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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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1898년 3월 2일 전라북도(현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 347번지에서 김해 김씨 김일택과 모친 박순화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인삼 농사를 하는 중농으로 알려졌다. 15살 때인 1913년 한 살 위인 김현성과 결혼했으며, 1916년 3월 20일 첫째 딸 김영보를 낳았다. 그러나 얼마 후 김용중은 가족을 한국에 남겨두고 미국으로 떠났고, 두 번 다시 재회하지 못했다.

김용중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외손녀인 김성희에 따르면, 그는 향리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18살 되던 1916년 10월 서울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다고 한다. 중국으로 건너갈 생각이었지만, 누구에게도 그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집안의 가장이자 갓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가 가족과 집안을 등지고 중국으로 향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중국에 간 직후 미국 유학을 떠난 걸 볼 때, 처음부터 미국 유학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로 건너간 김용중은 협화서국에서 여운형, 조지 애쉬모어 피치를 만났다. 당시 두 사람은 조선 청년들의 미국 유학 알선과 도항 절차 알선에 주력했다. 김용중은 두 사람의 도움에 힘입어 같은 금산군 출신이자 평생 사업 파트너이자 독립운동 동지가 될 송철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여권 또는 비자도 없이 미국에 입국했는데, 이는 대한인국민회가 보증했기에 가능했다.

1917년 샌프란시스코로 상륙한 김용중의 이후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서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같은 시기 샌프란시스코에 함께 간 송철이 노동소개소에 있으면서 여러 노동을 수행할 걸 볼 때, 김용중 역시 노동소개소의 주선으로 한인 동포들이 집중적으로 수행하던 농장노동, 철도부설노동 등 단순 육체노동에 종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한국에서 영어를 익히지 않았으니 어학과 중등과정을 이수해야 했을 것이다.

1920년 4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유학생총회 결성발기자회가 조직되었을 때, 김용중은 김현구, 김여식, 명일선, 문도라티 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지방 발기자로 이름을 걸었다. 1921년 외국인을 위한 어학학교인 센트럴 주니어 하이 스쿨에 같은 금산 출신의 친구 10여 명과 함께 다녔으며, 1922년 주 로스앤젤레스 일본 영사의 보고에 따르면 김용중이 Olive Court 2번지에 김학수, 김근성, 임일 등과 함께 학생 신분으로 거주했다고 한다.

김용중의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인 나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하버드, 컬럼비아, 조지 워싱턴, 캘리포니아 대학 등지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많은 대학을 전전한 동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학비가 부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1927년 여름 송철과 함께 채소, 과일 위탁 판매를 시작했고, 이로써 묵돈을 쥐자 그해 가을 학기에 하버드대학에 입학했다.

1928년 7월 8일, 김용중은 <보스턴 선테이> 의견 광고란에 '일본의 황금통치'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일본은 최상의 도둑이 최고의 시민이라는 이상을 필사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조선과 만주에 대해 일본이 펼친 정책을 보라. 일본은 서방 세계에 거짓말을 하고 조선 통치를 강탈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조선인들에게 비수를 들이대 일본 군국주의자의 자존심 앞에 무릎꿇게 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의 사업 활동 및 독립운동[편집 | 원본 편집]

김용중과 송철은 1928년 5월 K&S Jobber를 설립해 로스앤젤레스 시장에서 각종 과일 및 채소를 위탁판매했다. 이들은 사업 경영 3대 원칙으로 다음과 같이 정했다.

첫째, 신용으로 사업의 근본을 삼는다.

둘째, 입하되는 물건은 양호해야 한다.

셋째, 언제나 고객이 찾는 물건을 준비해야 한다.

또한 이들은 고객들에게 매각 내역에 대한 증빙 서류 및 관련 장부를 공개해 신용을 획득했다. 그 결과, 그들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이들은 당시 <김씨형제상회>에서 날로 사업을 키우던 김호, 김형순과 협력하였고, 서로 사돈 관계를 맺었다. 그는 1934년 7월 2일 김형순의 맏딸 메리 앤 김(Mary Ann Kim. 한국명 김영옥)과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다.

다만 김용중이 한국의 가족을 내팽개 친건 아니었다. 국내에 두고 온 딸 김영보, 공생 김정중의 아들 김진현, 여동생 김준희가 모두 일본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를 제공했다. 김영보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 일본여자대학교에서 수학했고, 김진현은 일본 중앙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김준희 역시 도쿄에서 대학공부를 마쳤다.

한편, 김용중은 독립운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김호, 김형순, 김원용 등이 결성한 리들리그룹의 한인 지원 및 독립운동을 후원했으며, 1939년 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 중앙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1940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제5차 대표대회에 몬타나 지방 대표로 참가하여 중앙상무위원회 선전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는 선전위원이 된 이래 대한인국민회의 선전, 홍보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신한민보> 영문란을 혼자 담당하면서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1940년 한국 광복군이 조직되자 로스 앤 젤레스의 K&Z 콜럼비아 브로드캐스팅 라디오와 타임즈, 이브닝 익스프레스, 이브닝 뉴스 등의 신문사에 이 소식을 투고했다. 1941년 4월 20일 재미한인사회의 통일조직으로 조직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담하여 집행부 위원 겸 선전과장이 되었다.

진주만 공습 소식이 전해지자, 김용중은 곧바로 LA 타임즈에 '일본은 언제 만족하게 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투고하여 일본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또한 한인들의 반일 의지와 대미 충성을 서약하는 진정서를 국민회를 대표하여 미 국무부에 제출했다 그는 선전요령으로 미국 국방 협조에 충성을 다할 것, 한국 광복군을 극력 후원하여 동서에서 연합 전선을 결성하여 일본을 격파할 것 등을 결정했다. 또한 주미외교부 위원장 이승만과 함께 당면문제 협의를 위한 워싱턴 특파원으로 선정되었다.

김용중은 1941년 12월 29일 워싱턴으로 향해 이승만과 합류했다. 이후 1942년 2월 27일 ~ 3월 1일까지 라파예트 호텔에서 개최된 대한인자유대회의 준비 및 진행에 힘썼으며, 2월 28일 영어로 연설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 정부의 청원을 호소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의 연설은 WINX 라디오에서도 방송되었따. 또한 3월 7일 뉴욕에서 개최된 26개국 동맹원탁회의에서 이승만과 함께 초청받았으나 이승만이 감기를 이유로 불참하자 혼자 참석했다.

