 증인으로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인희는 이완용에 못지않은 반민자라 사료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거사가 실현되었더라면 민족 만년에 그 쾌거가 남았을 것이며, 우리 민족 전체의 자랑이 되었을 것을 본인이 체포됨으로써 미리 약속했던 폭탄 영수자가 없어서 사건 전체가 수포로 돌아가고 김시현, 황옥 등 동지가 체포되었습니다. 당연히 극형에 처할 악질자입니다.

그러나 이인희는 반믹특위가 강제로 해체된 후 풀려나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 후 남정각은 조용히 지내다가 1967년 1월 29일에 사망했다. 향년 70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남정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67년 7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2]

각주

  1.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2. 이때 이명인 '남영득'으로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