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1879년)

金東洙.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9년 전라도 광주목 경양면 병문리(현 광주광역시 북구 우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포목상과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7년 이원오(李元五), 조경환, 양상기, 김현길(金玄吉) 등과 함께 광주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광주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양진여에게 가담했다.

동료 의병 5~6명과 함께 전남 광주군 갑마보면의 친일 면장(面長) 집에 들어가 군수품을 징발하던 그는 1908년 12월 12월 25일 5∼6명의 부하들을 인솔하고 면장 집에 60원을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다고 거절당하자 그를 구타하고 그로부터 짚신 50켤레를 징수하였다. 1909년 1월 12일에 광주군 갑마보면 복용리 이장집에 들어가 총기로 위협하면서 20원을 강요하였으나 돈이 없어 백목 2필을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1909년 2월 하순에 광주 오치동의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20원과 백목 10필을 강요했으나 거절당하고 백목 3필만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이후 1909년 2월 30일부터 15명과 함께 총기를 들고 5월까지 광주․화순․담양․창평․장성 등지를 돌아다녔다.

1909년 3월 15일에 삼취지동에서 동장집에 들어가 백목 4필을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20일에는 장성군에 사는 최봉근 집에 2명과 함께 들어가 군도 1자루를 탈취했다. 1909년 3월 23일에는 광주군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5원을 갈취했으며 29일까지 광주를 무대로 계속 활동했다. 또한 1909년 4월 1일부터 4월 29일까지 7차례에 걸쳐 현금과 백목 수합, 교전으로 인한 3명의 전사자와 총 9정을 빼앗기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특히 1909년 5월 19일에 5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광주군 덕산면 덕산에서 일본군 헌병대 광주분견소의 적군들과 접전을 벌였고, 화승총 10정을 빼앗아 갔고, 31일에 광주시 갑마보면 본촌동에 소재한 김영조 집에서 광주경찰서 순사부장 외 11명과 교전하였다.

이후에도 수차례 광주에서 활동하던 김동수는 1909년 9월 충북 사창 전투에서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이후 1910년 2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동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