워싱턴 및 뉴욕에서 임무를 마치고 LA로 귀환한 김용중은 선전 활동 및 한중연대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1942년 충칭에서 중한문화협회가 조직되자, 중국 입법원장 쑨커에게 축하 전보를 발송했으며, 중국 쌍십절과 관련해 장제스에게 축하 전보를 보내는 한편 LA 거류 중국인들의 쌍십절 축하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1942년 말 워싱턴을 방문한 재미한족연합회 집행부의 김호가 외교위원부의 문호를 확대해 위원을 확충하자고 주장했으나 이승만이 거부하면서,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이 분열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43년 초 국민회와 한족연합회는 이승만의 면직을 임시정부에 청원하고 이범석을 추천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이를 거부했다. 한족연합회가 이승만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하고 독자적인 워싱턴사무소 설립을 주장하자, 이승만이 이끄는 동지회는 1943년 12월 23일 연합회를 탈퇴했다. 이에 한족연합회는 1944년 6월 5일 워싱턴사무소를 설립하고 김원용전경무를 상주시켰다.

이리하여 한국의 외교사무소가 2곳이 되어 버리자, 임시정부는 1944년 8월 외교위원부 개조 방침을 천명했다. 이에 하와이와 본토 각지에 산재하던 재미한인 17개 단체 중 13개 단체가 호응하여 재미한인각단체대표회를 개최하고 외교위원부를 개조했다. 김용중은 이 대표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할 위우너 15명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구는 동지회가 불참했다는 이유로 개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한 주미외교위원회 인선과 내용을 발표했다.

재미 한인들은 30여 년간 지지하고 성금을 보내준 자신들의 결정을 무시하고 이승만을 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한 임시정부의 처사에 분노했다. 이리하여 갈등이 극에 달하자, 김용중은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다. 1943년 중반 워싱턴 D.C로 주거지를 옮긴 그는 한국사정사를 설립하였다. 이 조직은 1943년 비영리 문화조직으로 캘리포니아주에 법인등록을 하였으며, 1943년 9월 이래 본부를 워싱턴에 설치했다.

그해 11월 22일에는 송철과 함께 <한국의 소리>라는 월간 영자지를 간행했다. 창간호의 레터헤드에는 "자유에 헌신"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1943년 11월 시작된 <한국의소리>는 1961년 3월 제265호까지 17년 5개월 동안 간행되었고, 1961년에는 기간행분이 모두 수록된 단행본이 출간되기도 했다. 또한 한국사정사가 발행하는 공보는 한국의 소리 발간 중단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한국의 소리'는 영문으로 발간되었으며, 재미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미 국무부 등에 회람되었고, 한국사정사와 김용중의 이름을 알리는 매체 역할을 했다. 1943년 11월에는 한국의 소리가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전시정보국의 태평양지역 책임자 오웬 레티모어, 부책임자 조지테일러, 한국섹션 책임자 E.W. 쿤스, 뉴욕공립도서관, 중국 대서관 등에 배포되었다.

김용중은 이 월간지를 통해 한국 문제와 관련된 사건, 사실, 인물에 대한 정보, 평가, 비평, 분석, 보도 등을 전달했다. 그는 한국문제가 논의되는 장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시간과 경우가 허락할 때마다 백악관, 국무부, 전시정보국 등 한국 관련 부서에 편지를 썼다. 또한 기자들과 만나 한국 관련 기사 및 논평을 제공했으며, 라디오에 출연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렸다. 이러한 그에 대한 미 국무부 전시정보국 관료들의 평가는 우호적이었다. 선교사 출신의 조지 매큔 박사는 김용중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김용중은 LA의 공한 사업가로 좋은 교육을 받았고, 김호의 사위로, 지적이며 젊고 유능하다. 현재(1942년) 워싱턴에서 이박사와 협의중이다. 그는 한길수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며 현재의 논쟁에서 배제되어 있다. 나는 그가 견문이 넓고 정력적이기 때문에 매우 유용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던 E.W. 쿤스도 김용중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모든 한국인들의 목소리 가운데 유일하게 못마땅한 소리는 중경에서 김구가 보내오는 견해인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그는 정확하게 (실상을) 보고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가 임시정부의 심정을 대변하지 않으리라고 믿고싶다. 귀조직이 미국 내 한국인들의 의견 중 광범위하게 선정된 여론 샘플을 제시해줄 것을 제안한다. 이는 전후 한국을 돕는 효과를 지닐 것이다.

이들이 이토록 호의적인 평을 내린 건 김용중과 개인적으로 두터운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쿤스는 김용중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고, 김용중은 한국 김치 맛을 그리워한 쿤스에게 김치 레시피를 제공했다. 또한 매큔은 한국의 소리에 여러 차례 글을 싣고 한국 지리에 대해 설명했다. 호머 헐버트 역시 김용중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한국의 소리에 <한국의 문호개방>이라는 글을 4차례 연재하여 과거 고종의 밀사로서 활약했던 경력을 소개했다.

1944년 1월 3일 재미한족연합회 선전부장 명의로 전시정보국에서 방송한 이래, 그는 전시정보국과 긴밀한 연계를 맺었다. 김용중은 부지런히 성명을 발표하고 편지를 쓰고, 기자와 관리들을 만나 한국독립을 선전했다. 또한 1944년 9월 15일부터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44개 연합국의 국제연합구제부흥기관에 재미한족연합회를 대표해 방청객으로 참석했다.

이 무렵, 1945년 1월 5~17일간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국제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재미한족연합회, 워싱턴사무소,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 김용중의 한국사정사, 한길수의 중한민중동맹단, 유일한의 고려경제회 등 5개 단체는 1944년 11월 이 대회에 참가하는 일을 놓고 논의했다. 회의 결과 유일한, 전경무, 정한경이 대표로 선출되었지만, 정작 이승만이 독자적으로 회의에 참석해 한국 대표로 자처하면서 갈등이 일어났다.

