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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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芳洙.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6년 6월 7일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면 읍내리 358번지에서 김영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창씨명은 금광성항(金光成恒)이다. 그는 무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잠시 과일장사와 군농회 지도원 등에 종사하다가, 연극배우가 되기로 마음 먹고 1942년 3월부터 경성부 소재 동양극 연극부원이 되었다. 하지만 생계가 어려워 그해 9월 중순 고창군 고창면으로 돌아와 1943년 9월 16일부터 대일본방적주식회사 인사 외교원으로 근무했다.

1941년 4월경 고창군 아산면 상갑리에 거주하는 신강수원(神江壽元)과 만나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조선민족은 우수한 민족으로 조선은 지난날 독립국가로 매우 융성했던 시대도 있었으니, 조선은 당연히 독립되어야 한다. 우리들이 고학을 하면서 대학에 다니는 것도 결국 조선독립을 하려는 것으로, 나는 학우 여러 명과 그룹을 결성하여 활발한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로 격려하며 뭉쳐서 동지 획득에 노력하고 있다.

김방수는 이에 공명하여 조선의 독립을 학수고대하였고, 일본이 대동아전쟁에서 패전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 기회에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1943년 6월 하순경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면 읍내리에 사는 자촌의정의 집에서 자촌의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배우가 되어 조선역사극을 연출하여 조선대중에게 민족의식을 주입하려고 경성에서 역사극을 연구 중이었으나 학자금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왔으나 끝까지 조선독립운동에 매진할 각오이다.

1943년 8월 중순경 고창면 노동리 21번지에 거주하는 신광용환에게 이렇게 말했다.

백두산에 김일성이라는 신촐귀물하는 조선인이 있어 병기 다수를 가지고 일본에 반항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데, 그는 위대한 사람으로 그러한 인물이 있기 때문에 우리 조선인은 불만이 있어도 참고 오늘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1943년 10월 중순경 자촌의정의 집에서 자촌의정 외 3명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선인은 일본인으로부터 경제적 압박을 받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 청년은 조선민족의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 크게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

이외에도 고창군 일대의 여러 곳을 돌며 조선독립운동에 힘을 쏟을 것을 권유하였으며, "독일의 히틀러는 일개 병사에서 오늘에 이른 참다운 위인으로, 우리가 최고로 숭배할 인물이요 희망이다. 우리 젊은이는 원대한 희망을 품고 저 히틀러와 같이 되도록 노력하며 혁명운동을 일으켜 조선독립운동에 매진하자"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1942년 11월 하순경 고창군 고창면 읍내리 목원용성의 집에서 목원용성, 신석선전, 신광용환 및 오근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 비행기의 성능은 실로 우수하여 그 속력 등은 일본 비행기가 따라잡을 수 없다. 또 미국은 경제력이 풍부하여 일본의 패전은 틀림없음에 일본 패배의 때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것으로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행적이 일본 형사에게 발각되면서 체포되었고, 1944년 9월 25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육해군형법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 1945년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고, 이후 고창군에 거주하다 1974년 3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김방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국립서울현충원 212실 117호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