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동 4.3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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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 원본 편집]

제주 4.3 사건 발생 이후 정부 파견 토벌대는 제주 중산간 일대의 마을들을 소개하면서 인근의 주민들을 해안가로 강제 이주시키켰으며 중산간 마을의 상당수가 폐허가 되었다. 이 성이 있는 선흘리 마을 일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1948년 10월 마을 전체가 초토화되고 이후 1949년 봄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폐허가 된 선흘리 마을을 재건할 당시 정부에서는 주민들과 무장대간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 통제하기 위한 전략촌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성을 쌓았다.

이 성의 축성작업은 해안마을인 함덕리 수용소 등지에서 생활하던 선흘리 주민들과 조천 관내 주민들을 동원하여 1개월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성은 가로 150m, 세로 100m, 높이 3m, 폭 1m정도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총 500여m의 성을 쌓았다.

성을 쌓는데 필요한 돌은 대부분 인근 밭의 담(밧담)이나 산담을 이용하였으나 돌이 모자란 이유로 돌절구나 주춧돌까지도 끌어다가 쓴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성벽 중간중간 총안구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 성은 4.3 당시 중산간에 축성된 성 가운데 원형보존이 가장 잘 된 성으로 일부는 허물어지고 일부는 인근 과수원의 경계돌로 옮겨지기는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원형을 복원하는데는 무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2007년 제주도에서 복원을 하여 관리중에 있다.

성의 생활[편집 | 원본 편집]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거주를 하였다. 사실상 일종의 수용소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으며, 성 밖을 오가는 것도 주둔한 경찰에게 통행증을 받아야만 했으며, 당연히 야간은 통행금지 상황이었다.

경찰은 이 성을 축성한 이후 주민들로 하여금 보초를 서게 하였는데 4.3 사건으로 인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전투, 그리고 토벌대의 일방적인 학살 등으로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된데 이어 그나마 남은 젊은 남자들도 6.25 당시 자원입대를[1] 했기 때문에 보초를 서는 역할은 16세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의 몫이 되었다.

거기에다 이 곳에 주둔한 파견소 경찰들의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것도 노인과 여성들의 몫이었고, 노인들이 보초를 제대로 서지 않는다고 경찰들에게 폭행당하는 일도 빈번했었다.

이 성의 위치는 4.3 당시 파괴된 선흘리 원 마을과는 떨어진 곳으로 알선흘로 불리던 곳이었으며 본래 마을이 있던 곳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들 주민에 대한 통행금지가 해제된 1956년 이후 주민들은 본래의 마을이 있던 자리로 이주하여 다시 집을 짓고 살았으나 일부는 그대로 성 안에 정착하여 오늘날의 낙선동을 이루게 되었다.

4.3 폭낭나무[편집 | 원본 편집]

성 출입구 부근에는 4.3 폭낭나무라고도 하는 팽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나무는 선흘리에 성을 두르고 함바집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냈던 1949년 봄 한라산으로 토벌을 나갔던 토벌대가 산에서 캐온 팽나무를 당시 성의 출입구 앞에 심었고 그 나무가 그대로 자라서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이 성의 복원 당시 너무 번듯하게 지어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각주

  1. 이 자원입대도 4.3으로 인한 비극인데 4.3 사건으로 당시 제주도 주민들 전체가 빨갱이 취급을 당해서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국군, 그것도 주로 해병대에 상당수 젊은 남성이 자원입대를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