1945년 4~5월 샌프란시스코 회담이 열렀을 때, 김용중은 한국의 소리를 대표하여 언론인으로서 이 회담을 방청했다. 이때 5개 단체들도 참가를 시도했으나, 이승만의 독단적 행동이 이번에도 발목을 잡았다. 이승만은 미국이 얄타 회담에서 소련에게 한국의 지배권을 양도했다는 '얄타 밀약설'을 제시했고, 미소 정부 당국의 공식 부인에도 불구하고 얄타 밀약설을 끈질기게 주장했다. 심지어 미 국무부 관리들과 중국 국민당의 외교정책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이에 김용중은 미국무부장관과 영국외무장관에게 얄타 밀약설의 확인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두 장관은 근거가 없다는 답신을 보냈다. 또한 그는 샌프란시스코회담에 참가한 호주, 영국, 그리스 대표단 등에게 편지와 한국의 소리를 보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이후 그는 1945년 5월 27일 LA Examiner 지에 성명서를 발표해 얄타 밀약설을 부정하며 한국의 독립이 카이로선언에서 약속되었다고 주장했다. 전시정보국의 관료 Claude A. Buss는 김용중의 '한국의 소리'가 샌프란시스코회담에 참가한 연합국들의 한국이해에 도움을 주었으며, 얄타밀약설을 부인하는 보도는 현명한 일이었다고 밝혔다.

해방 정국 시기 행적[편집 | 원본 편집]

8.15 광복 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1945년 10월 24일 미주에서 5명, 하와이에서 9명 등 총 14명의 대표를 선발해 국내로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김용중은 이들과 함께 귀국하지 않았으며, 귀국을 위한 청원 또는 로비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는 대신 미국에서 한국의 분단을 저지하고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선전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1946년 1월 28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앞두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집필해 이념 대립보다 화합을 추구하여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하나의 민족이 해방될 때 많은 새로운 사상들이 제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이러한 사상들이 제 아무리 좋은 것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들 모두를 취할 수는 없으며 또한 우리가 사상만으로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실제적이 되어야 하고 화해의 기초 위에서 공통 프로그램을 채택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단합된 민족이 될 수 없습니다 민주적인 국민은 자신의 반대자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압니다.

(중략)

이러한 시험을 거쳐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 각자는 돈이 많건 적건 자유주의자건 보수주의자건 간에 자신의 책임 몫을 떠안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우리는 각 개인이 선호하는 정치와 경제 체계에 대한 이론들을 희생해야 하고 함께 설 수 있는 공통의 지반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 마지막 한 판 승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효율적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무엇을 하려고 감히 명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

정치적인 분열은 국민의 의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잡고자 계획하는 소수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능한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우리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도자가 요구됩니다. 국외에 있다가 들어온 우리의 혁명 지도자들은 이 나라의 대표로서 자신을 칭하지 말아야 하며 봉사하는 마음을 갖고 자신들이 적의 탄압을 겪은 것보다 조국 안에서 더한 고통을 겪었던 지도자들과 겸허하게 머리를 맞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조국 땅 안에 있는 동포들이 우선권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역을 옮겨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구하는 것은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애국심은 이기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이 국민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조력자가 되기 위해서 이 나라에 오고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온다면 그것은 매우 애국적인 것일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 민족의 자기 존엄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면 소비에트나 미국이 우리나라의 후견인 노릇을 하도록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끝없는 혼란이 계속 될 것입니다 권력을 추구하러 온 이들이 대한민국에서 발붙일 땅은 없습니다.

그는 이와 함께 신탁통치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는 글을 한국의 소리에 기재했다.

미소의 조선공동점령은 선의의 원조 목적이 본의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원조가 아니라 지배가 되고 말았다. (중략) 미소는 당초에는 조선의 원조자였으나 조선은 조선의 주인의 행위를 하고 있다.

1946년 6월 14일 워싱턴 포스트사의 라디오방송인 WINX의 특집담당 논평위원 에드워드 하트와의 인터뷰에서, 김용중은 주변 강국들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한국은 중국, 러시아, 미국이 만나 악수를 나누거나, 혹은 서로 주먹을 날릴 수 있는 교차로에 있다."면서, "한국이 알자스-로렌이나 벨기에와 같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의 중립적 통일방안을 최초로 제시했다.

하트: 김 선생님 당신의 제안은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형제애가 보편화 되지 않은 오늘날 한국이 강대국 간의 침략의 발판이 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김용중: 물론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한국의 주권과 독립에 대한 불가침을 공동 보장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과 소련이 한국에서의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특권을 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허락하지도 않는다는 공약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협약은 공격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힌국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하트: 그러면 중국과 영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한 협약에 그들도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용중: 네, 물론입니다.

1946년 6월 15일, 김용중은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소련 스탈린 서기장에게 미소공위잭래 촉구 공개서한을 발송했다. 여기서 5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38선을 즉시 철폐하라.

둘째, 일제하 국내 지도자들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라.

셋째, 미소 양군은 동시 철수하라.

넷째, 국가 재건 위한 외국인 고문기술자를 초빙하라. 단, 미소 인사는 배제하라.

다섯째, 미소는 한국 주권, 독립불가침을 보장하고, 정치, 경제적 특권을 요구하지 말라.

여기서 그는 해방 후 귀국한 정치지도자들을 배제하고 일제하 국내에서 투쟁한 국내 인사들로 임시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한 이유는 해방 후 귀국한 정치인들이 미소 강대국의 영향력을 대변하고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해방 후 귀국한 정치 지도자들에게 독립이 실현될 때까지 정치무대에서 은퇴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김용중은 입법의원 창설 계획이 보도되자 하지 중장에게 공정한 선거의 실시와 함께 민주의원 즉시 해체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민주의원이 이승만의 한국민주당 그 자체이며, 이승만과 같은 소수 귀국자와 부유한 지지자들이 통제하는 위성이니, 이를 내버려두면 남한 내 다양한 정치집단 간의 조화 가능성을 파괴할 거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1946년 11월에 실시된 입법의원 선거 결과, 이승만 계열 민주의원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반면 좌익은 검거 및 체포령을 피해 은신했다. 이에 김용중은 입법의원 선거가 불법이라며 무효화를 주장했다. 그러지 않으면 공산당의 선전거리가 될 것이라며, "이번 선거는 이기적이며 비애국적인 일파에 의한 민주주의 농단이다."라고 규정했다.

1947년 초 제2차 미소공위가 열렸을 때, 한반도 각지에서 반탁시위가 열렸다. 김용중은 개인적으로 신탁통치에 부정적이었지만, 반탁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이 순수한 의도로 정치운동을 벌이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는 정치적 운명에 불안을 느낀 이들이 “반탁을 정치적 구호로 이용하여 순진한 국민의 감정을 충동”하는 기만책을 쓰고 있다고 주장헀다. 그의 이같은 비판은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이승만을 겨냥하는 것이었다.

