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철 (작곡가)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노동해방의 나팔수

김호철은 1980년대를 풍미한 민중가요 작곡/작사가로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본명은 김수호로 당시 조직 내에서 가명을 만들던 방식인 맨 뒷자를 앞으로 옮기고 뒤에 여자는 "철", 남자는 "순"을 붙이는 방식으로 가명을 만들었더니 김호순(...)이라 본명과 유사해 들통나기 쉽다는 이유 때문에 여자가 붙이는 철을 붙여 김호철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 민중/노동가요의 대부로 "노동해방의 나팔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트럼펫연주를 하기도 한다. 민중가요 가수인 박준과 인연이 깊은편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노동현장에서 불리는 수많은 곡들을 작곡한데 비해 실제로 들어오는 수입은 없는데, 문예운동이 일종의 "운동"으로 인식되기도 했고, 저작권 인식도 희박했을 무렵에 더해 실제로 판매하더라도 곡당 5만원을 넘기기 어려워 그냥 공유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라고 한다. 앨범을 내려고해도 한 앨범에 2천만원 정도가 드는데, 이걸 앨범당 1만원에 팔아도 다 팔리려면 3~4년은 족히 걸린다고(...)[1] 그외에 1980년대의 왕성한 활동에 빗대 자판기라는 별명도 붙어있다. 얼마나 많은지 "한국 현대 민중가요의 통계적 분석과 그 의미 -1945년부터2000년까지"(최동호 2005)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00년까지 작사 88편, 작곡 114편으로 모든 주체를 통틀어 단독으로 작사/작곡 1위를 차지했다. 이는 1987년부터 2000년까지 발표된 민중가요의 7%를 작사했고 9%를 작곡한 것이다. 김호철의 노래는 멜로디가 강렬하고 군가풍의 곡이 많은데, 2000년대 들어와서는 학교에서 세상으로와 같이 부드러운 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또 노동해방, 투쟁을 강조하는 곡들이 많은 편이다. 이는 김호철이 PD계열 인물이었기 때문. NL에 윤민석이 있다면 PD에는 김호철이 있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한 적은 없으며 중학교 1학년 때 중학교 음악선생에게 음감이 좋다는 칭찬을 들은 후 음악과 가까워 졌다고 한다. 김호철은 한국체육대 태권도학과에 입학 했으며 그가 2학년이 된 해에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부산과 마산출신 체고생들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호철은 "부산과 마산 학생들은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서 정권과 한판붙자"라는 대자보를 붙였다가 수배되었고, 10·26 사건이후 복학해 곧 학생회에 출마해 학생자치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학생운동을 시작한 김호철은 1980년대 계엄해제 운동에 참여했고, 서울역 회군에 반대하였으나 관철시키지 못했고, 계엄군 합수부에서 고문당한 후 투옥되었다.

그리고 당시 학생운동한 학생을 군대에 보내는 심히 막장스러운 정책에 의해 군에 끌려갔고 군에서 군악대로 복무하였다. 이 것도 사연이 있는데, 당시에도 야호부대라고 하여 데모하다 끌려온 사람은 최전방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마침 군악대에서 편곡하던 사람이 전역하는 바람에 편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원래는 최전방을 보내야 하던 김호철이 선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군악대에서도 다시 한 번 데모 전력이 걸려 다시 최전방으로 보내져야 했으나.... 마침 군악대에 태권도를 가르칠 사람이 없었기에 한국체대 태권도학과인 김호철을 보낼수도 없고 하여 군악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대후 신원조회에 걸려 복학이 거절당한 후(...)에는 밤무대 가수를 전전하였다. 원래는 제적당한 후 사우디아라비아를 가려 했으나 신원조회에서 탈락해 가지 못한 탓이었다고 한다. 밤무대 가수를 할 적에 무대공포증이 있었으나 일당 때문에 참고 했다고 한다.

1985년 구로공단에서 일하기 시작한 김호철은 동생인 김경희[2]의 권유로 구로공단에서 기타반을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잘린 손가락>, <단결투쟁가>같은 곡이 작곡되었다. 그러나 그는 1987년 해고되었고 복직투쟁을 하다 민주정의당 당사점거 사건 중 구속되기도 하였다. 1988년 영등포산업선교회 노동자집회에서 당시 큰 파급을 몰고온 파업가를 발표하였다[3].

2017년에는 중단했던 노동의 소리 서비스를 재개했다. 김호철은 노동의 소리를 통해 자신의 음악뿐만 아니라 허락받은 다른 활동가의 노래도 같이 올리겠다고 밝혔다.

2018년 파업가 30주년 기념 김호철 헌정음반이 출시되었다. 김호철의 아내이자 민중가수인 황현의 암투병 기금 모금을 겸한다. 2022년 7월 22일부터는 유튜브에서도 들을 수 있다.[3] PLSong 유튜브에서 파업가 30주년 김호철 헌정음반 관련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2020년 제28회 전태일 노동상 개인부문을 수상하였다.[4]

의의[편집 | 원본 편집]

본격적인 민중가요가 등장한 1980년대였지만 여전히 "운동가요"로서 학생 운동권 위주로 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호철은 노동자 노래단을 주도하며 노동자를 위한 노동가요를 만들어 민중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가사에서 노동자는 노래의 주체가 되었다. 또 이런 배경 하에서 많은 곡들이 노동자들에게 익숙한 소위 "뽕짝"이라 불리는 트로트 곡조나 군가풍으로 작곡되었다. 이는 당시 문예운동 세력에서 민중가요의 예술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곡목록[편집 | 원본 편집]

본래는 본인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를 해왔으나 노동의 소리 운영을 재개하면서 유튜브는 비공개 처리되었다가 2018년 2월 다시 공개되었다. 음악은 김호철 본인이 운영하는 노동의 소리plsong에서 들을수 있다. 갱신이 잘 되지 않지만 유튜브는 여기이다.

1980년대[4][편집 | 원본 편집]

1990년대[편집 | 원본 편집]

2000년대[편집 | 원본 편집]

2010년대[편집 | 원본 편집]

참여 앨범[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울산저널
  2.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의 가사를 작사하기도 한 노동운동가이다. 당시 서울지역노동단체연합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3. 꽃다지 헌정음반소개문
  4. 1988년 발표된 몇몇 곡은 1987년이전에 작곡된 것도 있다고 김호철 자신이 인터뷰를 통해 밝혔으나 정확히 언제 작곡되었는지는 불명확하기 때문에 발표기준으로 적었다. [1]
  5. 김호철이 본인의 유튜브에는 몇년에 만들었는지 쓰여있지 않지만 이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2]
  6. 박근혜가 아니라 박그네가 맞는 표기이다. 김호철 자신이 그렇게 밝혔다.
  7. 현대중공업 노래패 노래마당과 공동창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