1947년 6월 한국에 입국한 김용중은 1947년 7월 8일 조선 라디오방송에서 민족자주적 통일을 지향하는 자신의 중도파적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날 '단합을 호소함'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고, 7월 31일자 한국의 소리의 1면에 게재되었다.

나는 우리 인민들이 서로 증오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매우 괴로와하고 있습니다. 좌익은 우익을 증오하고 우익은 좌익을 증오합니다 이것은 아니 될 일입니다! 만일 이러한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단합하지 않으면 아무데도 갈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 지도자들이 인민대중의 복리를 위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공동의 근거를 마련하기를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당시 남한 정계에서는 김용중이 마샬 미 국무부 장관의 특사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승만과 갈등관계에 놓였던 하지가 이승만을 대체할 정치세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김규식대통령 옹립설을 흘리며, 독립협회 시절 이승만의 선배였던 서재필을 하지의 고문인 특별의정관으로 불러들일 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용중은 그저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을 뿐, 미 정부와 어떠한 연관 관계도 없었다.

김용중은 하지, 여운형 등과 면담하고 서울 성북동 김호의 자택에 머물며 남한 정치인들과 접촉했다. 여운형은 암살되기 전날인 1947년 7월 18일 김용중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파’분자만을 선호한다고 하면 여기 남조선에서 미국은 그 반대극으로 가려하고 있소. ‘좌익’ 또는 극‘우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히고 그의 활동은 방해받고 있소이다 (중략)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이다!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저 미군정 국립경찰에 고용되어 있는 친일파의 손에 고통을 당하고 있소.

여운형이 암살된 뒤, 김용중 역시 암살 위협을 당하다 1947년 7월 22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국에 도착한 직후 성명서를 발표해 여운형 암살을 규탄하면서, 구체적으로 이승만, 김구의 이름을 거론했다.

이승만과 김구가 이끄는 극단주의자들이 위협, 협박, 폭력 등의 악당짓을 통해 미군사령부를 위협하고 있으며 대다수 조선인들의 의지를 위협하고 있다. (중략) 사실 이승만과 김구는 우익이 아니라 이기주의적 반동분자들이며 국가이익과 무관하게 개인권력과 지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1947년 11월 29일, 김용중은 유엔총회 미국대표단장 오스틴과 소련대표단장 비신스키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1. 1948년 3월 21일까지 미소 양점령군의 동시 철수 완료.

2. 1947년 2월 10일까지 38도선 무조건 철폐. 양지역 한국인들의 무제한적 이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 정치결사의 자유 보장. 1948년 3월 1일 정식 통일한국정부 수립.

3. 한국 재통일기 동안, 양점령군은 5개 소국가로서 구성된 유엔위원단의 감시하에 각지역의 법률, 질서 수호.

4. 유엔위원단은 미소의 철군을 감시하며, 미소양군은 경찰력에 필요한 경무기 외에 어떠한 무기도 조선에 남기지 말 것.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가 일정에 오르자, 김용중은 북한이 유엔 승인하의 선거에 반대하는 남측 인사에 한정해 초청을 했으니 이를 무시해야 한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1948년 5월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가 확정되자, 김용중은 "이승만, 김구 등이 극단분자들이 자신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들의 ‘적이며 공산주의자’라고 무고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선거실시는 1946년 입법의원 선거의 재판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민주의원 대표로서 미국에서 활동하던 임영신은 "가장 열렬한 반미친소공산주의분자라도 조선에 실재하지 않는 이 자(김용중)가 낸 제안보다 더욱 교묘한 극동에 있어서 미국의 지위를 훼손하는 기교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반탁투쟁위원회와 독촉국민회는 김용중을 민족반역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시기 통일운동[편집 | 원본 편집]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김용중은 한국의 소리에 "이대통령에게 보내는 경고"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경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 박사가 새로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해온 일이다 그는 한국에 돌아간 뒤로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적 성공을 축하하는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경고하고자 한다 그가 만일 자기의 정치적 도구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통치를 계속한다면 조국의 통일이 불가능해질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은 유혈 내전의 결과 몇 세대에 걸친 고통의 세월을 겪어야만 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언제나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민족의 이익은 대통령의 개인적인 정치적 상념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1950년 5월 12일, 김용중은 당시 모스크바를 회담차 방문하고 있던 유엔 사무총장 트리그브 리(Trygve Lie)에게 분단이 계속될 경우 유혈 내전이 발발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유엔이 한국의 중립화를 보장할 것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냈다.

나는 냉전의 문제가 한국 문제를 시작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엔이 지도력을 발휘하여 중립화체제로 한국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미국과 소련이 동의하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유엔이 그 책임을 다하여 한국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세계는 다시금 안전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는 또 지난 1년간 한국에서 내부갈등으로 2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으니, 유엔이 한국의 통일 및 독립을 해결하는 데 거중조정 역할을 담당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이러한 요청은 한국 정부로부터 "외세에 빌붙으려는 수작"으로 간주되어 모진 비난을 당했고, 그의 중립화 통일론은 별다른 방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미국과 유엔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미국의 언론에 투고하는 형식으로 통일운동을 계속해 나갔으며, 이대로 가다간 이념 대립이 격화되어 유혈이 낭자한 내전이 벌어질 거라 경고했다.

그의 예상은 불행히 적중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에 김용중은 7월 13일 유엔 사무총장 트리그브 리에게 재차 호소문을 보냈다. 그는 지난 번 편지에 경고한 바와 같이 한국전쟁이 발발한 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유엔의 의사결정은 세계평화를 수호하는 책임감만큼이나 큰 용기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의 평화회복의 3단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1. 강압적 군사력이 한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유엔은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한국의 현 정권은 억압과 실정으로 신용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의 선거결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엔은 한국의 분단이 고착화되기 전에 행정을 책임질 수 있는 민간 기구를 즉시 결성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조차 유엔이 인기 없는 정부를 지원한다는 인식을 하게 될 것이다.

2. 무고한 한국 국민이 겪고 있는 재앙을 생각할 때 유엔의 모든 권한을 발휘하여 한국민을 구원하기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유엔의 마땅한 의무이다 그러므로 모든 정당한 방안을 강구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며 중재가 가장 간편한 방책이라고 인정할 때 인도의 수상인 네루에게 그 역할을 맡겨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네루는 최근 협상으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지구의 끝까지 찾아갈 것이다 고 선언 하였다.

3.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을 38선 위로 몰아내는 것은 단지 임시 해결책에 불과하다 유엔이 영원히 한국의 치안을 유지하고 보호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이 하나의 정부로 통일되지 않는다면 한국은 유혈사태가 계속될 것이고 국제안보는 위험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본인은 유엔에 의해 한국의 중립화가 보장됨으로써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것을 확신하며 이를 제안한다.

김용중은 또 1950년 8월 21일 유엔에 비망록을 보내 다음 8가지 단계를 유엔이 수행해달라고 호소했다.

1. 유엔안보리가 한국문제특별위원회를 조직.

2. 유엔 국제위원단 감시하 즉각 정전 및 군대의 6.25 이전 지점 복귀

3. 한반도에서 외국군, 군사고문단, 군사사절단 철수, 유엔 감시하 군대 및 경찰력의 단일 국립 보안대로 통합.

4. 유엔위원단이 과도한국정부로 기능

5. 종전 후 즉시 유엔위원단 감시하 자유선거.

6. 전국 정부 수립 후 유엔위원단 기능정지.

7. 유엔이 통일한국의 독립, 중립 보장.

8. 한국 복구, 종전 및 통일 달성.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한 뒤, 김용중은 이승만 정부가 북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려 하는 것을 보고 유엔총회의장과 사무총장에게 비망록을 보내 한국 정부를 비판했다.

1. 대한민국정부는 거의 시험적인 조건 하에서 수립되었다.

2. 1948년 서울에서 수립된 헌법과 정부는 1인 정부를 창출하려는 일단의 한국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3. 유엔총회는 이 정부는 단지 남한에만 실질적 통치력을 갖는다고 인정했다.

4. 이승만박사는 국민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다. 그는 국회의원들에 의해 지명되었으며 “비경쟁적” 투표로 “선출”되었다.

5. 1950년 5월 30일의 선거는 이 정부가 이전에 향유했던 극소수 대중신뢰의 대부분을 상실했음을 보여주었다.

6. 전쟁 초기 5일간 공산 침략군이 남한군대를 참패시키는데 결합한 수천명의 남한인들이 보여준 민첩성은 그들의 정부, 거대한 경찰병력, 군대에 대해 품고있던 적의의 척도였다.

7. 남한 및 북한의 해방된 지역은 유엔의 깃발 아래 재점령되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은 유엔에 있다. 이는 특정 개인혹은 세력의 자의에 맡겨질 문제가 아니다.

6.25 전쟁이 교착 상태로 접어든 1951년 3월 31일, 김용중은 이승만, 김일성에게 공개 호소문을 보내 평화회담과 휴전을 요구하며 내전의 책임자인 두 사람의 동시 사퇴를 주장했다. 또한 그해 6월 22일 교황, 켄터버리 대주교 등 교회 지도자들에게 평화호소문을 보냈다. 이때 그는 근동 및 아시아 대표로 구성된 평화위원회를 구성하고, 대중적 신뢰를 상실한 현존하는 두 정부를 해체하고 평화위원회 감시하 선거를 진행해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유엔 회원국과 중국의 보증하에 한국의 중립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2년 여름 부산정치파동이 벌어지자, 김용중은 즉각 성명을 발표해 게엄령의 즉각 철회, 투옥 국회의원의 즉시 석방, 테러단체 대한청년단의 즉시 해산을 요구했다. 그는 이승만이 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되었지만, 헌법을 어기고 직선제를 폭력적으로 강제하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국회가 새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되어있는 헌법을 어기고 독재적으로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후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위한 국민투표가 19551년 7월 15일에 치뤄지자, 김용중은 "이 선거는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이 선거에서 승리한 것과 같은 방식이다."라고 비판했다.

1953년 4월 9일, 그는 재차 성명을 발표해 보다 구체화된 중립화 통일 방안을 선언했다.

1. 중립국 위원단의 감시 하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자마자 일반적인 전국 총선거를 통해 수립될 단일 중앙정부 하에서 한국통일

2.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이 한국의 자주, 영토적 통합을 존중하며, 어떠한 특정 경제, 정치, 군사적 특권을 구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통해 한국의 중립을 보장. 그 보답으로 한국은 완전한 중립을 서약하며 상업적 교류를 이해 모든 국가들에게 동일한 조건으로 항구를 개방. 중립위원회(neutral commission)가 3년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이러한 서약의 이행을 감시하고 유엔에 보고함

3. 중앙 단일 한국정부가 수립되자마자 중립위원회의 감시 하에 모든 외국군의 철군

4. 한국이 완전히 복구될 때까지 매년 군사예산의 1퍼센트를 세계 모든 나라가 제공함으로써 한국의 전면적 재건.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이 열렸을 때, 김용중은 한국통일방안을 제출해 '환반도중립화 통일론'을 관철시키려 노력했다. 그의 통일방안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비례대표에 근거한 국회입법기구 선출과 국가수반 선출을 위한 전한국 자유선거를 동시 실시.

2. 유엔 구성원이 선출한 중립위원단(버마, 인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노르웨이, 멕시코, 브라질, 이집트로 구성)의 감시 하에 선거.

3. 한국고문위원단 창출, 13도에서 현정부 혹은 일제통치 하 부역자가 아닌 사람들로 평판이 좋은 시민 각 2명씩으로 구성. 이는 중립위원단에게 자문 및 지원 역할.

4. 한국 내 모든 군사력은 통일한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중립위원단이 통제하며,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선거 전후에 중립위원단의 외국군 처리.

5. 추가로 한국의 중립화가 유엔과 주변국들에 의해 보장될 것.

그는 1955년 6월 29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서한을 보내 국제 감시하의 자유선거 실시, 유엔, 4대 열강, 중공의 한국 중립화 보장 등을 요구했다. 1957년 10월 11일에 유엔에 재차 기고문을 보내 한국인에 의한 자주적이고 비군사적인 평화통일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

① 통일의 수단으로서의 무력 포기.

② 통일과정에서 중립국으로 구성된 감독위원회가 한국경찰과 군대를 통제하여 중앙정부를 수립하는데 있어서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③ 남북의 군대를 각각 5만명으로 줄이고 모든 청년단체 및 그에 준하는 단체를 해산할 것.

④ 감독위원회의 지휘하에 모든 외국군대의 동시철수.

⑤ 지금까지 외국과 체결한 모든 정치적 군사적 조약의 무효화.

⑥ 38선의 무조건적 철폐

⑦ 남북의 자유 무역과 여행의 재개.

⑧ 남북간의 우편 전신 전화 철도의 복구.

⑨ 감독위원회의 감독 하에 전국적 자유선거를 통하여 전 한국의 제헌의회 설립.

⑩ UN구성원들과 중국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의 통합을 존중하며 어떠한 정치 경제 군사적 특권도 추구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그 대신 통일된 한국정부는 중립을 엄격히 준수하고 통상을 위하여 모든 국가들에게 동일한 조건으로 주요 무역항을 개방한다 이 조약의 실행을 준수하기 위해 UN위원회가 10년간 주둔한다.

1958년, 김용중은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기타 미국 지도자들에게 독재정권으로 미국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이승만 정부와의 관계를 재고할 것이며, 지원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서 반 이슴만 활동을 벌이는 김용중 처리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고, 주미 대사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김용중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벌어지자, 김용중은 선거 무효를 촉구했다. 또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승만의 방한 요청을 수락하자, 이는 이승만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위라고 강력히 비판하며 방한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4.19 혁명이 전개될 때, 그는 이승만에게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유엔 감시 하의 새로운 선거를 치루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 시기 통일운동[편집 | 원본 편집]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 김용중은 통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60년 9월, 그는 유엔에 호소문을 보내 한국을 통일할 의무를 완수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소련이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① 미국과 소련은 그들의 피후견인을 화해시켜야 한다 민족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한국은 단일국가이며 통일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평화를 애호한다고 공언한 어떠한 강대국도 한국의 천부적 생존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숭고한 처사는 평화공존의 원리에 부합되는 것이며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 줄 것이다.

② 남한이 매년 하고 있듯이 북한도 그들의 대표를 유엔 총회에 보내어 통일에 관한 그들의 견해를 진술하게 한다 사실상의 북한 정권의 존재는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이미 인정되었다.

③ 양측의 긴장감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군사정전위원회를 인도 버마(미얀마) 실론(스리랑카) 스웨덴 스위스 등으로 구성된 중립국위원회로 대체하고자 한다.

④ 휴전선지역을 20마일로 연장 확대하고자 한다.

⑤ 중립국위원회의 감독 하에 전국의 무장군대를 점진적으로 해산시킨다.

⑥ 중립국위원회의 감독 하에 전국적인 자유선거 - 인구비례 대표제에 따른 -를 통해 궁극적으로 단일정부 하에 국가 재통합을 이루도록 돕는다.

1960년 10월 22일 미 상원의원 마이크 맨스필드(Mike Mansfield)가 오스트리아식에 의한 한반도중립화를 제안하자, 정일형 외무부장관은 ‘오스트리아식 중립화통일론 수용 불가 의 이유를 밝혔다 이어서 11월 2일 중립화통일론에 관한 담화에서 장면 총리는 유엔 감시 하에 남북을 통한 총선거로서 자유 민주통일하는 것만이 현 한국정부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통일방안임을 내세우며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한국정부의 반대에 대해 김용중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처럼 중립화를 통하여 한국의 당면문제를 해결하려는 견해를 주장하는 경우가 때로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학식이 풍부한 미국 상원의원 마이크 맨스필드가 미국적 사고방식의 중요한 단편을 보여주는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견해를 즉각 거절하는 한국인들이 정말로 대다수의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인지 나는 궁금하다 그들은 한국의 지리적 위치가 오스트리아의 경우와는 같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한국의 지리적 위치는 오스트리아 보다 훨씬 더 중립성을 요구한다.


세 강대국에 둘러 싸여 있고 이 중 두 나라는 전 세계 중 세 개의 가장 크고 강력한 국가들이다 나는 북측 혹은 남측에 있는 어떠한 한국의 애국자도 자신의 관심사와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 강대국 중 한 나라에 자신의 모국을 양도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에 한국이 이웃한 권력국가의 정치와 연루되었을 때 한국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결과로 고통 받았다 다행히도 한국에 이웃한 어떠한 나라도 다른 국가가 한국을 지배하려는 걸 관망하여 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주변국 중 어느 한 국가에 대해 편을 들거나 반감을 살 수는 없다 한국은 엄격한 공명성을 유지하고 대신에 주변국들은 유엔과 연합하여 한국의 독립 주권 및 영토의 통합에 대한 불가침을 보장해야 한다 주변국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만한 더 나은 방법이 있는가? (중략) 만일 한국이 중립화에 기초하여 통일된다면 관련국들이 사전에 모든 조건과 안보조항 그리고 보장사항들을 해결하고 동의한다는 것을 남한 지도자들은 알아야 한다.

장면 정부는 한국의 전략적 위치나 현재 공산권과 대치하고 있는 현실 등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와는 국내외의 제 조건이 다르며 정치 사회경제 문화적 조건들도 오스트리아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들어 중립화를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김용중은 주변 열강들이 한국에서의 세력균형에 대해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다는 점과 한국은 주변의 특정국가에 대해 선택적으로 우호적이거나 대립할 수 없는 위치임을 지적하며 오스트리아 못지않게 중립을 요하는 위치라는 상반되는 분석을 하였다.

즉 한반도는 주변국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어야 통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통일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서 그는 중립을 논했던 것이다 그리고 중립을 추진하기에 앞서 내부적으로 민족의 화합이 우선 요구되므로 남북은 상호불신과 적의를 버리고 협상을 통해 화해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자유선거를 통한 중립적 통일정부의 수립을 호소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과 직접 대화하고 협상할 것을 강조하였다.

1961년 1월 14일, 김용중은 장면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과 동서독의 예를 들어 남한 정부가 북한과 협상할 것을 강조헀다.

10년간의 피와 눈물의 경험은 어느 한 쪽도 상대에게 그 뜻을 무력으로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남과 북 전체가 아닌 어느 한쪽은 전체의 이익을 만족시킬 수 없다. 북한과의 협상은 개인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비난하듯이 공산주의에 항복하거나 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호간의 동의에 의해 합법적 협정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의 화합을 위해서 정치가다운 교섭을 하는 것이 국내외적으로 남한의 역량을 강화시켜줄 것이다 서구 민주주의가 상호간의 이익증진을 위해 공산국가들과 지속적으로 협상하는 것과 동서독이 서로간의 무역협정을 쇄신하고 있는 것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어떠한 외국의 제도도 우리의 조국에 완벽할 수는 없다 전 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구현하기 위해서 한국주의 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한국 정치가들의 과제이다. (중략) 우리의 합일된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어떤 강대국도 통일된 우리의 조국을 은쟁반에 담아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다 민족의 통일이 없이는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통일이라는 가장 중요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길을 다 찾아보며 할 수 있는 노력을 완전히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궁극의 사명이다 우리 민족은 희생양으로서 이 불행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

김용중은 1961년 1월 19일 김일성에게도 공개 서한을 보내 한국인의 정체성으로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차이를 극복하자고 제안하기도 헀다.

나는 공산주의자이건 자본주의자이건 간에 '한국인은 한국인이다' 라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무시하고 공산주의자와 함께 조국의 심각한 문제를 토론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한국의 정치 경제 체제가 바뀌고 전 세계의 정치 경제체제가 바뀐다고 하여도 한국인에게 한국은 고향이다. 나는 당신들의 선전기관이 평화적 통일에 대한 호소를 강조하면서도 왜 남한 지도자들과 민주국가 특히 미국에 대해 근거 없는 비난과 욕설을 퍼붓는지 이해할 수 없다.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상대방을 더욱 가깝게 끌어당기는 대신 그러한 적대적 전술을 쓰면 상대는 오히려 멀어지게 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당신의 정책이라면 냉전이라는 저주에서 우리 민족이 일찍이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당신의 의도라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당신네의 비양심적인 선전가들이 당신과 당신 국가의 품위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이 예의 없는 언동을 몹시 싫어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한국은 두 개의 적대적 정권의 통합뿐 아니라 미국 러시아 중국이라는 강대국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문제에 깊숙이 개입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들 북의 지도자들이 우리 민족의 번영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면 당신들은 누구에게도 종속적이어서는 안 되며 누구에게도 적대적이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들은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이제 당신의 애국심이 조국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 인민 대중들에게 밝혀야 할 때가 아닌가? 당신에게 있어서 당신 조국의 자유보다 공산주의가 더욱 소중할 것이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우리는 한 혈통이고 한 민족이다 남과 북 어느 곳도 상대편의 약점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나는 우리가 국제적인 힘의 정치에 가담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 걱정이다 우리 민족의 생존 문제는 어떤 문제보다 우선 고려되어야 한다.

김용중의 한반도 중립화 통일 방안은 한국 언론에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61년 3월 7일 <서울신문>은 "김용중씨의 통한제언"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그의 통일론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상호 비방, 간첩행위 중지

2. 남북간 연락부 설치.

3. 유엔 주선하 중립국가에서 통일문제회담 개최 3-1. 동서 양 진영 불가담 국가로 군사정전위원회 대체. 3-2. 위 위원단 감시 하에 인구비례 전국총선거로 제헌국회 창설, 전 한국 정부 수립, 유엔, 인접국가들 독립, 주권, 영토권 보호 하에 한국 중립 통일.

4. 남북 군대 총 10만 명으로 감축.

5. 남북 단독 체결한 기존의 국제조약 협정 협약 무효화.

6. 통일회담으로 해결되지 못하면 동서양진영 불가담국가로 조정위원단 창설

7. 과도기에 조정위원단 통해 상호 교역 우편물과 이산가족 교류 개시

1961년 2월 25일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는 일본에서 통일운동을 벌이고 있던 김삼규 등과 함께 김용중을 명예의장에 추대했다. 민족통일연맹(민통련) 역시 김용중의 이름을 빌렸는데, 이는 김용중의 동의를 얻지 못한 것이었다. 1961년 3월 2일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 발기준비위원회의 대변일 김기철은 김용중에게 중립화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국외에 강력한 유대를 맺도록 하자는 공개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용중은 국내와 아무런 연계를 맺지 못했고, 또한 적극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그의 중립화 통일방안은 한국 정부에게 별다른 힘을 끼치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 시기 통일운동[편집 | 원본 편집]

5.16 군사정변 이후 국내에 활발하게 진행되던 통일운동은 종막을 고했다. 박정희 정권은 김용중을 친북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그의 어떠한 제안에도 공식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김용중은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통일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1961년 유엔총회의장에게 서한을 보냈고, 1962년 유엔각국대표에게 서한을 보냈다.

그는 이 두 개 서한에서 군사정전위원회를 중립국위원회로 교체할 것, 남북시민으로 구성된 자문연락위원회를 둘 것, 경제 교류, 남북 왕래로 촉진할 것, 엄정중립정책을 수립할 것 등을 한국통일방안으로 제시했다. 1964년 12월에는 박정희, 김일성 등 남북한 지도자들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이 서한에서 자신의 민족 자주화론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 조국의 운명은 우리들 자신의 손에 달려있으며 우리 한인이 우리의 주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문제와 난관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외부의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이 일을 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그는 통일 방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① 불가분의 조국을 그의 본래 상태에 복귀시키기 위한 협상을 하기 위해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통일위원회를 수립하되 위원은 남북에서 5명씩 선출하여 11번째 위원은 쌍방이 동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할 것.

② 정치적 해결의 서막으로서 다음과 같은 일련의 긴급한 인도주의적 조치를 즉시 실시할 것. 가: 이산가족이 다시 모여 그들이 거주지를 어디라도 희망하는 대로 선택하는 자유, 나: 국가 양 부분 간에 무역할 수 있는 무제한한 자유, 다: 남북 간의 이주와 여행의 자유, 라: 국가 양 부분 간의 우편 전화 전신 수송과 전력 공급의 재개 마: 전국을 통한 학술과 체육 활동에 참가.

③ 통일위원회의 지도하에 한반도로부터 모든 외국 군대를 동시에 철거시키고 한국의 병력을 다만 국내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경비대 수준으로 축소할 것.

④ 통일위원회에는 38도선에 있는 외국의 장벽 을 철폐하고 군사 휴전위원회를 해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것.

⑤ 전국적인 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제헌국회 선거를 위한 통일위원회의 지도와 감시 하에 비례 대표제에 의해 실시될 자유로운 전조선선거를 준비할 것.

⑥ 현재의 양 정권이 체결한 모든 협정 조약과 공약을 무효화시킴에 따라 미국과 유엔이 인방 제국에 의해 보장될 한국의 중립적 지위를 확립할 것.

1964년 김용중의 공개편지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바로 북의 김일성 수상이 회신을 보낸 것이다. 김일성의 회신(1965. 1. 8)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1. 조선의 통일문제는 조선사람 자신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내정문제임

2. 일체의 외국군대가 철퇴한 후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인 원칙에 기초한 비밀투표에 의하여 남북 총선거를 실시한다.

3. 반드시 연방제가 아니드라도 남북조선대표에 의하여 구성되는 통일적인 기관을 상설하여 자주적인 통일을 실현할 대책을 강구한다

4. 남북간의 경제, 과학, 문화, 예술, 체육, 서신, 인사교류를 실현시킨다.

5. 통일문제에 이바지할 대책을 강구한다.

6. 남북이 일체의 외국과의 군사조약을 파기하고 남북쌍방의 병력을 축소한다.

김용중은 김일성이 회신을 보내준 것에 고무되었다. 그는 1960년대 말~70년대 초 박정희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김일성 혹은 북한 대표를 서울로 초청해 통일 문제를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1969년 유엔총회에 보낸 편지에서 유엔군사령부(UNC)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가 박정희정권의 수호자일 뿐이라며 이의 해체를 강력히 촉구했다. 그리고 유엔 산하 모든 외국의 철수를 주장하며, 한국에 대한 유엔 및 주변4강의 공동 중립(neutrality)협정 체결을 촉구했다.

김용중의 주장은 종래 미국과 유엔의 역할을 강조하던 입장에서 크게 변화한 것이었다. 현상적으로는 오랫동안 북한이 주장해오던 유엔간섭 배제, 외국군 철수라는 구호와 동일한 것이었다. 북한은 즉각 이에 반응했다. 1907년 2월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이극로는 친필로 쓴 장장 15쪽 분량의 편지에서 김용중이 유엔사?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 폐지, 외국군철수를 요구한 것을 격찬하며 “더욱 효과적인 의견교환을 위하여 우리와 서로 만날 것을 당신에게 제의”했다. 그러나 김용중은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며 평양 방문을 거절했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1970년 6월 재차 김용중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이극로, 부위원장 강양욱, 백남운, 상무위원 이기영, 위원 홍기문, 김석형 등이 연명으로 <뉴욕 조선민주주의통일전선 위원장 고병철>에게 보낸 편지(1970. 6. 3) 사본이 동봉되어 있었다. 김용중은 북한의 연속적인 제의를 받자 로광욱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보낸 편지 사본을 보이며 고병철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면서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통신할 필요가 있지 않겠냐고 밝혔다. 또한 모스크바의 김영집이라는 인물을 통해 북한과 통신할 수 있다고 했는데, 김영집은 아마도 김용중에게 북한 선전물을 보내주던 모스크바의 북한 외교관이었을 것이다.

1970년 11월, 김용중은 박정희에게 편지를 보내 김일성과 즉시 만나 남북통일문제를 논의하라고 요청하였고, 주한미군 철수 및 베트남 파병 철회를 요구했다. 그는 박정희에게 보낸 공개편지를 미국무부와 북한 측에 모두 전달했다. 북한의 반응은 신속했다. 1971년 2월 1일 10시 8분 조선중앙통신 국제부는 김용중이 박정희에게 보낸 편지(1971. 11. 19)의 사본을 김일성에게 전달했음을 보도하며, 김용중의 편지를 박정희 비판에 활용했다. 같은 날 오후 16시 21분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의 위임에 의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이극로, 강양욱, 백남운이 연명으로 김용준에게 답장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이 답장에서 박정희 정권의 유엔감시하의 선거, 승공통일, 평화통일구상을 비판하며 “김구, 김규식선생 같은 분들도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는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1971년 대선을 목전에 둔 북한정권은 “조국의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애국적 인사가 남조선 정권에 들어앉는다면 그와 기꺼이 남북협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이후 북한과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통일문제를 논의한 그는 1971년 12월 18일 로광욱에게 편지를 맡겨 북한에 직접 전달했다. 그는 “민족통일에 대한 당신의 제안이 나와 유사한데 대해 매우 기쁘다”고 썼다. 이 편지에서 김용중은 북한이 미국의 주요 인사(의원, 학자, 신문기자, 사업가)들을 북한에 초청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당시는 북한이 반미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로광욱은 냉대받다가 별다른 답변을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4개월 후 이극로 명의로 전해진 공식 답장은 한의 상황을 장황하게 비난하고, 북한의 통일노력을 예찬한 후 원론적인 통일론을 제시하고 끝을 맺었다.

이러한 김용중의 행보는 대한민국 정부의 분노를 샀다. 그는 친북 인사로 몰렸고, 1960년대 중반 이후 미주 교포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국내에서 온 인사들 역시 그를 기피했다. 그는 이러한 현실에 괴로워하며 위스키에 중독되었고, 이로 인해 기도암 수술을 받았다. 이후 본가가 있던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그는 1972년 조국통일재미촉진위원회를 결성해 의장단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북한이 주창한 주체사상을 "남과 북이 다같이 추구하고 있는 공통된 기본이념"이라며 주체사상을 실질화함으로써 통일을 앞당기자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 및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1972년 5월, 김용중은 박정희에게 보내는 성명에서 북한과 통일문제 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하며, 박정희 정권이 한국 민족주의 독립의 모든 가치를 상실시켰다고 비판했다. 이것이 박정희 정권에게 보낸 마지막 공개편지였다. 1974년에는 로광욱, 최동식과 함께 닉슨 대통령에게 경찰국가인 박정희 독재정권을 격려하는 방한 계획을 취소해 달라는 편지를 썼으며, 그해 9월 키신저 국무장관에게도 "스탈린, 히틀러 같은 독재자 못지 않게 독재적인 남한 경찰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의 무기 및 자금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5년 1월, 김용중은 LA 타임즈에 <미국은 한국을 떠나야>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박정희정권이 자신의 안전을 위한 “인질”로 미군부대를 계속 억류하길 희망하며 국토의 북반부를 정복할 희망으로 다시 한번 한국내전에 미국을 끌어들일 책략에 골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8개월 뒤인 1975년 9월 6일, LA 남가주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뼈가루로 만들어 내 조국 38선에 뿌려달라.

김용중은 친북 인사로 간주되어 있었기에 오래도록 대한민국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 2000년에서야 그의 독립운동 행적이 인정받으면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뼈가루가 된 유해는 한국에 돌아와서 절반은 그의 장녀 김영보에 의해 휴전선 일대에 뿌려졌고, 나머지 뼛가루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이장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